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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

“藝人의 자존심은 연습량이 말한다”

가야금·판소리 명인 강정숙의 국악 인생

  • 최호열 기자 │honeypapa@donga.com

“藝人의 자존심은 연습량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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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MBC 국악유망주상, KBS 제2회 전국 명인명창경연대회 판소리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국악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그는 그해 12월 국립창극단에 입단했다. 박동진, 박초월, 김소희 등 최고의 소리꾼들이 총집합한 곳이었다. 또 한층 도약할 수 있는 기회였다.

입단 1년 만에 창극단의 ‘꽃’으로 올라섰다. 놀부전, 심청전, 춘향가, 수궁가 등 당시 국립창극단에서 공연하는 모든 창극의 주연은 그의 몫이었다. 방송국 등 외부에서 하는 창극에도 주인공으로 캐스팅되곤 했다. 판소리, 민요, 가야금 등 대중적 인기를 끌 수 있는 장르를 두루 잘하는 데다, 단아한 미모까지 갖춘 덕분이었다.

국악 장르 중에서도 창극만큼 어려운 게 없다. 한 사람이 보통 4, 5인 역을 해야 한다. 창도 해야 하고, 악기도 연주해야 하고, 때론 춤도 추고, 연기도 해야 한다.

▼ 당시엔 창극의 인기가 대단했죠.

“공연마다 관객으로 꽉 찼으니까요. 요즘 국악이 인기가 없다고 하지만, 지금도 국립창극단 공연에는 관객이 많아요. 사람들이 국악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공연이 줄다보니 관심도 줄어든 거예요. 대관(貸館)을 하려면 2년 전에 예약해야 해요. 무대가 많이 늘어야 합니다.”



▼ 소리, 연주, 춤은 그렇다 쳐도 연기는 배운 적이 없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제가 남보다 공부를 하나 더했는데, 바로 ‘말 공부’예요. 경상도 출신인 제가 판소리는 전라도 사투리, 대사는 서울말로 해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녹음기 틀어놓고 발음연습을 혹독하게 했어요.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울컥해요(웃음). 속상하고 힘들 때는 풀릴 때까지 노래를 하거나 장구를 두드렸죠.”

잘나가던 1978년, 갑자기 창극단을 그만뒀다.

“어느 날 갑자기 외부 활동을 금지했어요. 창극단 무대에만 전념하라는 것인데, 제 생각은 달랐어요. 기량을 갈고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악의 저변 확대를 위해 방송을 활용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나 싶어 사표를 냈어요. 그때까지 좋은 공연도 많이 봤고 창극에서 뮤지컬까지 할 수 있는 건 다해봐서 사표를 내면서도 아쉬운 건 없었어요.”

젊은 주인공이 필요했던 창극단은 처음엔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창극단을 나온 뒤에도 1980년대 초까지 각종 창극 공연에서 주인공으로 활동했다.

박귀희 門下로

“藝人의 자존심은 연습량이 말한다”

박귀희(가운데) 선생과 안숙선(왼쪽), 강정숙이 가야금병창을 하고 있다.

“만정 선생님은 저를 늘 ‘꼬맹이’라고 부르며 딸처럼 대해주셨어요. 선생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죠. 제게 마음의 의지를 많이 하셨죠. 공연하러 집을 나섰다가 바로 되돌아와서 저를 꼭 안아주고 다시 나가곤 하셨어요. 제가 지방 공연을 갈 때면 밤을 삶아 꿀과 섞어 경단을 만들어주시곤 했죠.”

당시 외국에서 귀한 손님이 오면 삼성, SK 등 대기업에서 국악 공연을 열어주곤 했는데, 김소희는 다른 제자들 모르게 그를 데려가 무대에 세운 때가 많았다. 그런 공연에서 받은 출연료가 창극단 월급보다 많았다고 한다.

▼ 그만큼 아끼는 제자였으니 후계자로 삼으려 했겠군요.

“어느 날 제게 전수자 지정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 오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선생님에게는 저 말고도 신영희 언니, 김동애 언니 등 실력 있는 제자가 많았어요. 특히 동애 언니는 객지 생활을 하는 제게 친언니 이상으로 잘해줬죠. 그런 언니가 절 부르더니 ‘너는 가야금병창도 잘하니까 향사(박귀희) 선생에게 가면 안 되겠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야 자기가 전수자가 될 수 있다면서. 전수자가 되지 못하면 자기는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하더군요. 그때 20대였던 제가 전수자가 뭔지, 스승을 옮기는 게 뭔지 알았겠어요. 그저 가장 친한 언니와 헤어지는 게 싫어 그렇게 하겠다고 했죠.”

▼ 김소희 선생에게 뭐라고 말했나요.

“그냥 ‘판소리가 힘들어 가야금병창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했어요. 선생님이 크게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에요. 사람들 모여 있는 자리에서 뺨을 맞고, 정든 아랫방을 떠나야 했죠. 얼마 후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하셨는데, ‘철새’라는 표현을 쓰셨어요. 아마 그때 전수자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판소리만 했겠죠. 거기서 운명이 바뀐 거죠.”

▼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이 동애 언니를 생각하는 마음보다 작았던 거네요?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저 좋아하는 언니와 헤어지기 싫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많이 의지했거든요. 제가 선생님을 옮긴다고 해서 판소리를 아주 안하는 것도 아니니까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한 거죠. 나중에 선생님이 큰 상처를 받으셨다는 걸 알고 많이 괴로웠어요.”

▼ 그때 김소희 선생에게 완전히 내침을 당한 건가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공연도 같이 했고, 명절이나 생신 때마다 찾아뵙곤 했어요.”

▼ 나중에라도 해명할 생각은 안 했나요.

“사실을 이야기하면 동애 언니가 난처해지잖아요. 나도, 동애 언니도,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신영희 언니도 입을 다물었죠. 나중에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 병원을 찾아가 말씀드리고 오해를 풀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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