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란 무엇인가<br>E. H. 카, 김택현 옮김, 까치
변호사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인 서울대학교에서도 이 책을 필독 권장도서로 지정했다. 게다가 카는 영국 외교관으로 소련에 체류했을 뿐이다”며 검사를 몰아세운다. 이어 “영국은 카가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이자 자랑스러워하는 학자라고 생각하며, 대한민국의 많은 국민도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어보기 바란다”는 영국 외교부 답변서를 낭독한다.
영화 흥행의 부수적인 효과로 군사독재 시절 대학가의 필독서였던 ‘역사란 무엇인가’는 한동안 서점가에서 새삼스레 바람을 일으켰다.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부분이다.
“역사가는 사실들의 비천한 노예도 아니고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다.…역사가는 자신의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어내고 또한 자신의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과정에 종사한다. 둘 중 어느 한쪽에 우위를 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다. 자신의 사실을 갖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쓸데없는 존재다. 자신의 역사가를 갖지 못한 사실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하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역사는 역사가의 해석
이 명제는 ‘역사는 역사가의 해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역사가의 해석이 있어야만 역사적 사실이 성립한다는 말과 같다. 역사가의 해석은 자신의 현재 입장과 가치관의 반영이다. 이러한 시각은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독일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의 실증사학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랑케의 역사철학은 ‘역사가의 과제는 단지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역사적 자료에 충실하면서 사료의 개념을 편견이나 선입관에 사로잡히지 않고 끝까지 객관적으로 저술하는 게 랑케의 지론이다.
랑케가 ‘사실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게 역사가의 임무’라고 한 데 반해, 카는 “사실은 스스로 말하는 게 아니라 역사가가 말을 걸 때만 말한다”고 반론을 편다. 카는 역사적인 사료 가운데서 골라내 가위로 잘라내고 그 부분을 풀로 붙여내는 것과 같은 ‘가위와 풀의 역사’에 반대한다.
카는 “완전한 객관적 실증주의란 불가능하다”면서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다”는 고전학자 알프레드 에드워드 하우스먼의 명언을 인용한다. 동시에 현재의 목적을 위해 과거 사실을 주관적으로 왜곡하는 오류도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카는 실증주의 역사학의 사실 숭배를 비판하는 의미에서 ‘가위와 풀의 역사’라고 불렀지만, 역사 연구의 기초적인 과정을 무시하거나 오롯이 부정하려는 뜻은 없다. ‘가위와 풀’이 역사 연구의 기본이 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카는 중심을 과거에 두는 역사관과 현재에 두는 역사관의 중간 입장을 따른다. 사실과 주관이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하며, 역사가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건을 뽑아서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현재의 시각에서 과거 사실을 해석할 때 사실은 사라지고 해석만 남게 되는 허무주의적 결론도 경계했다.
카는 역사가를 흥미롭게 비유한다. “역사가란 높은 절벽 위의 독수리나 사열대에 앉은 귀빈처럼 행진하는 대열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이가 아니라 단지 행진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묵묵히 걸어가는 희미한 존재일 뿐이다.” 역사학이란 역사의 일부일 뿐이어서 역사학의 변화는 역사적 사실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뜻이다.
저자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마지막 부분에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역사는 점진적인 개선을 추구한 사람들이 아닌 기존 질서에 근본적인 도전을 감행했던 사람들에 의해 진보했다.”
그는 19세기식 단선적 진보주의자는 결코 아니다. 그는 “진보는 만인에게 평등하고 동시적인 진보를 의미하지 않으며, 또 그러한 의미를 가질 수도 없다”며 비연속적인 진보를 주장한다. 그가 연 새로운 지평은 역사가에게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요구하는 동시에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임에 비중을 둔다. 그는 “역사에서 절대자는 과거나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쪽으로 움직여 나가고 있는 미래에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의 테제로는‘역사는 진보한다’와‘역사는 과학이다’를 꼽을 수 있다. 역사가들이 연구과정에서 사용하는 가설의 지위와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가설의 지위는 유사성이 크다고 한다. 카가 역사를 과학이라고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과학’과 ‘진보’는 근대의 전형적인 거대담론이 됐다. 그는 또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 우선 역사가를 연구하라. 역사가를 연구하기에 앞서 우선 그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연구하라’고 주문한다.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라는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