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호

‘그냥 그저’ 만든 운동가요 금지조치 혹독할수록 널리 퍼져

김민기 ‘아침이슬’

  • 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 | 사진작가·신구대 교수 photocivic@naver.com

    입력2014-09-19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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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그저’ 만든 운동가요 금지조치  혹독할수록  널리  퍼져
    모든 예술은 음악을 동경한다. 쇼펜하우어의 말씀이다. 특히 노래는 그렇다. 노래는 인간의 삶 깊숙이 배어 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인간은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인간은 저항할 때도 노래를 부른다. 대상은 주로 군림하는 세력이다. 왜냐하면 노래는 어떤 예술 장르보다 빨리 상징적인 의미를 전파하거나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제 무왕이 소년 시절에 지어 아이들에게 널리 부르게 했다는 ‘서동요’, 1894년 동학혁명 때 녹두장군 전봉준을 기리는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나라 뺏긴 민족의 설움을 달래준 ‘아리랑’까지, 노래는 힘이 세다. 대중의 애환, 저항적 이데올로기를 담은 노랫말은 때때로 지배세력에겐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저항의 노래는 일반적으로 특정 세력으로부터는 절대적인 사랑을 받지만 대중과는 거리감이 있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저항의 노래이면서도 운동권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엄청난 사랑을 받은 노래, 바로 ‘아침이슬’이다.

    ‘아침이슬’은 386에게는 하나의 상징 노래쯤 된다. 그 시절 강촌이나 대성리 등 단골 엠티 장소에서는 해가 중천에 있어도 ‘아침이슬’의 가락은 마르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당국의 금지조치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래는 1970~80년대 대학가에서 그렇게 불렸다. 송창식의 ‘고래사냥’도 있지만 아무래도 ‘아침이슬’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아침이슬’을 부르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때론 뭔가 불끈하는 것이 솟아오름을 느끼게 된다. 종국에는 목이 메는 특이한 노래다. 이른바 비장미의 극치다.

    그러나 노래는 오랫동안 방송 금지곡으로 묶였다. 가사 중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부분이 염세적이란 이유였다. 일부에서는 붉은 태양이 북한 김일성을 연상케 한다는 식으로 의미를 확장하기도 했다.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라는 마지막 구절에 이르면 맘 여린 여학생들이 흐느끼곤 하던 그런 노래다.



    지난 시절, 저항 노래의 상징처럼 돼버린 ‘아침이슬’은 치열한 운동성과 역사성에 비해 의외로 단순한 동기에서 만들어졌다. 지난 30여 년 동안 숱한 역사의 현장에서 때로는 행진가로, 때로는 진혼곡으로 불리며 이 땅의 고통 받는 많은 이를 위로했던 노래의 탄생은 지나치게 맨송맨송하다. 1970년 봄 경기고를 거쳐 당시 서울대 미대 회화과 1학년에 다니던 김민기는 이런저런 이유로 낙제를 당해 하릴없이 히피처럼 ‘시간만 축내고’ 있었다. 지금은 대학로로 불리는 동숭동 일대를 맨발로 배회하며 기행을 일삼던 그는 그 시절 풍미했던 실존철학에 빠져 들었다. 그런 그가 새 학기의 복학을 기다리다가 ‘그냥 그저 작곡’(그의 표현대로)한 것이 ‘아침이슬’이다.

    ‘그냥 그저’ 만든 운동가요 금지조치  혹독할수록  널리  퍼져

    해방구가 된 대학로의 주말 밤 풍경, 도로 전체가 인파로 넘쳐난다.



    김민기 작곡, 양희은 노래

    1970년대 한국 사회의 굴절과 왜곡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노래의 탄생치고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당시 갖가지 화제를 뿌렸던 김민기는 지금도 본격적인 작곡을 했다기보다는 그저 재미 삼아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굳이 덧붙인다면 자신이 전공하던 그림의 이미지를 노래로 바꿨을 정도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실제 이 말은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노래 ‘아침이슬’을 듣거나 함께 부르노라면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이 하나의 풍경화처럼 눈앞에 떠오른다. 그러나 노래는 작곡도 중요하지만 누가 불렀느냐도 중요하다. ‘아침이슬’은 김민기 자신이 녹음한 데 이어 그의 서울 재동국민학교 동창생인 양희은의 맑은 목소리로 녹음된다. 음울하고 저항적인 가사와는 대조적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부른 노래는 곧바로 1970년대 우울한 시대 정서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노래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 ‘아침이슬’은 기성세대에게 데모, 휴학, 대학문화, 동숭동, 학림다방 등을 떠올리게 한다. 검은색으로 물들인 구제품 군복을 입고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문제를 고민하며 부르던 그 시절의 대표 노래였다.

    그러나 ‘아침이슬’은 얼마 뒤 10월 유신을 맞아 금지곡으로 묶여 제도권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다시 들리게 된 것은 1987년 이른바 ‘6·29 선언’ 이후다. ‘아침이슬’의 방송금지 사태는 참으로 희화적이다. 가사 맨 처음 등장하는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에서 “긴 밤”이 1970년대 당시의 유신정권을 의미한다는 게 나중에 밝혀진 금지 이유였다.

    ‘그냥 그저’ 만든 운동가요 금지조치  혹독할수록  널리  퍼져

    서울 재동초등학교. 김민기는 ‘아침이슬’을 작곡해 자신의 재동초등학교 동창인 양희은에게 부르게 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아침이슬’은 1970년에 발표됐고, 유신은 1972년 10월에 선포됐다. 금지하기 위해 억지로 갖다 붙인 황당한 이유쯤 되겠다. 하지만 이 같은 공백기 속에서도 ‘아침이슬’을 비롯해 김민기가 만든 많은 노래는 1970년대를 관통한다. 민중의 사랑과 보호 속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활화산처럼 번져나갔다. 금지곡으로 묶인 덕분에 오히려 그의 음반은 천정부지의 고가로 팔렸다. 또 공장의 야유회나 대학가의 캠프에서 자동적으로 불리던 통과의례의 노래였다.

    그러나 ‘한국의 대중음악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곡’으로 찬사를 받던 그의 노래는 발표되는 족족 방송 금지되고 판금됐다. 이런 이유로 그가 만든 많은 노래는 일단 ‘김민기’라는 이름 때문에 오랫동안 발표될 수 없었다. 자연히 그는 자신의 곡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내보냈다. 김민기는 ‘아침이슬’ 발표 이래 1980년대 중반까지 17년 동안 노래 때문에 연행과 활동금지를 되풀이당해왔다. 그의 노래 뒤에는 늘 폭압적인 정권의 탄압과 그에 맞서는 민중의 사랑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농촌으로, 또 폐허가 된 탄광촌으로 자리를 옮기며 노래를 만들어왔다. 1972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 때 부른 ‘꽃피우는 아이’ ‘해방가’ ‘우리 승리하리라’ 때문에 이튿날 새벽 일찍 동대문경찰서로 잡혀가 고초를 겪었고, ‘늙은 군인의 노래’‘거치른 벌판의 푸르른 솔잎처럼’도 발표하자마자 곧바로 금지됐다.

    특히 보병 제12사단에 소총수로 복무할 당시 정년 2개월을 남겨놓은 늙은 탄약 담당 선임하사의 시름을 노래로 옮긴 ‘늙은 군인의 노래’는 슬픈 노랫말과 비감 어린 곡조로 한 시대를 풍미하는 노래로 부상했다.

    만드는 족족 금지곡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군 생활이 워낙 험난해 ‘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로 알려진 강원도 인제군 원통에서 군 생활을 할 때 탄생한 노래다. 정년을 앞둔 선임하사가 막걸리 두 말을 내고 의뢰해 만든 곡. 30여 년 군 생활을 마감하는 노병이 토로한 국방색 제복의 서러움에서 모티프를 얻어 노랫말과 곡을 붙였다고 한다. 병영에서 암암리에 애창되던 이 노래도 곧 금지곡으로 지정됐지만 오히려 일반인에게까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음울하고 어려웠던 시대, 강남 룸살롱 숙녀들까지 애창, 졸부들의 호화 주석(酒席)에 무언의 반항을 했으며 민주화에 목마른 동남아 국가들에 수출되기도 했다.

    군 사기 저하와 군 이미지 실추를 이유로 금지됐지만, 노래는 서정성, 그리고 운동권 가요로는 보기 드문 애잔한 멜로디로 대학가, 재야 운동가, 노동계의 큰 호응을 얻으며 오랜 세월 사랑을 받아왔다. 기이하게도 금지 조치가 혹독할수록 그의 노래는 멀리 그리고 널리 퍼져나갔다. 비록 방송에서 퇴출되고 음반 발매는 금지됐지만, 이 노래는 가난한 사람들의 벗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 좋은 시절에는 잊혔다가 삶이 고통스럽고 시대가 암울하면 먹먹한 가슴으로 부르는 기구한 운명의 노래가 ‘늙은 군인의 노래’였다. 지금의 잠깐 유행하는 걸 그룹의 댄스 음악과는 차원이 다르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군인 대신 교사, 농민, 노동자 등으로 다양하게 바뀌어 불리면서 민초의 삶의 현장에서 꾸준히 사랑을 받아왔다. 얼마 전 KBS ‘불후의 명곡’에서 가수 홍경민이 대형 중창단과 함께 선보여 큰 호응을 얻었다. 그날 이후 김민기의 구닥다리 노래들이 연달아 유튜브에 오르는 등 신세대에게도 리바이벌 붐을 일으켰다.

    또 다른 전설적인 노래는 ‘공장의 불빛’이다.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진 악명 높은 동일방직 똥물테러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공장의 불빛’은 당국의 눈을 피해 은밀히 카세트테이프로 제작됐지만 곧바로 압수당했다. 김민기의 노래는 이처럼 늘 통제를 받았다. 노래를 통제해야 할 필요성은 지배세력의 통치 정당성이 떨어질 때 더욱 커진다. 우리 노래 역사에서 일제강점기와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5공 신군부 시절 노래에 대한 통제가 극심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래서 금지곡의 역사를 훑는 게 곧 우리 사회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냥 그저’ 만든 운동가요 금지조치  혹독할수록  널리  퍼져

    동숭동 시절 서울대 본관 건물, 무성한 마로니에가 제 무게에 겨운 듯 넓은 잎을 늘어뜨리고 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그럼에도 김민기는 남들에게 그러한 일들을 설명하고 또 변명하는 데 완강하게 반발한다. “노래라는 것은 만들어지면 부르는 사람이 임자지, 작곡자는 철저히 제3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자신의 노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 자체를 기피하다 못해 혐오한다. 정작 도가(道家)의 도인 같은 초탈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아침이슬’도 정작 자신은 이한열 군 장례식 때 듣고 비로소 그 노래가 가진 엄청난 위력과 역사성을 깨달았다고 회고한다. 운구가 시작되면서 수십만이 핏발선 눈빛으로 노래를 부를 때 “소름 끼치고 온몸이 떨려와 귀를 막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김민기, 그리고 ‘아침이슬’은 1970~80년대 우리 시대의 아픔을 대표하는 무한한 의미를 지닌 이름이고 노래다. 1970년대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노래를 불러보지 않은 기성세대가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는가. 그는 그냥 그렇게 무심하게 노래를 만들었다지만, 그가 만든 노래는 가장 의미 있는 노래가 되어 우리 시대를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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