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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아버지들

아들 김종직과 사림파 기틀 세우다

일상을 經典 가르침대로…김숙자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아들 김종직과 사림파 기틀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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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이 사는 아파트는 견고하다. 그러나 명색이 가장인 나의 입지는 불안하다. 우리 시대 아버지 중 상당수는 나와 처지가 비슷할 것이다. 왜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 시대는 다르지만 아버지의 역할이야 크게 다를 리 없다. 가족을 부양하고, 자신과 집안의 명예를 지키며, 세상 일에 참여하는 것, 여기에 큰 차이가 있을 리 없다.
이런 생각을 하다 김숙자(金叔滋·1389~1456)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그는 15세기 성리학자다. 고려 말의 대학자 길재(吉再·1353~1419)의 학통을 이었다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혀 인생의 신산(辛酸)을 맛봤다. 자연을 벗 삼아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라 그의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이 되고 말았다.
청년 시절 김숙자는 ‘불법 이혼’을 했다. 이 때문에 기를 펴지 못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학문을 연마하고 실천하는 데 힘썼다. 또한 맡은 벼슬이면 무슨 자리든 최선을 다했다. 고난 속에서도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분투한 아버지였다. 최측근에서 이를 지켜본 아들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아버지를 깊이 존경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일평생을 글로 적어 후세의 교훈으로 남겼다(김종직, ‘선공기년(先公紀年)’, ‘이존록(彝尊錄)’ 상).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 이황(李滉·1501~1570)에게 중국 사신이 물었다. “조선 성리학의 계통은 어떠합니까?” 이황의 대답은 이러했다. “정몽주는 길재에게 전하고, 길재는 김숙자에게 전하고, 김숙자는 그의 아들 김종직에게 전하고, 김종직은 김굉필에게, 김굉필은 조광조에게 전하였습니다.” 후세 학자들의 견해도 다르지 않았다.



인생의 굴레가 된 ‘이혼’

이황이 열거한 6명의 선유(先儒) 가운데 김숙자와 김종직은 부자지간이다. 얼마나 학문에 힘썼으면 부자가 도통(道統, 도학의 계통)을 주고받게 됐을까. 그들 집안엔 뜻밖의 사정이 있었다. 아버지의 불우함이 되레 그들의 학문을 채찍질했다. 벼랑 끝에서 기사회생한 그들의 이야기는 뜻을 잃고 좌절하는 오늘날의 아버지들에게 용기를 줄 것이다.
김숙자는 경학(經學)과 문장에 뛰어났고,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26세 되던 1414년(태종 14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5년 뒤인 1419년(세종 1년)엔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조정에선 청년 김숙자를 ‘사관(史官)’에 임명하기로 했다. 크게 출세할 조짐이었다.
그때 갑자기 김숙자를 태운 ‘벼슬의 배’가 풍랑을 만나 좌초했다. “김숙자는 자기 자식을 망령되게도 서얼이라 일컫고, 조강지처를 이유도 없이 내버렸습니다. 형법에 따라 그에게 곤장 80대를 치고, 이미 버린 아내를 데려다가 다시 가정을 이루게 해야 합니다.”(‘세종실록’, 세종 5년(1423) 7월 4일자) 사헌부로부터 이런 비난이 쏟아졌다. 세종은 사헌부의 말을 따랐다.
아들 김종직이 전한 말은 조금 달랐다. 언젠가 김숙자의 할아버지 김은유(金恩宥)에게 한 고을에 사는 한변(韓變)이 찾아왔다. 한씨는 자신에게 과년한 딸이 있는데, 결혼을 서두르지 않으면 곧 중국에 공녀(貢女)로 붙잡혀갈 것이라고 했다. 딱한 사정을 들은 김은유는 손자 김숙자와 한변의 딸을 결혼시켰다. 그런데 김은유가 세상을 뜬 후 중대한 문제가 드러났다. 한변이 신분상의 하자를 속였던 것이다. 김숙자의 부친 김관(金琯)은 집안의 장래를 망칠 수 없다고 판단해 이혼을 명령했다.
그러나 한변의 호소는 달랐다. 사위 김숙자가 과거에 급제하자 조강지처와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밀양의 부유한 집안으로 새 장가를 갔다는 것이다. 조정은 한변의 손을 들어줬다. 김숙자를 벼슬에서 내치는 한편, 부부가 재결합하라고 명령했다.



“관직이 德에 못 미쳤다”

하지만 김숙자는 재결합을 거부했다. 그는 새 아내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가 학문에 잠심(潛心)했다. 그렇게 13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김숙자의 학문적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마침내 조정에 복귀할 기회가 찾아왔다. 세자시강원, 즉 장차 임금이 될 세자(문종)를 가르치고 보좌하는 직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사간원 관리들이 강력히 반발했다. “조강지처를 버릴 정도로 품행이 바르지 못하였다.”(‘세종실록’, 세종 20년(1438) 10월 26일자) 조정 관리들은 그의 이혼사건을 잊지 않았다. 1439년(세종 21년) 그는 동부학당(서울 소재 4부 학당의 하나)의 교수관(종6품)에 추천됐다. 그러나 그마저 사헌부의 반대로 물거품이 됐다. 김숙자의 일생에 드리운 이혼의 그림자는 짙었다.
그 굴레에서 벗어난 것은 한참 뒤였다. 1454년(단종 2년) 4월 그는 66세로 성균관 사예(정4품)에 임명됐다. 이젠 누구도 그의 과거를 들먹이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성주교수관(星州敎授官, 경상도 성주의 교수)이란 한직을 얻어 시골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벼슬을 영영 사직하고 밀양으로 돌아갔다. 1456년 봄 그는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그의 셋째 아들 김종직은 아버지가 평생 포부를 제대로 펴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며 한탄했다.



아, 선공(김숙자)의 평생은 그 관직이 그 덕(德)에 못 미쳤다. 31세로 문과에 급제한 뒤 13년 동안 시골에 묻혀 지내셨다. 벼슬은 참외(參外, 7~9품의 하급관리)로 시작해 대부(大夫, 4품 이상의 고위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28년 동안이었다. 그사이 6번 주부(主簿)의 벼슬을 했고, 부령(部令)은 2번, 현감이 3번, 교수관, 교리(校理), 부정(副正), 사예(司藝)가 각 1번씩이었다. 역임하신 관직은 모두 당대의 흔한 벼슬자리였을 뿐이다. (이혼 문제 때문에) 불우하고 영락하여 끝내 큰 업적을 이루지 못하셨다. (…) 아, 이것이 타고난 운명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고야 만 것인가.
-김종직, ‘선공기년’



평생 妾 안 둬

김숙자는 현달(顯達)하지 못했지만 노년에 성균관 사예를 지낸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조정이 그의 이혼 경력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게 됐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1423년 7월 이혼 문제로 벼슬에서 물러난 뒤로 그는 불명예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유교 경전에 기록된 예법을 지키며 성리학적 가족 윤리를 실천하느라 부심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일평생 단 한 명의 첩도 두지 않은 사실이다. 축첩은 당시 양반들의 일반적 관행이었다. 물론 그때도 남편이 첩을 두면 아내는 속을 끓였다. 김숙자의 아버지도 만년에 애첩을 두자 어머니 유씨 부인과 불화가 발생했다. 어머니는 그 일로 속을 태우다 작고했다. 김숙자는 “이를 가슴 아파하며 결코 첩을 두지 않았다.”(김종직, ‘선공기년’)
김숙자의 아우도 첩 문제로 한때 가정이 불화했다. 김숙자는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동생을 간절하게 타일렀다.” 마침내 아우는 스스로를 “몹시 부끄럽게 여기고 결국 부부의 도리를 처음과 같이 회복하였다.”(‘선공기년’)
김숙자는 실패로 끝난 자신의 첫 번째 결혼생활을 철저히 반성했다. 온 집안에 다시는 그런 비극이 재현되지 않도록 주의했다. “아들을 장가들이고 딸을 시집보낼 때면, 반드시 상대방이 세족(世族)인지, 그리고 가훈(家訓)이 있는 집안인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혼인 약속이 이미 결정된 다음에는 누구도 이간질하지 못하게 막았다.”(‘선공기년’)
김숙자는 불우한 친족과 이웃의 결혼도 적극 도왔다. 그에겐 기씨(奇氏) 집안에 시집간 누이가 있었다. 매부가 죽자 후처이던 누이는 전처의 아들로부터 모진 학대를 당했다. 김숙자는 앞장서 누이의 가정 문제를 해결하고, 가난으로 시집을 못 가게 된 조카딸의 결혼도 직접 주선했다. 그는 인륜의 출발점이 결혼에 있다는 성리학의 가르침을 철저히 신봉했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해둘 점이 있다. 15세기 초반만 해도 성리학적 가족 윤리는 아직 조선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축첩과 이혼 문제로 가정 불화에 빠진 양반들이 전국 어디에나 흔했다. 당시엔 김숙자의 경우처럼 집안 어른들이 이혼을 결정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또한 ‘병처(竝妻)’라고 하여, 정식으로 아내를 둘 이상 둔 양반들도 있었다.
이래저래 가정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이가 많았다. 이것이 결국 전답과 노비 등의 상속 문제로 이어져 사회적 혼란이 야기됐다. 조정으로서는 방치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태종은 ‘병처’ 풍습을 금지하고, 오직 한 사람의 배우자만 ‘정처(正妻)’로 인정했다. 나머지는 ‘첩(妾)’으로 취급됐다. 이혼이 불가피할 경우엔 조정의 허락을 받게 했다. 그러나 조정의 이런 개혁 의지가 관철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보기에 따라 김숙자는 운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장인이던 한변이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던가, 조정 대신 중 한변을 적극 옹호하는 세력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현명한 김숙자는 자신의 비운을 받아들였고, 스스로를 채찍질해 위기에서 벗어나기를 꾀했다. 비록 시간은 걸렸으나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배우는 순서와 精讀 강조

김숙자는 청년 시절부터 문명(文名)이 높았다. 한때 세종은 3~4명의 선비를 중국에 보내 과거시험을 치르게 할 계획이었다. 김숙자는 그때 선발된 선비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경학(經學)에 탁월했고 문장(文章)도 아름다웠다. 따르는 제자도 많았다.
그런데 그는 공자의 선례를 따라 제자들의 엽등(躐等, 등급을 건너뛰어 올라감)을 금했다. 배움엔 반드시 순서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초보자에겐 ‘동몽수지(童蒙須知)’ ‘유학자설(幼學字說)’ ‘정속편(正俗篇)’을 가르쳤다. 이것을 완전히 습득한 사람에겐 ‘소학(小學)’을 가르쳤다. 이어 ‘효경(孝經)’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시경(詩經)’ ‘서경(書經)’ ‘춘추(春秋)’ ‘주역(周易)’ ‘예기(禮記)’를 차례로 읽게 했다. 맨 마지막엔 ‘통감(通鑑)’ 및 제사(諸史)와 백가(百家)를 읽게 했다. 그런 김숙자의 문하에선 겉멋을 부리며 함부로 알은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독서에도 엄격한 법이 있다고 가르쳤다. 무슨 책이든 한 글자씩 모두 정확히 이해하라며 정독을 주문했다.
김숙자의 일상생활은 곧 경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곤궁할 때는 배움을 몸소 실천하고, 영달하여 남을 다스릴 때는 모든 것을 성현(聖賢)의 가르침대로 하라.”(‘선공기사’) 유난히 중시한 것은 ‘소학’이었다. 모친상을 당했을 때 그는 ‘소학’에 명시된 대로 물 한 잔조차 마시지 않았다. 초빈을 마친 뒤에야 겨우 죽을 들었다. 당시 풍속은 선비 집안에서도 불가의 장례법을 따랐다. 그러나 김숙자는 “유독 확고부동해 염(殮), 습(襲), 우(虞), 부(祔), 연(練), 상(祥) 등의 의식을 주자(朱子)의 예(禮)에 따라 알맞게 거행했다.”(‘선공기사’)
‘불법 이혼’ 문제로 그는 가족 윤리에 어긋났다는 비난과 함께 세상의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시골에 칩거하며 누구보다 모범적으로 성리학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성리학적 사회 개혁의 선두에 섬으로써 그는 재기했다.



淸水白石

김종직이 목격한 아버지 김숙자는 청렴한 관리이기도 했다. 그가 고령현감(경상북도)으로 부임했을 때 전임자의 잘못으로 창고의 곡식이 장부보다 3000여 곡(斛)이 적었다. 김숙자는 전임자의 잘못을 감추고, 임기 내내 절약에 힘써 문제를 조용히 해결했다.
일선 행정업무에도 능통했다. 이두에 익숙했고, 판결을 공정하게 잘하기로 이름났다. 그는 두 고을의 현감을 지냈는데 그때마다 스스로 다짐하기를, “토지가 있고 백성이 있으니, 여기서도 나의 학문을 실천에 옮길 수 있다”며 낮은 벼슬을 탓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고대 중국의 주(周)나라를 모범으로 삼아 선정을 베풀었다. 개령현감(경상북도) 시절엔 세 곳에 방죽을 파서 700~800결의 농지에 혜택을 줬다.
그는 부임하는 곳마다 향교를 대대적으로 수리해 선비들이 배움의 기회를 잃지 않도록 했다. 공무의 여가에 유생들의 학업을 직접 지도하기도 했다. 그가 재임한 고령과 개령에서 여럿이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했는데, 모두들 김숙자 덕분이라고 말했다.
아전들을 다스리는 데도 뛰어났다. ‘약속(約束)’이라는 업무규정을 만들어 아전들이 협잡을 부리지 못하게 통제했다. 아전들은 원님 김숙자를 ‘청수백석(淸水白石)’이라 부르며, 청백함과 공정함을 칭송했다.
세종이 전라도 지방의 전품(田品, 토지 등급)을 실정에 맞게 개정하려 했을 때 그는 경차관(敬差官, 후대의 어사와 같음)이 되어 남원, 장흥, 옥과, 순천 등지에서 직무를 수행했다. 다수의 경차관이 순찰사(관찰사)와 짜고 부정을 저질렀으나 김숙자는 달랐다. “조정도 속일 수 없거니와 백성을 어찌 저버릴 수 있는가.” 이에 백성들이 기뻐하며 닭고기와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그러나 김숙자는 그들의 마음만 받을 뿐이었다. 김종직은 회고하기를, 훗날 “그 지방 사람들이 나(김종직)를 만나면 그 은덕에 감격하며 칭찬하였다”고 했다(‘선공기사’).
김숙자는 어떤 벼슬을 하더라도 백성의 의식주를 염려해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아끼지 않았다. 김종직은 아버지의 태도에서 인생의 깊은 의미를 새삼 깨달았다.



“나는 바보라서 좋다”

1455년(세조 1년) 12월 김숙자의 막내딸이 결혼했다. 그때 자신의 소회를 아들들에게 토로했다. “나는 품계가 이미 3품에 이르렀고, 남혼여가(男婚女嫁, 아들딸의 결혼)도 끝냈다. 할 일을 마쳤으니 어서 사직서를 작성해 오거라.”(‘선공기사’) 그는 벼슬을 사직하고 밀양으로 돌아갔다. 평생 청렴하게 살았기에 두어 달 만에 식량이 떨어졌으나 태연했다. 어쩌다 잔치에 초대받아도 말을 타지 않고 죽여(竹輿, 대나무를 엮어 만든 가마)로 갔다. 이런 김숙자를 사람들은 ‘달존(達尊, 세상이 존경할 만한 어른)’이라 했다.
잇속에 밝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는 ‘바보’였다. 재산을 불릴 줄도 모르고, 위세를 부리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김숙자는 자신이 바보라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는 아들 김종직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졸(拙)하다(못났다)’고 말하는데, 졸한 것이 진정으로 큰 보배로다. (…) 나는 진실로 그런 말을 다행으로 여긴다. 너도 내 아들인지라, 나중에 졸하기로 이름이 날 것이다. 그런 세평에 부디 괘념하지 말아라.”(김종직, ‘선공유사’)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김종직은 문과에 급제해 세조와 성종 때 여러 요직을 두루 지냈다. 그럼에도 권귀(權貴)들에게 부화뇌동하지 않았다. 사림파의 영수로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세상의 높은 추앙을 받았다. 끝내는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에 빌미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 관을 쪼개 시체의 목을 베는 벌)의 벌을 받았다.
하지만 김숙자, 김종직 부자의 관작은 오래지 않아 복구됐다. 그들은 조선 성리학계의 별이 되어 수백 년 동안 후학들의 길잡이 구실을 했다. 한때 좌절의 늪에 빠진 것처럼 보이던 김숙자의 삶이 거기서 끝나지 않고, 사림파의 등장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으니 놀라운 일이다. 기회는 위기 속에서 잉태되기 마련인가.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이 다 김숙자처럼 탁월한 학자 또는 공직자가 돼야 할 까닭은 없다. 우리 자신이 허물어진 그 지점에서 다시 일어나 미래 지향의 가치를 추구할 일이다. 중요한 것은 성취 그 자체가 아니라, 아마도 우리의 성실한 태도일 것이다. 

‘아버지 김숙자’의 가르침
- 인륜의 출발점은 결혼에 있다.
- 배움을 몸소 실천하고, 모든 것을 성현(聖賢)의 가르침대로 하라.
- 하찮은 직책이라도 정성을 다하라.

백 승 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초빙교수,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등





신동아 201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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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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