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호

특집 | 다시 읽는 대만(臺灣)

‘홍색 공급망’에 동병상련 중국 내 ‘협력 공간’ 찾자

대만은 한국의 ‘경제 친구’

  • 박한진 | KOTRA 타이베이무역관장 chinapark@kotra.or.kr

    입력2016-03-03 10:2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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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만은 독일보다 중요한 고객?
    • 兩岸 경제협력 양상 변화에 주목해야
    • ICT 강조하는 새 정부…‘대만에 필요한 것’ 협력을
    중국에 대한 한국의 경제 의존도가 워낙 높아서 그렇지, 대만은 우리에게 알짜 시장이다. 대만은 한국의 8위 수출시장이며, 수입까지 합치면 5대 교역국이다(2015년 기준). 한국의 대(對)대만 수출(120억700만 달러)은 대독일 수출(62억2200만 달러)의 거의 2배다. 비관세장벽과 통상마찰이 크지 않은 장점도 있다. 대만 사람들은 수입제품에 대한 거부감이 덜하다. 대만이 중국과 동남아를 잇는 길목에 위치한 것도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한국과 대만 사이에 놓인 ‘잃어버린 20년’의 골이 너무 깊은 탓인지, 1992년 단교 이후 한국은 대만에 무관심했다. 대만은 한국을 경쟁 상대로 여겼다. 한국과 대만의 연결고리는 TV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밖에 없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차이잉원號 출범은 ‘기회’

    나는 지난해 8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타이베이무역관장으로 부임했다. 타이베이에 도착해 가장 먼저 챙긴 일은 대만 및 타이베이 주재 외국 기업인들과의 만남이었다. 그때 귀에 쏙 들어온 말이 있다. ‘홍색 공급망(Red supply chain)’. 대만 산업계 어딜 가도 온통 홍색 공급망에 관한 얘기뿐이었다. 홍색 공급망은 대만 언론에도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하지만 이 용어는 한국 인터넷 포털에선 검색조차 되지 않았다.
    홍색 공급망이란 중국이 과거 수입에 의존하던 원부자재와 중간재를 중국 내에서 자체 생산·조달하면서 중국에 중간재를 수출하던 기업들이 큰 위험에 빠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국과 대만의 기업들이다. 중국 수출에 의존하던 대만 기업계는 홍색 공급망 확산으로 큰 충격을 받은 상태다. 최근 한국의 대중국 수출이 크게 감소하는 원인은 유가 하락 때문만이 아니다. 한국의 대중국 수출이 원부자재와 중간재 중심이라 홍색 공급망의 영향을 그대로 받고 있다. 한국과 대만의 기업들은 홍색 공급망에 상처 입은 동병상련의 처지인 셈이다.
    따라서 서로를 경쟁 상대로 여기기보다는, 서로 협력할 부분이 없는지 살펴보는 게 급선무다. 게다가 세계경제의 틀과 기업 경영의 문법이 바뀌는 시점이다. 하지만 한국과 대만의 ‘경제적 연결고리’는 역시 중국 시장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홍색 공급망은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과 대만은 중국 시장을 벗어날 수 없다. 한국 수출의 25%가, 대만 수출의 40%가 중국으로 향한다. 대만 해외직접투자의 80%가 중국에서 이뤄진다. 따라서 중국에서 한국과 대만 기업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야 한다. 한국 SK그룹과 대만 훙하이그룹의 협력 사례에서 보듯, 최근 한국과 대만의 대표 기업들이 협력에 나서는 것은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마침 좋은 기회가 왔다. 대만의 신(新)정부 출범이다. 지난 1월 16일 동시에 치러진 대선과 총선에서 민주진보당이 총통과 절대다수의 의회 의석을 확보했다. 새 의회는 이미 출범했고, 차이잉원(蔡英文) 총통 당선인은 5월 20일 취임한다. 차이잉원호(號)는 대내외적으로 3대 경제정책을 펼 것으로 예상된다.



    다양한 해외 활로 모색

    첫째, 서민생활 안정 정책이다. 대만은 부(富)의 재분배 정책이 시급하다. 경제의 구조적 문제에다 수출 부진, 투자 위축, 내수 부진이 심각하다. 투자 장려를 위해 2009년 상속세와 증여세를 대폭 인하했고(최고 세율을 50%에서 10%로 낮춤), 유턴 기업 지원 활성화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자금이 부동산에 쏠리면서 기대하던 효과는 내지 못한 채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고 빈부격차가 심해져 서민의 불만이 팽배한 상황이다.
    노동 부문 개혁도 절실하다. 대만판 88만 원 세대라 할 ‘22K 세대’와 청년 실업난으로 청년 세대의 불안감이 고조됐다. 젊은 세대의 내 집 마련 기회는 갈수록 요원해 보인다. 이에 민진당은 8년 내 20만 채 규모의 사회주택(공공임대주택)을 건설하는 공약을 발표한 바 있다.
    둘째, 경제 활성화 및 구조개혁 정책이 본격화할 전망이다. 신정부는 ‘스마트 타이완(Smart Taiwan, 주력산업 기반 산업구조 개편)’을 기치로 내건다. 대만의 주력산업인 ICT에 기반을 두고 하이테크 등 주요 산업의 구조 개편과 발전을 도모할 계획이다. 기업의 혁신을 장려하기 위해 연구개발(R&D) 관련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중소기업·대학·연구기관·정부(금융 정책) 역량을 결집해 혁신 생태계를 구축한다. 또한 5대 신사업, 즉 녹색에너지·방위·첨단·바이오·스마트 정밀기계 부문의 R&D 단지를 조성하려 한다.
    셋째, 국제통상 강화를 통한 해외시장 확대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지난 8년간의 마잉주(馬英九) 총통 시절 양안(兩岸) 교류가 확대됐지만, 이면에는 중국 쏠림 심화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실제로 대규모 중국인 관광객 유치를 제외하면 무역·투자 분야에서는 중국과의 교류 확대에 따른 경제적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특히 2015년 들어 중국이 반도체 등 대만 주력산업에 인수합병(M&A) 등 잦은 러브콜을 보내자 위기감은 더욱 확산됐다. 따라서 수출 영토 확장, 즉 대만 경제가 중국만 바라볼 게 아니라 다양한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만은 앞으로 다수의 협상 당사자가 참여하는 무역자유화협정, 즉 메가(Mega) FTA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양자 FTA 또한 확대하는 노력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메가 FTA 가입이 신정부 통상 정책의 최우선 과제인 셈이다. 앞서 차이잉원은 지난해 5월과 10월 각각 미국과 일본을 방문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 의사를 피력한 바 있다. 미국산 돼지고기 수입 개방 등 쟁점이 몇몇 남아 있지만, 대만의 TPP 참여는 이미 기정사실화한 분위기다.




    ECFA 무산은 없다

    아울러 신정부는 중국과의 중국·대만 경제협력기본협정(ECFA) 후속 협상을 마무리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ECFA는 2011년 2월 협상을 시작, 2013년 6월 정식 서명을 했다. 하지만 대만 의회 비준동의안 처리 과정에서 투명성 논란이 불거지면서 대학생들이 입법원을 점거하는 등 심한 반대 여론에 부딪혀 계류된 상태다.
    비록 대만 일부 계층이 반대하고 있지만, 민진당은 이미 전(前) 정부의 양안 경제협력 성과를 이어갈 의사를 내비친 바 있다. 중국과의 일정한 거리 유지를 주장하는 민진당이 정권을 잡았어도 ECFA가 완전히 무산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 밖에도 대만은 아세안 및 인도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신정부는 전담팀을 구성해 아세안과 인도는 물론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파키스탄과도 관계를 강화해나갈 계획이다. 무역·투자뿐 아니라 민간 교류와 문화·교육·연구 등 다방면에서 협력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과 대만은 어떤 방향으로 경제협력을 해나가야 할까. 3가지 차원에서의 검토가 필요하다. △대만 경제 △양안관계 △한-대만 양자관계가 그것이다.
    신정부 출범 후 대만 경제는 소비시장이 활성화하고 신산업 관련 비즈니스 기회가 생길 것이다. 노동개혁, 임대주택 건설, 신산업 육성, 사업구조 개편 등을 계기로 투자가 촉진될 것으로도 보인다. 이는 소비심리를 자극하고 내수경기를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5월 총통 취임 이후 본격 추진될 전망이다. 민진당이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했으므로 차이잉원 신임 총통의 국정 운영은 유리해 보인다. 한국 기업들은 단순한 대만 시장 진출이 아니라, ‘대만에 필요한 분야에서 협력한다’는 마인드로 신정부 정책과 시장의 변화를 잘 살펴야 한다.
    다음으로 양안관계를 보자. 중국과 대만은 일정 기간 상대방을 탐색하는 시간을 보낼 것이다. 따라서 양안의 경제협력 양상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친중(親中) 성향의 국민당과 달리 민진당은 ‘현상 유지’가 양안관계를 대하는 기본원칙이다. 차이잉원이 중국을 자극하는 액션을 취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여론을 의식해 한동안은 냉각 또는 탐색기를 보낼 것이다. 물론 미일과의 협력 강화 등 주요 외교 정책의 기조는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답보 상태에 놓인 ECFA 후속 협정은 향후 양안관계 변화 수준에 따라 속도 및 진행 방향이 달라질 것이다. 그에 따라 향후 중국 시장을 두고 한국과 대만이 새로운 경쟁 구도에 놓일 수도 있지만, 이미 한중 FTA가 발효된 상태라 우려할 만한 일은 아닌 듯하다.



    ‘한국 학습’ 새바람

    한국-대만 관계는 이전과는 달라질 것이다. 그간 대만은 한국에 대한 인식을 4단계로 달리해왔다. 대만에 한국은 1992년 단교 이전까지는 ‘아시아 대표적 자유민주 혈맹관계’였지만(1단계), 단교 후 반한(反韓) 분위기가 급속하게 확산됐다(2단계). 그리고 2010년대 초반까지는 경쟁의식이 확대됐고(3단계), 이후에는 한국과의 경쟁에서 대만이 뒤졌다는 인식이 많아졌다(4단계).
    앞으로는 5단계로 진입할 것이다. 이번 대선 및 총선 캠페인 중에는 과거와는 달리 이른바 ‘한국 때리기’가 거의 없었다. 신정부는 한국의 경제력과 경쟁력이 대만을 크게 앞섰다는 판단에 따라 ‘한국 학습’에 나설 것이다. 특히 FTA 등 통상정책 및 그와 관련한 국내의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 환율 정책, 기업의 글로벌 시장 전략, 신산업 육성 등에서 한국을 배우고자 할 것이다. 한국도 대만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 우선은 중소기업 역량 강화 정책, 중국 내수시장 진출 성공 전략 등을 배워야 한다.
    한국과 대만은 반도체, 기구부품, 철강판, 합성수지 등에서 수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 분야에서 상호 교역도 활발하다. 이런 분야에선 앞으로 다양한 협력 분야를 발굴해 교역 수준을 더 높여야 한다.
    대만이 TPP 등 국제통상 협정에 가입하면 대만의 수출 경쟁력이 높아져 한국과의 경쟁이 심화할 수는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대만 상호교역 및 교류가 활성화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이미 대만은 한국에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이제 한국이 답할 차례다. 

    박 한 진


    ● 1963년 경남 함안 출생
    ● 한국외국어대 중국정치경제학 석사, 중국 푸단(復旦)대 박사(기업관리학)
    ● 한국외대 중국외교통상학부 겸임교수,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방문학자,  대만 중화경제연구원 자문위원, KOTRA 중국사업단장
    ● 現 KOTRA 타이베이무역관장
    ● 저서 : ‘10년 후 중국’ ‘박한진의 차이나 포커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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