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호

세태 리포트

“왜 PC방 밤샘? ‘야자’처럼 어울리는 재미 ”

  • 강지남 기자, 유수빈 인턴기자, 김무연 인턴기자, 김완진 인턴기자

    입력2016-03-07 14: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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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고 따뜻한 심야 PC방에 모여라!
    • 밤피족 인기 게임 키워드는 ‘경쟁’ 혹은 ‘협동’
    • 낮엔 졸고…“우리 이러고 살아도 되는 거야?”

    # 청년이 된 ‘광명 키즈’가 노는 법

    ‘로이 콜?’ ‘콜’ ‘나도 콜’ ‘ㅇㅋ’….
    7시 무렵 이건준(24·가명·한양대 4학년) 씨의 스마트폰에서 ‘카톡’ 알림음이 연거푸 울린다. 20년지기 동갑내기 지운, 도현, 지형(모두 가명)과의 단체 대화방이다. 넷은 경기 광명시에서 코흘리개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 하지만 지금은 광명, 서울, 수원 등지에 흩어져 산다. 다니는 대학도 다르다. 오후 11시. 각자 저녁을 챙겨 먹은 4인방은 광명시 하안동 로이PC방 앞에 모인다. 오늘도 죽마고우들과 ‘PC방 밤샘’을 하는 날이다.
    PC방 계단을 오르며 지운이 또 엄살을 피운다. “아, 오늘 컨디션 별론데!” 친구들이 맞받는다. “지운아, 보험 들지 말고 그냥 질 거 같다고 해.” “깝치지 마, 인마!”
    나란히 자리를 잡고 늘 함께 하는 게임, ‘스페셜포스2’를 켠다. 스페셜포스2는 FPS(First-person shooter) 장르로, 플레이어가 사물을 보는 시점과 동일한 화면에서 전투를 벌이는 게임이다. 플레이어가 게임 속 캐릭터가 돼 다른 캐릭터를 죽이는 것이다.
    ‘광명왕자 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건준이 만든 방에 친구들이 속속 입장한다. 5, 4, 3, 2, 1, 스타트! 건준은 돌격소총을 들고 거리로 나선다. ‘아악!’ 비명이 들리는 걸 보니 누군가 벌써 죽은 모양이다. “헤드 샷!” 지운이 쏜 총에 지형이 머리를 맞았다. 팔, 다리를 맞으면 부상으로 끝나지만, 머리를 맞으면 한 방에 죽는다. 지형이 지운을 흘끗 째려본다. “인마, 연습 좀 더 하고 와.”(지운) “너 귀엽다? 조금만 기다려. 죽여줄게.”(지형) 두 눈을 컴퓨터 모니터에 고정한 채 지형과 입으로만 아웅다웅하는 지운을 건준이 노린다. 뒤로 몰래 돌아가 지운의 등에 칼을 휘두른다. “슬래쉬!” 허탈해진 지운이 욕을 날린다. “X새끼, X나 야비해!” 그사이 지형은 도현을 향해 저격총을 쏜다. 하지만 도현이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발사한 총알이 지형의 머리에 박혔다. “와, 도현이 운빨 쩐다!”(건준)



    # 밤을 잊은 청춘들

    1월 18일 오후 9시 55분 서울 염리동 이대역 부근의 한 PC방. 손님이 나간 자리를 청소하거나 카운터를 지키던 아르바이트생에게 새 임무가 주어진다. ‘중고생 쫓아내기.’ “오후 10시부터는 청소년이 PC방에 있으면 안 되거든요. 단속 걸리면 귀찮아져요.” ‘알바생’ 장도영 씨가 바삐 자리를 돌며 앳돼 보이는 손님의 신분증을 일일이 확인한다. 창천동 대로변에 있는 PC방 출입문에는 공지문이 붙어 있다. ‘PC방은 게임산업법의 적용을 받아 고등학교 졸업증 또는 대학교 학생증이 있어야 야간 출입이 가능합니다.’ “아, 한창 재밌었는데….”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중고딩’이 사라진 늦은 밤, 또 다른 청춘이 PC방을 찾는다. 밤을 잊은 대학생이다.
    1월 26일 0시 30분 서울 안암동 대학가 지하의 ‘라임’ PC방. 겨울방학인 데다 자정이 지났지만 이곳은 대학생들의 열기로 불야성이다. 강성학(24·고려대 사학과 4학년) 씨와 그의 친구 둘은 PC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에 푹 빠져 있다. 최대 5명까지 한 팀을 이뤄 상대 팀의 기지를 먼저 부수거나 항복을 받아내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승리의 비책은 철저한 역할 분담에 있다. 적의 공격을 뛰어난 체력으로 버텨내는 ‘탱커’, 마법으로 적을 죽이는 ‘마법사’, 멀리서 활이나 총으로 적을 공격하는 ‘원거리 공격수’ 등 각자 임무에 충실하며 호흡을 맞춰 적진으로 나아가야 한다. 강씨 팀이 상대보다 먼저 적진으로 향하는 길목을 뚫는 데 성공했다. 적군은 위기를 모면하고자 ‘한타’(팀 전원이 한데 모여 벌이는 대규모 전투)를 도발한다. 한타에서  이기면 승기를 굳힐 수 있지만, 지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본다. 컴퓨터 모니터에 불꽃, 눈보라, 번개가 그득하다. 아군과 적군이 어디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렵다. 드디어 아군이 적의 마지막 포탑을 부수고, 화면에 ‘승리’ 문구가 뜬다. 게임 한판에 한 시간이 후딱 흘렀다. 강씨는 재빨리 “한판 더!”를 외친다.
    같은 날 자정 인천 부평구 문화의거리 ‘헤라’ PC방. 150평 남짓한 공간에 들어선 200여 대 컴퓨터가 바삐 돌아간다. 손님 대부분은 20대 초중반의 남성. 적게는 서너 명, 많게는 예닐곱 명이 무리 지어 앉아 게임을 즐긴다. 커플로 보이는 남녀도 간간이 눈에 띈다. 직원 문재석 씨는 “밤 10시 넘으면 대학생 손님이 대부분인데, 남자 손님이 10명이면 여자 손님은 두세 명쯤 된다”고 했다. 손님 박정훈(25·H대 3학년) 씨는 “방학 때는 보통 일주일에 사나흘가량 PC방에서 밤을 새운다”고 말했다.



    # ‘택이 방’ 말고 PC방

    ‘밤피족’은 PC방에서 밤새워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신조어다. 대학생, 특히 남자 대학생 중에서 밤피족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이들은 ‘주경야겜(晝耕夜Game)’ 혹은 ‘주독야겜(晝讀夜Game)’을 한다. 서진범(26·H대 3학년) 씨는 “낮에는 공부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 풀 시간이 밤밖에 없다”고 했다. 강성학 씨는 “PC게임은 철들기 전부터 해온 가장 친숙한 놀이”라며 “우리 또래 남자애들 중 안 해본 사람이 없다”고 했다.
    “혼자서요? 에이, 그러진 않아요. 친구랑 같이 있으니까 밤새는 거죠. 혼자서 밤부터 아침까지 게임하는 건 중독 아닌가?”(이건준 씨)
    PC게임은 재미있다. 하지만 ‘같이 놀아야’ 더 재미있다. 이씨는 “밤피 하는 즐거움? 6할은 애들과 같이 떠들며 게임하는 재미, 4할은 친구들과 추억을 곱씹는 일”이라고 했다. “첫차도 안 다니는 새벽 4시쯤에 PC방에서 나와 노곤한 채로 함께 길을 걸으며 고등학교 때 얘기를 하거든요? 그게 또 ‘꿀잼’이에요.” 한호준(20·H대 1학년) 씨는 “동이 트면 PC방에서 24시간 국밥집으로 자리를 옮긴다”며 “친구들과 국밥 먹으며 이야기 나누는 것도 게임 못지않은 쏠쏠한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박병진(25·고려대 통계학과 3학년) 씨는 “친구들과 밤피 하다 보면 고교 시절 다같이 야간자율학습 하던 때가 떠오른다”며 “대학생이 돼 PC방에서 야자하는 셈”이라며 웃었다.
    이들이 ‘낮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야밤이 아니면 한데 어울릴 시간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오모(24·서울시립대) 씨는 친한 친구들과 전공이 달라 수업을 같이 듣지 않는다. 점심이나 저녁은 여자친구나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들과 먹는다. 수업을 마친 뒤에는 과제를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렇게 하루 일과를 마치면 9시 뉴스는 이미 끝났고, ‘단톡방’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한다. ‘어디냐? 얼굴이나 보자.’ 오씨는 “약속 장소는 자연스럽게 PC방이 되곤 한다”며 “PC방은 낮에는 만날 수 없는 친구들이 한데 모이는 집합장소 같은 곳”이라고 했다.
    이들 세대에게 우정을 확인하는 동시에 새로운 우정을 쌓기에 PC방만한 곳이 없다. 김형섭(22·인하대 1학년) 씨는 “재수, 삼수를 한 동기끼리, 선후배끼리 친해지는 데 ‘밤피’ 만한 게 없다”며 “학교에서는 나이 차이 때문에 서로 어색하지만, 같이 게임을 하면 어색함이 금세 사라진다”고 말했다.
    대학생들이 PC방에서 즐겨 하는 게임은 ‘리그 오브 레전드’, ‘서든 어택’ 등이다. 팀을 이뤄 승부를 겨루는 게임이다. 상대 팀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같은 팀원끼리 게임 내내 민첩하게 대화를 나누며 합심해야 한다. 변성철 게임컬처랩 연구소장은 “대학생이 즐겨 하는 게임에는 공통적으로 협동과 경쟁의 요소가 포함돼 있다”며 “놀이이자 경기라는 측면에서 밤피는 친구들과 어울려 농구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해석했다.




    # 당구장? 농구? 너무 비싸요

    “한 시간에 1000원이거든요. 졸업한 선배들은 당구장에서 놀았다고 하던데, 요즘은 당구장에서 한 시간 놀려면 1만 원이나 들어요.”
    대학원생 정재훈(28·서울 가양동) 씨는 “PC방만큼 가성비가 뛰어난 곳은 없다”고 강조했다. “남자애들이 카페에서 수다 떨 순 없잖아요. 같이 활동을 해야 노는 것 같고, 게임은 누구나 다 하는 거라서 PC방에 가는 거죠. 추운 겨울엔 밖으로 놀러 다니기도 그렇고….” 오씨는 “요즘엔 축구나 농구를 하려면 운동장이나 코트를 빌려야 한다. 예약하는 것도 번거롭고 가격도 몇 만 원이나 해 PC방에 간다”고 했다. 유병욱(26·중앙대 4학년) 씨는 “친구들과 놀다 대중교통이 끊기면 PC방에 가서 첫차 다니기를 기다린다”며 “몇 천 원만 있으면 게임도 하고 영화도 보면서 편하게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당구장이나 노래방은 비싸기도 하고, 놀다보면 지쳐서 한두 시간밖에 못 있거든요. 하지만 게임은 몇 시간이고 오래할 수 있어서 좋아요. ‘체성비’(들인 체력에 비해 얻을 수 있는 효용)도 높다고나 할까요.”(김모 씨·27·K대)
    “얼마 전부터 PC방에서 제대로 된 음식도 팔아요. 밤피 하다가 새벽에 먹는 오므라이스가 얼마나 꿀맛인지 몰라요.”(이창용·20·C대 1학년)
    “공부는 열심히 한다고 바로 성적이 오르진 않지만 게임은 레벨이 쑥쑥 올라가거든요. 학벌이나 부모 배경이 아니라 순전히 내 실력으로만 평가받는 것 같아 기분 좋아요.”(오씨)
    밤피족은 낮에 졸리다. 취업준비생 박재연(29·서울 상수동) 씨는 “밤피를 하고 수업에 들어와 자는 애들이 적지 않은데, 교수님이나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라며 눈살을 찌푸렸다. 충청 지역 H대에 다니는 서진범(26·인천 산곡동) 씨는 “새벽까지 밤피 한 날은 집에 와서 눈을 좀 붙여도 하루 종일 피곤하다”고 했다.
    회사원 배모(28·서울 불광동) 씨는 얼마 전 남자친구와 크게 다퉜다. 남자친구가 계속 하품을 하며 대화에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 배씨는 “남자친구가 밤피를 해서 졸리다고 했다”며 “남자애들과 밤새워 게임하는 걸 여자친구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Fire in the hole!’ ‘서든 어택’에서 캐릭터가 수류탄을 던질 때 외치는 대사다. 조모(29·공주대 졸업) 씨는 같이 서든 어택을 즐겨 하는 친구가 음료수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Fire in the hole!”이라고 외치는 걸 보며 깜짝 놀랐다. 그는 “친구가 현실에서도 게임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며 “나도 남들한테 저런 모습으로 비칠까 걱정됐다”고 털어놓았다.



    # 그리고 아침에는 해가 뜬다

    오전 4시, 인천 부평 헤라 PC방. 택시요금 할증이 풀리는 시각이다. 자정 무렵에 비해 손님 숫자가 절반으로 줄었다. 여전히 게임에 몰입한 사람들이 대다수지만, 의자를 뒤로 젖히고 쪽잠을 청하는 이들도 눈에 띈다. 한진구(25·A대 3학년) 씨는 “요즘 PC방 의자는 소파보다 편해 잠깐 잠을 청하기에 그만”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같은 시각 경기 광명의 로이 PC방. 아직 첫차가 다니지 않는다. “아, 피곤해. 이제 나갈까?”(건준) “우리 집 가자.”(지형) 여전히 이 동네에 사는 지형이네 집으로 ‘광명 키즈’ 4인방은 발걸음을 옮긴다. 간밤에 PC방에 들어오면서 5000원을 내고 6시간을 충전했는데, 5시간을 쓰고 1시간이 남았다. 괜찮다. PC방 회원카드에 적립해놨다가 며칠 후에 또 밤피 하러 와서 쓰면 된다. “아, 개졸려”(지운) “도현아, 넌 연습 좀 더 해~”(건준) “근데, 우리 이러고 살아도 되는 거야?”(도현)

    강지남 기자 | layra@donga.com 유수빈 인턴기자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김무연 인턴기자 | 고려대 사학과 4학년 김완진 인턴기자 | 세종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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