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나라’ 조선, 사유재산 모으면 공격 대상
‘공(公)은 좋고 사(私)는 나쁘다’는 관념, 경제발전 저해
日 270여 영주, 수도 거주 명령…교통·상업 발달 계기
광복 후 ‘생산기관 국유화’ 극복…서구식 경제체제로 건국
부동산시장 수급 실패를 왜 사유재산권 제한으로…
‘주택 배분제’ 실패로 ‘사유재산’ 도입한 쿠바
여당 ‘주택지분 공유제’, 해봐야 결말 알겠는가

서울 남산에서 내려다본 한강변 아파트 단지 전경. 뉴스1
그 과정에서 재벌 일가는 욕심으로 가득 차고, 쉽게 사기를 당하는 바보들이며,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감옥에 보내려 하는 패륜 집단에, 경영권 장악을 위해 가족을 해치는 살인자들로 묘사된다. 이를 보고 있노라면 대기업 소유 일가에 대한 혐오감이 스멀거린다. 결국 격렬한 불매운동 속에 대주주들이 경영에서 밀려나고, 순양그룹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바뀐다. 그리고 관련 주식들이 일제히 상승 곡선을 그리며 모두가 행복해진다. 주인공은 이에 그치지 않고 재계 2위인 대영그룹 세습 반대를 논의하며 막을 내린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한 장면. jtbc
‘공(公)은 좋고 사(私)는 나쁘다’는 관념, 경제발전 저해
우리 의식 속에는 조선 500년을 지배해 온 성리학의 관념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성리학에서 공(公)은 국가의 지배 질서이고, 보편적 윤리 원칙이며, 다수의 공동선이었다. 반면에 사(私)는 지배 질서로부터의 일탈이고, 비윤리적이며, 개인의 이기심일 뿐이다. 퇴계 이황은 서찰집인 ‘자성록’에서 “사사로운 뜻이 싹트기 시작하면, 곧 마음속의 벌레다”라고까지 적었다.그러한 공사관은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이념적 토대가 됐다. 특히 상업은 ‘이익만 좇는 탐욕’으로 치부해 억압했다.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였던 유형원조차 ‘반계수록’에서 상인들은 직접 생산하지 않고 이익을 취한다고 비판했다. “상고(상인)라는 자들은 밭을 갈지 않아도 먹고, 짜지 않아도 입으며, 교묘하게 갑절의 이익을 취해 농민과 공인의 몫을 가로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지원이 연경에서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하자 한편 한편 나올 때마다 한양의 선비들이 앞다퉈 베껴갔다. 전권이 완성되기도 전에 각종 필사본이 나돌았다. 그러나 박지원은 열하일기로 엽전 한 닢 벌지 못했다. 책을 써서 돈을 번다는 생각을 누구도 하지 못했다. 그가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난 것은 음서로 벼슬을 얻으면서부터였다. 다시 빈곤한 생활로 돌아갈 자신이 없어서였을까. 박지원은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 명령을 받아들였고, 이후 그의 창의적 저술은 더는 나오지 않았다.
日 270여 영주, 수도 거주 명령…교통·상업 발달 계기
그 시대 일본은 달랐다. 이념적으로 중농주의를 고수했지만, 상업의 눈부신 발전을 막지 못했다. 성리학자가 아닌 무사들이 집권했는데, 지방 세력을 견제하려던 정책이 의도치 않게 가져온 결과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전국의 모든 영주에게 격년제로 수도에 거주하라고 명령했다. ‘참근교대(參勤交代)’라 불린 이 제도로 영주 270여 명은 매년 영지에서 에도까지 먼 길을 오가야 했다. 길이 뚫리고 수백 명의 수행원을 재울 숙박 시설도 생겨났다. 육지와 바다에 교통인프라가 완비된 것이다.영주들은 농민에게서 거둔 쌀을 현금화해 여비와 에도 체류 경비를 마련했다. 화폐 사용이 일상화하고, 어음거래가 생기고, 예금·대출 업무를 하는 환전상들이 나타났다. 인구 100만의 에도뿐 아니라 각 번(藩)의 무사들을 성(城)에 모여 살게 하자 소비도시들이 됐다. 이를 겨냥해 상품 작물 재배가 늘고, 각 지역 특산물들이 브랜드화 돼 전국으로 유통됐다.
유통되는 상품 중에는 각종 서적도 있었다. 17세기 중반에 벌써 출판업자가 200명이 넘었다. 그들은 거액이 들어가는 목판 투자를 위해 동업 조직을 결성하고 해적판을 적발해 관청에 고발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인기 작가에게는 상당한 수익배분을 약속했다. 초기 형태의 지식재산권이 등장한 것이다.
1774년 스기타 겐파쿠가 네덜란드 해부학 책을 번역해 ‘해체신서’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겐파쿠와 동료들은 네덜란드어를 거의 몰랐고 사전도 없었다. 겨우 아는 몇 개의 단어와 그림 속 명사들을 늘어놓고 그 사이를 메워가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수년간 반복했다. 신경, 연골, 동맥 등 우리가 쓰는 의학용어들이 다 이때 만들어졌다. 의사로서 직업적 탐구심도 있었겠지만 돈을 벌겠다는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 출판 1년 전에 ‘해체약도’라는 소책자를 찍어 배포했는데 일종의 홍보 전단지였다.
책으로 돈을 버는 것은 그만큼 독자가 많다는 뜻이다. 당시 서민들에게 책값이 너무 비쌌다. 그래서 책을 빌릴 수 있는 대본소가 전국에서 성업했다. 가장 인기 있는 책은 수위 높은 애정소설이었다. 그런데 이걸 누구에게 읽어달라기가 참 난처했다. 삽화를 보며 상상만 하다 동네 불량배들도 떠듬떠듬 글을 배웠다. 그 결과 19세기 중반 일본의 문자해독률이 80%에 달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 사유재산 모으면 공격 대상
우리는 메이지유신 이전까지 일본이 조선보다 뒤떨어진 나라라고 배웠다. 조선통신사를 우대하며 문화를 전수받으려 노력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은 이미 오랫동안 근대화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조선에도 18세기 중반부터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貰冊店)이 등장했다. 양반층 부녀자가 주 고객이었지만 평민들에게도 인기가 퍼져나갔다. 그런데 여기서 유통하는 한글 소설이 남녀 애정사 등 유교 윤리에 반하는 내용을 담았다고 해서 정부가 단속했다. 특히 정조는 ‘패관잡기’가 선비 정신을 흐린다고 보았다. 그래서 소설 대여를 금지하고, ‘음란한 책’들을 압수해 불태웠으며, 세책업자들을 잡아다 곤장을 쳤다.
정조를 비롯해 조선 후기의 거의 모든 개혁 시도는 성리학의 틀 안에서 해법을 찾으려 했다. 성리학의 도덕 정치 이념이 가혹한 신분제도와 정치권력의 탐욕을 가리고 있음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다. 현실에서는 중국 고서를 외워 관리가 된 자들이 무지한 백성들의 인권과 재산을 유린하고 있었다.
조선 사회에서는 열심히 일해 재산을 모으겠다는 생각 자체가 위험했다. 자칫 관아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고 죄를 자복한 뒤 재산을 헌납하거나 불구가 돼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사또는 벼슬을 얻는 데 쓴 뇌물을 보충해야 했고, 아전들도 먹고살아야 했으니 아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성들은 가족이 굶어죽지 않을 만큼 잉여재산을 최소화하는 게 안전했다.
선교사 샤를 달레는 1874년 ‘조선천주교회사’에 “조선인은 천성적으로 게으르다”고 적었다. 육영공원 교사였던 조지 길리엄도 1892년 ‘서울에서 본 한국’에서 “조선 남자는 여유의 화신이다. 그는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으며, 그에게 시간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했다.
조선 사회는 끔찍할 만큼 가난하고 불결했다. 영국인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은 처음 조선에 도착해 본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좁고 더러운 거리에는 진흙을 발라 창문도 없이 울타리를 세운 오두막집과… 고체와 액체의 폐기물이 담겨 있는 불규칙한 개천이 있다. 더러운 개와 반라이거나 전라인 채 눈이 잘 보이지 않고 때가 많이 낀 어린애들이 두껍게 쌓인 먼지와 진흙 속에 뒹굴거나, 햇볕을 바라보며 헐떡거리거나 눈을 끔벅거리기도 하며, 심한 악취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알려진 대로 비숍은 러시아 연해주로 가서 조선인 이주민들을 보고 조선인이 열등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바꾸었다고 적었다. “그들이 번 돈을 짜낼 양반도 관리도 그곳에는 없었으며…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고 많은 농부들이 부유했다.… 조선에 있는 그들의 동포들이 정직한 행정과 소득에 대한 정당한 방어가 있으면 천천히 발전해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광복 후 생산기관 국유화 극복…서구식 경제체제로 건국
제도화된 수탈과 강요된 나태, 그리고 절망적 빈곤은 결국 망국으로 귀결됐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마저 국민주권의 공화제를 지향하면서도 조선의 이념적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기에 사유재산을 부인하는 사회주의 영향까지 들어왔다.상해임시정부가 1944년 4월 개정한 ‘대한민국임시헌법’은 제51조에 “토지와 대생산기관은 국유로 하되, 국민 각자의 생활상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 삼균주의를 실행함”이라고 명시했다.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란 개인 민족 국가별 평등을 지향한 것인데, 개인 간의 경제적 균등을 위해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를 천명했다.

인촌 김성수(왼쪽)와 환담하는 이승만 대통령. 동아DB
농지개혁 역시 농민에게 경작권뿐 아니라 완전한 소유권을 줘 역사상 최초로 민중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천성적으로 게으르다’는 평을 들었던 민족이, 어디서나 “빨리빨리”를 외치는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민족으로 탈바꿈했다.
시장 수급 실패를 왜 사유재산권 제한으로…
그러나 감동은 쉽게 사라지고 타성은 남는 법이다. 우리는 경제 불평등과 시장 수급 실패에 직면할 때마다 정책의 부실을 탓하기보다 사유재산권 제한을 택하려 한다. 당장은 그게 더 쉽고 효과적으로 보인다.현 정부 들어 서울의 부동산 가격이 9개월 만에 11%나 폭등했다. 공급 부족 때문이다. 서울에는 세대 분할 등으로 매년 5만 채의 주택이 새로 필요하다. 정부는 작년 서울에 3만8000가구의 아파트가 공급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청년안심주택 중 원룸 임대 등을 통계에서 빼야 해, 민간에서는 실제로는 2만5000가구 수준으로 본다. 여기에 다세대주택 공급은 3000가구에도 못 미쳤다. 정부가 부랴부랴 지난해 9월 7일 수도권에 매년 27만 가구씩 공급하겠다는 초대형 계획을 발표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우려했던 대로 사업 진척 대신 곳곳에서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정부는 공급이 막히자 수요를 줄이려 했다. 주택담보대출 축소, 토지거래허가구역 확대, 주택 실거주 의무화, 공시지가 인상에 이어 ‘징벌적 보유세’ 이야기까지 나온다. 결과는 좋지 않다. 서울 강남권을 누르니 다른 지역 집값이 오르고 있다.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전월세가 폭등했다. 생활권을 옮기지 않으려는 세입자들의 안간힘 때문에 집을 보지 않고 계약금부터 넣는 ‘노룩(no-look) 전세’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정부는 그 책임을 다주택자들에게 돌렸다. 주택 가격 폭등에 다주택자 영향은 크지 않다는 전문가들 의견에도 불구하고 희생양이 필요한 듯하다. 다주택자에 대한 주택담보대출을 제한하고, 양도소득세 중과 유예도 끝내겠다고 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월 “시장을 이기는 정부도 없지만, 정부를 이기는 시장도 없다”라며 정책 강행 의지를 밝혔다. 과도한 다주택자 규제를 비판하는 언론을 향해 “마귀에게 최소한의 양심마저 빼앗긴 건 아닌가”라고까지 말했다.
이대로라면 다주택자가 사라질 것 같다. 또한 지난해 9·7대책에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토지 공급에서 직접 시행으로 역할을 바꾸고, 공공택지 개발의 반 이상을 임대 또는 공공분양으로 채운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즉 주택공급 기능이 민간에서 공공기관으로, 주거 형태는 소유에서 공유로 바뀌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먼 길을 돌아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는 조선의 왕토사상으로 돌아갈지도 모르겠다.
‘주택 배분제’ 실패로 ‘사유재산’ 도입한 쿠바

영화 ‘교환’에서 주인공 로시타 포르네스가 주택 교환 계획을 써내려 가고 있다. 화면 캡처
공산혁명 이후 쿠바는 ‘주택 배분제’를 실시했다. 직장 단위로 건설단을 조직해 노동자들이 직접 주택을 짓고 기여도에 따라 배정받았다. 입주자는 국가에 임차료를 내고 ‘영구 거주권’을 얻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공급이 부족해지고 기존 주택도 제대로 유지 보수가 안 됐다. 영화에서처럼 교환을 통해 집을 바꿨지만, 현실은 현금이 오가는 불법 거래와 뇌물이 성행했다. 결국 쿠바는 2011년 주택 매매를 합법화했고, 2019년 헌법을 개정해 사유재산권을 도입했다. 우리나라도 꼭 ‘주택지분 공유제’를 해봐야 결과를 아는 것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