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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발굴

‘일본판 쉰들러’ 후세(布施辰治) 변호사

항일투쟁 조선인 구원에 평생바친

  • 정준영

‘일본판 쉰들러’ 후세(布施辰治)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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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후세 선생의 업적으로 동양척식회사의 나주 농민토지수탈 사건을 합법적인 사기 사건이라고 규탄한 것을 들 수 있다. 1925년 7월13일 동아일보는 ‘흉악한 동양척식회사와 나주 농민토지분쟁 전말’이라는 제호 아래 천인공노할 ‘동양척식’의 죄상을 대서특필했다.

이 사건은 칼 찬 일본헌병과 순사들이 빙 둘러선 가운데 웬 양복쟁이 한 놈이 쇠메를 내려치면서 ‘동척 소유’라는 팻말을 박기 시작하자 한 노파가 한사코 그 팻말을 뽑아 내팽개치면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 땅은 경선궁으로부터 동척이 샀으니 그리 알고 앞으로는 동척에 소작료를 내시오.” 그들은 노파를 밀쳐버리고 다시 그 팻말을 박기 시작했다.

“남의 땅을 왜 이렇게 무법하게 강탈하느냐!” 노파가 울음 반 고함 반으로 계속 반항하자 일본헌병이 나서서 그 노파의 목에 포승줄을 칭칭 감고 군도 자루와 몽둥이로 미친 개 다루듯 두들겨팬 것이다. 그 노파는 잠시 후 헌병의 손아귀에서 빈 자루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1911년 2월12일(음력), 나주군 왕곡면 금산리 이회춘의 노모는 일본 헌병 상등병 나카지마(中島)의 몽둥이에 이렇게 맞고 즉사한다(1925년7월13일 동아일보 대서특필). 당시 나주들 왕곡면 영산면 세지면 등 곳곳마다 이와 같은 유혈참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굳이 역사적인 경위를 따지자면 나주 궁삼면 농민토지반환 운동은 구한말 탐관오리들의 농지소유권 탈취과정과 후반부 조선총독부의 전위대 동양척식회사의 농민토지 수탈에 맞선 항일운동으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1909년 가을 문제의 동양척식회사는 토지매수반을 파견해 관헌의 위력을 앞세워 시가 200만 원 상당의 이곳 토지를 단돈 8만 원에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그런 뒤 위 3개 면민들에게 앞으로 이 토지가 동양척식의 소유가 확실하다는 승인 날인을 강요했다. 이에 단 한 사람도 응하지 않았다.



동양척식은 헌병들과 경찰의 힘을 빌려 이 참에 본때를 보일 요량으로 이 지방 원로격인 이상협, 장홍술, 김운서 등을 불법 연행하여 혹독한 태형을 가하고 강제로 도장을 빼앗아 ‘동양척식 소유’로 이전시켰다. 이후 3개 면민과 동양척식 간에 피나는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동양척식회사는 1908년 설립 직후부터 전남지방, 특히 영산포 방면 토지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기후가 온난하고 풍토도 농업에 적합하여 목포로 왕래하는 편리한 수운을 감안하면 일본의 농업 이민을 수용하기에 더없이 좋은 입지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97년 목포 개항 이후, 영산포는 전남 내륙 지방에 형성된 최초의 식민전초기지가 된다. 영산포에 일본 사람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목포보다 먼저 ‘일인회’가 조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광주·나주보다 먼저 일인소학교가 설립된다. 총독부 무단통치의 직할인 영산포헌병대가 그 위세를 뽐내면서 전남 일원을 관할한 것을 보아도 영산포를 포함한 궁삼면 일대의 비중을 가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동양척식회사 전남 영산포에 눈독

동양척식회사의 궁삼면 토지매수는 1910년에 밭 283.57정보, 논 763.0626정보, 잡종지 58.40정보에 달했다. 당시 총독부 통계를 보면 위 매수물량은 1910년 당시 동양척식이 전남에서 수탈한 토지의 40%에 해당하는 수치다. 동양척식은 이 땅들을 일본에서 이주해온 농장주들에게 헐값으로 팔아넘기기 위해 앞서 언급한 천인공노할 노파살해 사건 등을 자행한 것이다. 이를 더 크게 보면 일제는 ‘조선관유재산관리규칙’에 의거, 궁장토나 역토(驛土)나 둔토(屯土) 등에 조금이라도 관련되어 있으면 이를 모조리 국유지로 편입시켜 버렸다.

생계와 직결된 토지를 빼앗아 버렸으니 방방곡곡 송사가 그칠 날이 없었다. 일제의 조사방법도 칼자루 잡은 놈 마음대로였다. 우선 토지소유권 사정에서 일제는 “신고만 하면 보호받을 수 있다”고 떠벌렸으나 실은 복잡한 신고절차, 지주(地主)를 통한 토지신고서 확인과 소유권 심사에서 소농의 권리를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런 야바위를 통해 조선총독부는 총경지면적 40% 이상을 차지하는 조선 최대의 지주로 등장하면서 이를 동양척식회사나 일본인에게 헐값으로 팔아넘겼다. 총독부가 통계적으로 조선의 산업이 늘었다고 자랑했지만 그 결과 생산량이 증가된다 하더라도 모두 일본으로 유출된다면 무산계급인 조선농민들의 생활은 조금도 향상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같은 가렴주구에 불만만 쌓이게 되는 것이다.

1919년 3·1 운동이 터진 뒤 10월11일 궁삼면 면민들은 농민회를 발족시켰다.

농민회 결성은 지난날의 중구난방식 투쟁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서 순전히 자발적인 결사였다. 이것은 나중에 또다시 전국적인 관심 속에 나재기 이제호 최재홍 등 21명으로 구성된 ‘토지회수동맹 투쟁조직’으로 확대개편된다.

일제는 1930년대 들어서 우량 소작인들에게 토지를 헐값으로 양도하는 소위 자작농 창성(自作農 創成)이라는 제도를 두고 농민들을 회유하려 하였다. 이는 1912년 궁삼면에서 이미 시도했던 사탕발림인 것을 이곳 농민들은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무상반환운동으로 똘똘 뭉친 궁삼 면민들에게 제시한 동양척식의 이런 사탕발림식 교섭안이 무위로 돌아가자 동양척식은 삼면 곳곳에 격문을 붙이고 나주경찰서로 하여금 토지회수동맹부원들을 강제로 연행하여 죽도록 매질하기 시작했다.

이에 모월 모시 한밤중에 모인 면민들은 각자 무명지를 잘라 피의 서약서에 서명하고 혈장까지 찍어 세차게 대항했다. 말하자면 1500~1600 면민들이 “토지를 찾는 그날까지 소작료를 내지 말자”고 철석같이 맹약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어쩔 것인가! 철석같이 맹약한 위 서약서가 채 마르기도 전에 영산면 동수리 양모라는 자와 세지면 농감 최영환 등 5,6명이 동양척식의 회유에 넘어가 소작료를 냈다는 소문이 바람에 날려 마을마다 전해졌다. 온 면민들의 심장은 폭발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살기등등한 면민들은 첫 번째로 동수리 양모 씨를 몽둥이로 박살낸 데 이어 소작료 납부자로 의심받을 만한 일부 농감의 이름을 외쳐대며 이 판에 본때를 보이자고 아우성이었다. 거창하게 분출된 분노의 물결은 그 표적을 찾아 일렁이고 있었다. 이 지방 원로들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동곡대전’이 불붙은 것이다.

“1925년11월26일 무장경찰과 정면대결! 칼 뺀 야마구치 순사부장 중상!” (1925년11월29일 조선일보, 시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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