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잘나가던 소아과 그만둘 땐 미쳤다고 했지만 가슴 뛰는 삶 택해”

의사, 번역가, 출판인 강병철의 반전 인생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24-05-06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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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난한 집 장남 ‘원래 꿈이 뭐였더라’

    • 딸의 발병과 교통사고, 인생 ‘톱’ 찍고 나락으로

    • “당신은 쉬어야 해” 아내의 말에 “쉴 수도 있네?”

    • 아프면 도서관 찾는 캐나다인, 사이비 과학에 내둘리는 한국인

    • 우리 사회 문제에 답 제시하는 게 출판의 의무

    • ‘어딘지 약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며

    “그때가 제 인생의 ‘톱’이었죠. 1999년 개원해 2008년까지 전국에서 제일 잘되는 소아과 다섯 손가락 축에 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개원 때부터 ‘전자 차트’를 써서 바로 통계가 나오거든요. 8년 반 동안 하루 평균 280명의 환자를 봤더라고요. 믿기 어렵겠지만 하루에 환자 500명을 본 날도 있었으니까요.”





    서울대 의대를 나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됐지만 여전히 가슴속에 ‘시인’의 꿈을 간직하고 있던 그가 제주도에서 공중보건의를 한 뒤 반해 눌러앉았다. 대학 동창인 아내와 함께 서귀포시에 강병철소아과의원을 열었다. 강병철소아과에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환자가 몰려들었다. 타향 출신 의사가 제주도 엄마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은 뭘까.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캐나다에서 출판 번역가로 16년째 살고 있는 강병철 씨. [조영철 기자]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캐나다에서 출판 번역가로 16년째 살고 있는 강병철 씨. [조영철 기자]

    “설명이죠. 아무리 바빠도 설명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환자의 상태, 약 복용법 등을 알려주고 혹시 빠뜨린 게 있을까 봐 유인물을 만들어 나눠드렸습니다. 당시 알레르기 환자의 코에 뿌리는 약이 처음 나왔는데 일단 제가 사용법을 보여주고, 아이가 직접 해보게 하고, 처방전대로 약을 받아 오면 다시 제 앞에서 해보라고 했어요. 다음 외래 때 제대로 하는지 다시 확인했죠. 그런 식으로 매일 수백 명의 환자를 보니 제 말이 얼마나 빨랐겠어요.”



    강 원장은 말로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한밤중에 백신 맞은 아이가 열이 난다고 하면 지체 없이 병원에 오도록 했다. 그가 살던 제주시에서 병원이 있는 서귀포까지 차로 1시간이 걸렸다.

    “아이가 열이 나고 많이 힘들어하면 첫째, 해열제를 먹이세요. 둘째, 열이 잘 떨어지지 않으면 다른 종류의 해열제로 바꿔봅니다. 셋째, 그래도 안 떨어지면 옷을 벗기고 따뜻한 물로 몸을 닦아줍니다. 단 찬물이나 알코올을 써서는 안 됩니다. 넷째, 아이가 많이 힘들어 보이거나 심한 기침, 구토, 설사 등 다른 증상이 생긴다면 가까운 소아청소년과를 찾으세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요. 신생아는 열이 나면 무조건 의사를 만나야 합니다. 신생아는 몇 개월까지를 말하나요? 의학적으로는 2개월까지로 정의합니다만, 그냥 100일이 되기 전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강병철 ‘툭하면 아픈 아이 흔들리지 않고 키우기’에서)

    툭하면 아픈 아이 흔들리지 않고 키우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반복 설명을 하고도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요”를 외치는 강 원장에게 보호자들은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덕분에 평생 가난한 집 장남을 짓눌러온 돈 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문득 ‘원래 내 꿈이 뭐였더라’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인문계를 택했지. 국문과가 아니면 법대를 가고 싶었지. 아버지는 이과로 바꾸라고 하셨지. 수학과 물리가 싫어서 의대를 택했지만 적성에 안 맞았지. 두 번이나 전과를 하려 했지. 본과 1학년 때는 정말로 그만두려 했는데 당시 본과 2학년이던 아내가 지금까지 공부한 게 아깝다며 의사 면허만이라도 따라고 말렸지. 막상 의사가 되고 보니 소아청소년과가 적성에 맞았지. 아니 너무나 잘 맞았지. 그래도 개원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버지가 쓰러지셨지. 장남으로서 부모님 생계와 동생들 학비까지 책임져야 했지. 대학병원 펠로를 포기하고 제주도에서 개원을 했지. 급한 불만 끄고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환자와 가족들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았지. 돈 버는 재미까지 쏠쏠했지. 그사이 아이가 셋이 됐지.’

    어느 순간 자신이 꿈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에 이르자 견딜 수가 없었다. 2002년 유럽 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외국병’에 걸렸다.

    “유럽의 미술관, 박물관을 보고 나니 인문학적 체험이 너무나 좋더라고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우리 외국에서 살아볼까’라고 했는데 아내는 농담인 줄 알더군요. 하지만 저는 보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봐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당장 아이 셋을 데리고 유럽에서 살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할까 따져봤죠. 아무리 계산해도 가진 돈만으론 오래 버티기 어렵고 계속 일을 해야겠더라고요. 영국 의사 면허가 그나마 따기 쉬워 보여서 도전했죠.”

    2년여 공을 들인 끝에 영국 왕립소아과학회 ‘Basic Specialist’ 자격증을 취득한 것이 2005년 12월. 먹고살 일은 마련했으니 본격적으로 영국 이주 계획을 세웠다. 환자가 몰려드는 병원을 그만둔다고 하니 모두 미쳤다고 했지만 그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아내와 세 딸을 영국의 교육 환경과 유사한 싱가포르로 유학 보냈다. 일종의 전지훈련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불운

    가족을 보낸 뒤 병원은 여전히 잘됐지만 기러기 아빠는 밤마다 외로움에 진저리 쳤다. 그때 영어 공부 삼아 집어 든 책이 하버드 의대 내과 교수 출신 마르시아 안젤이 쓴 ‘The Truth About the Drug Companies’였다. 한미 FTA가 추진되는 상황에서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이윤을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대중과 정부를 속이는지 파헤친 이 책을 보자마자 의사로서 의무감이 솟구쳤다.

    “이대로 가면 우리 제약산업은 다 저들 손에 넘어가고 의료체계도 완전히 망가지겠구나 싶더라고요. 무작정 미국 랜덤하우스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죠. 출판 프로세스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한국 의사인데 이 책을 꼭 번역해서 내고 싶다’고 하니 상대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어요. 에이전시를 통하라고 절차를 알려주더라고요.”

    결국 그 책은 ‘제약회사들은 어떻게 우리 주머니를 털었나’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얼떨결에 소아과 의사 강병철이 번역가로 데뷔했다. 그러나 화양연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딱 1년 만에 내리막길도 아닌 나락이 찾아왔다.

    “기러기 아빠로 10개월쯤 됐을 때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살아난 것이 기적이라고 했는데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불면증이 생겼습니다. 수면제를 안 먹으면 잘 수가 없었고 약을 먹어도 두세 시간 겨우 잘까 말까 했죠. 심신은 피폐해지고 면역이 떨어져 폐렴으로 입원하기도 했어요. 설상가상으로 싱가포르에 있던 큰애가 정신질환이 생긴 거예요.”

    아이가 어딘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숙제를 제때 마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불안해했다. 오래전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사람들을 비난하고, 심지어 직접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그쪽에서 기억도 하지 못하는 일을 사과하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아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 한국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기로 했다. 혹시 사춘기의 반항은 아닐까 기대해 봤지만 상태는 악화일로였다.

    약물 치료와 상담 치료를 병행하며 딸을 한국 학교에 편입시켰는데 왕따를 당했다. 틱장애가 오고 강박, 공포, 불안, 극도의 우울증이 생겼다. 아이는 책상 밑에 있는 가상의 존재와 대화하며 불안을 달래고 있었다. 칼로 책상 위에 뭔가 새기는 버릇도 생겼다. 어느 날 아이가 책상에 “나는 패배자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다”라고 새겨놓은 글을 보고 억장이 무너졌다. 24시간 살얼음판 같은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갑자기 산꼭대기에서 절벽 밑으로 추락한 느낌이었어요. 잘나간다더니 저 꼴이 됐구나. 의사란 놈이 애를 어떻게 키웠기에 저 지경으로 만들었나. 사람들이 저를 비웃는 것 같았어요.”

    하루라도 빨리 한국을 떠나야겠다고 조바심을 낼 때 영국 뉴캐슬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이번엔 아내가 만류했다. “당신도 환자야. 새로운 일을 구할 때가 아니라 쉬어야 할 때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앞만 보고 달리는 스타일이라 쉰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한 거죠. 쉴 수도 있네? 쉬면 되겠네? 가족 모두 캐나다 밴쿠버로 가서 2~3년 재정비하기로 했죠.”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

    2008년 3월 병원을 접고 캐나다로 떠났다. 동네 공공도서관은 그의 작업실 겸 놀이터였다. 서가를 둘러보면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유통되는 정보의 질과 양이 부러울 정도로 풍부했다. 아무리 희귀한 병이라도 의사가 쓴 지침서와 환자가 쓴 투병기가 골고루 갖춰져 있었다.

    “캐나다 사람들은 아프면 도서관에 가요. 예를 들어 ‘내가 얼마 전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좀 권해 주면 좋겠다’라고 요청하면 사서들이 검색해서 관련 책을 찾아주고 다른 도서관에 있는 책까지 구해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한국에선 아프면 일단 지인과 상의하거나 인터넷 검색부터 하잖아요. 의사로 일할 때 환자들에게 제대로 정보를 전달해 주지 못한 것이 후회되더군요.”

    정신질환자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양질의 정보였다. 내 자식이 어떤 상태인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부모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당장 하루하루의 생활에 지치지 않고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신과 교과서를 찾아 다시 읽어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때 가족치료 전문가 리베카 울리스가 쓴 책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를 읽고 엄청난 위안을 받았다. 이 책을 빨리 번역해서 한국에 소개하고 싶었다.

    세계적으로 조현병 유병률은 1%이고, 양극성장애를 합치면 2.2% 정도 된다. 우리나라 인구가 5000만 명이라면 조현병 환자가 50만 명이 넘는다는 뜻이다. 이들 가운데 1%만 책을 사도 초판 5000부는 금방 나간다는 논리로 출판사를 설득했다. 판권을 확보하고 번역에 들어갔다.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를 번역하면서 얼마나 울었던지 그 모습을 본 사서가 아예 휴지 한 통을 통째로 가져다준 것이 고마워서 또 울었다.

    “한국에서 치료를 받을 때 ‘아이에게 과한 기대를 하지 마라’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줘라’ ‘자식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여라’ 같은 말을 자주 들었어요. 은근히 아이에게 정신질환이 생긴 것이 부모 탓인 것처럼 들리죠. 하루는 하도 답답해서 ‘선생님 말씀은 알겠는데 아이에게 뭘 더 어떻게 잘해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어요. 아이가 캐나다 시민권을 취득한 뒤 동네에 있는 정신보건센터에 다니며 치료를 받았는데 캐나다 의사는 그냥 ‘뇌의 병’이라고 말하더군요. 위에 병이 생기면 위장약을 먹듯 뇌에 병이 생기면 그 약을 먹으면 된다는 거죠. 간호사들이 하는 환자 부모교육에서도 제일 자주 하는 말이 ‘부모는 죄가 없다. 죄책감을 갖지 마라’예요. 저도 의료인인데 그 말을 들으니까 또 눈물이 나더라고요. 지금도 묻고 싶어요. 한국의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 들은 왜 부모가 잘못해서 자식에게 정신질환이 생긴 것이 아니란 말을 한마디도 해주지 않는지. 정신질환에서 당사자와 가족에게 가장 중요한 게 스스로 해방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무슨 나쁜 일을 해서 이런 병에 걸리는 게 아니고 그냥 불운했을 뿐이다. 불운을 수치스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요.”

    코로나19 팬데믹이 살린 책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

    하지만 번역하면서 쏟아낸 눈물만큼 보상이 돌아오진 않았다. 몇 년이 지나도 초판조차 소진되지 않아 출판사에 손해만 끼쳤다. 번역가가 돈을 번 것도 아니다. 3개월씩 걸려 책 한 권 번역해도 손에 쥐는 돈은 잘해야 500만~600만 원이다. 가족을 부양해야 할 가장이 전적으로 매달릴 만한 일이 아니었다.

    캐나다 생활 16년째. 사람들은 그가 벌어놓은 돈으로 음악 듣고 책 읽으며 여유롭게 사는 줄 안다. 그런 삶을 꿈꾸며 캐나다행을 시도했는지는 모르지만 시작부터 현실은 기대에 크게 어긋났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사태는 애초 그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환율이 치솟고 자산가치는 하락하고 아내 모르게 투자한 돈을 회수하지 못해서 빈털터리가 됐다. 캐나다 생활 6개월 만에 생활비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의사를 해야 하나 고민할 때 매뉴얼 등을 번역하는 ‘상업 번역’ 시장을 알게 됐다.

    “전문 번역가들이 모이는 온라인 마켓 플레이스가 있어요. 거기에 프로필을 올려놓고 입찰도 하면서 일을 따내는데 저는 1년 만에 영-한 번역가 중 톱이 됐어요. 한 달에 2000만 원을 벌기도 했으니까요. 번역으로 그 돈을 벌려면 얼마나 많은 양을 타이핑했을지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미친 듯이 일을 하다 문득 ‘이러려고 이역만리 캐나다까지 왔나’ 하는 회의가 들었죠. ‘나는 의사고, 번역가고,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딸의 아빠다. 그렇다면 올바른 의학 지식을 꼭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보람 있는 일이 아닐까.’ 저는 책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출판이 우리 사회의 문제에 어떤 식으로든 답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의 장점은 ‘총체성’이죠. 포털이나 유튜브 같은 데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은 단편적이어서 전체 줄거리를 이해하기 어려워요. 맥락을 모르면서 단편적 지식을 아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직접 출판을 해보자 하게 된 거죠.”

    2013년 11월 ‘누군가에게 빛이 될 책을 만듭니다’라는 모토로 출판사 ‘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을 시작했다. ‘꿈꿀자유’는 그가 PC통신 시절 ‘유니텔’ 재즈 동호회에 ‘재즈 일기’(무려 465회나 연재했다)를 쓸 때 사용한 닉네임이었다. 재즈에 푹 빠진 문학도의 꿈이 이런 식으로 실현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꼬막 껍질만 한’ 출판사를 시작했지만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딱 1억 원을 까먹을 때까지만 버텨볼 심산이었다. 아내에게도 그렇게 약속했다.

    2015년 메르스가 한국을 강타했을 때 감염병과 관련해 도움이 될 만한 책을 닥치는 대로 찾아 읽다가 발견한 것이 세계적 과학 저술가 데이비드 콰먼이 쓴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였다. 팬데믹과 오늘날 인류가 처한 상황을 알려주는 600쪽 분량의 역작이었지만 정작 국내 반응은 미지근했다.

    “잊을 만하면 찾아와 닭을 몰살시키고 사람의 건강까지 위협하는 조류독감,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사스, 아프리카 사람들을 끔찍한 고통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에볼라, 말레이시아와 방글라데시를 휩쓴 니파, 2900만 명의 사망자와 3000만 명이 넘는 환자를 낳은 세기말적 역병 에이즈, 2015년 우리나라 전체를 마비시켰던 메르스, 그리고 소위 ‘햄버거병’으로 알려진 용형요독증후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동물의 병원체가 인간에게 건너와 생기는 병, 즉 인수공통감염병이다.”(‘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 옮긴이의 글에서)

    무시무시한 경고를 보냈지만 사람들은 메르스 폭풍이 지나가자 쉽게 잊었다. 코로나19라는 대역병이 돌기 전까지는. 그러다 2020년 전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에 휩싸이자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의 주문이 쏟아졌다. 지난 7년간의 매출보다 그해 매출이 더 많았다. 문 닫을 궁리만 하던 출판사 살림이 확 피었다. 2021년 롯데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에 선정돼 상금 2000만 원까지 받았다.

    자폐는 어떻게 인류의 진보를 이끌었나

    2018년 스티븐 실버만의 ‘뉴로트라이브’의 번역에 들어갔다. 자폐라고 하면 평생 자기 속에 갇혀 지내는 불치병이고, 자폐 어린이는 말도 못 하고 대소변도 못 가리는 저능아라는 인식이 강했다. 자폐증의 원인을 환경 독성 탓, 백신 탓을 하며 잘못된 치료법에 매달리는 사람도 수없이 봤다.

    “그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점에서 충격을 받았어요. 첫째, 명색이 소아과 전문의인데 자폐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의대 시절 배운 내용이 하나도 맞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또 하나는 신경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장애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렸다는 거예요.”

    무릎을 치고 눈시울을 적시며 번역을 마친 뒤 사람들에게 이 책의 내용을 알리기 위해 한국에 와서 대중 강연을 다녔다. 그때마다 어떻게 자폐인의 처지를 그리 정확히 알고 공감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어디 남의 일인가. 장애를 겪는 자식을 둔 부모의 죄책감과 후회의 나날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신이 대중 강연에 소질이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올바른 의학 지식을 전달하고 사이비 과학과 싸우는 데 책과 강연이라는 두 가지 무기가 생긴 것이다.

    ‘뉴로트라이브’가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자폐에 대한 인식 변화에 조금은 기여했다고 치고 이제는 사람들에게 자폐의 전체 줄거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때 퓰리처상을 수상한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존 돈반과 캐런 저커 공저)를 발견했다. ‘뉴로트라이브’가 자폐의 개념이 과학적으로 정립된 역사를 다룬다면,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는 자폐의 민중사라고 할 수 있었다. 폭력과 학대, 착취와 소외, 희생과 비극과 시행착오로 얼룩진 자폐의 파란만장한 역사이자 질병이자 저주였던 ‘어떤 상태’가 축복의 대상으로 변해온 인간 해방의 역사이기도 했다. 자폐에 대한 대중 인식을 바꾸는 데 이만한 책도 없다는 확신이 섰다. 860쪽이 넘는 대작에 도전했다. 이번엔 꿈꿀자유에서 직접 출간할 계획이었는데 문제는 돈이 없었다. 그때 북펀딩을 통해 제작비를 마련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딱 제작비만큼 1400만 원이 모였다. 이 책으로 그는 2021년 한국출판문화상(번역 부문)을 수상했다.

    초판도 소진하지 못하고 사라졌던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도 독자의 후원으로 부활했다. ‘면역항암제가 온다’를 번역한 뒤 말기암 환자에게 도움이 될 강연을 하러 한국에 왔다가 임찬수 군의 부모를 만났다. 치과의사인 부부의 아들은 정신질환을 앓다 아파트에서 투신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들 부부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손이 떨리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캐나다로 돌아온 후로도 그 부모의 고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이’를 복간하고 싶었지만 역시 돈이 없었다. 그때 찬수 군의 부모가 아무런 조건 없이 비용을 지원했다. 2020년 복간된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 첫 장은 ‘임찬수(1996~2019) 이제는 별이 된 젊은 영혼에게’라는 헌사로 시작한다.

    “옛날에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

    강병철 씨가 최근 번역한 책은 사이먼 배런코언의 ‘패턴 시커’다. 심리학자이자 케임브리지대학 자폐연구소 소장인 배런코언은 현존하는 최고의 자폐 연구자로 꼽힌다. ‘패턴 시커’에서 배런코언이 꺼내 든 화두는 ‘자폐는 어떻게 인류의 진보를 이끌었는가’다. 실리콘밸리처럼 첨단기술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 자폐 유병률이 높다는 것은 이제 새로운 뉴스도 아니지만, 그들의 특성을 ‘체계화 메커니즘’으로 설명한 것이 이채롭다. 이 책은 출간된 지 한 달도 안 돼 3쇄를 찍으며 조용한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폐 서사’ 같은 걸 누가 읽겠어라고 했죠. 저는 ‘어딘지 약간 다른 사람들, 주류와는 약간 다른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좋아하는데요, 이제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데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게 아닐까요.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 곧 나를 인정하는 것이거든요. 왜냐면 우리는 누구나 다 남하고 전혀 다른 존재잖아요.”

    이제 딸의 근황을 물을 차례다. 중학교 1학년 때 발병한 딸이 올해 서른 살이 됐다.

    “큰애는 망상을 이겨냈어요. 어느 날 그러더라고요. ‘아빠 사실은 내가 믿고 있던 프로젝트(망상)라는 건 없는지도 모르겠어. 그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 말을 듣고 눈물이 너무 나는 거예요. 1~2년 지난 뒤엔 ‘옛날에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라고 하더라고요.”

    큰애가 망상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굿도 아니고 기적도 아니고 약물 치료였다. 강병철 씨는 단호하게 “현재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다”고 말한다.

    “10년이면 3600일쯤 되잖아요. 약을 복용하면 매일 3600분의 1씩 좋아지는 거예요. 효과가 눈에 안 보이죠. 하지만 좋아진다는 믿음을 가져야 해요. 의사니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하는데 저 역시도 아이가 아플 때 친척의 권유로 ‘굿’을 할까도 생각했어요. 사람들에겐 과학을 믿어야 한다, 과학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내 자식 일에는 그럴 수 없는 심정을 이해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죠. 정말 그럴수록 더욱 더 과학의 힘을 믿어야 해요. 정신질환 약을 먹는 것은 두꺼운 털외투를 세 벌 껴입고 물에 푹 적신 뒤 꽁꽁 얼린 채로 있는 것과 비슷하다는 말이 있어요. 그만큼 힘든 거예요. 그러니 정신질환자에게 ‘약을 잘 먹으면 된다’는 말도 쉽게 할 것은 아닙니다. 그 고통을 이해해야 해요. 그렇다고 약을 끊으라고 권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어려워도 약 속에 길이 있어요. 환자들은 힘드니까 약을 꺼리죠. 그 심리에 편승해서 현대의학을 공격하고 약을 끊으라고 꼬드기는 사이비 과학, 상업 육아가 사람을 잡습니다.”

    매일 3600분의 1씩 호전된 큰딸은 ‘자신의 뇌가 왜 그랬는지 알고 싶어서’ 인지과학을 전공했다. 스물아홉 살이 된 둘째는 심리학을, 스물세 살인 막내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캐나다 생활 16년째. 훌쩍 커버린 세 딸이 아빠가 번역한 글을 보며 뉘앙스를 고쳐준다. 영어 실력도 아빠를 훌쩍 넘어버렸다. 청진기를 놓은 걸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강병철 씨는 이렇게 대답한다.

    “마흔 살이 될 때까지는 그냥 정해진 길을 열심히 갔다면 마흔 살 이후 캐나다로 가면서부터 비로소 내가 그린 삶의 지도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해요. 젊은 의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가슴 뛰는 일을 하라’는 거예요. 국내에 소개하고 싶은 책이 50권쯤 되는데 그 목록을 보면 저는 지금도 가슴이 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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