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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시론|4·19혁명 40주년에 생각한다

다시,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사학

다시,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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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선거의 해이고 낙천낙선운동이 주목을 받고 있어서 4·19와 연관시켜 그 부분을 생각해보았지만, 4월혁명 하면 떠오르는 것은 그보다는 학생운동이 아닐까 한다.

일각에서는 4월혁명기 하면 학생데모, 그리고 혼란을 연상하지만, 4월26일 이후 정치문제와 관련하여 학생데모가 빈번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학생들은 학원모리배 축출이나 신생활 운동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1961년에는 전반적으로 데모가 줄어들었는데, 학생들의 경우도 반공법과 데모규제법 제정을 반대하는 2대악법반대 등에 부분적으로 참여했고, ‘기대’와는 달리 4·19 1주년에도 침묵시위가 있었을 뿐이었다. 통일운동도 교내집회 형태로 전개됐다.

학생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199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것은 군정기의 두세 차례 시위를 제외한다면 1964년 3·24데모 이후부터였다. 그때부터 1965년 하반기까지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대규모로 격렬하게 전개됐다. 4월혁명기도 그러했지만, 이 시기 대학생들은 사회에서 상당한 대접을 받았고, 학생데모에 호의적인 반응도 있었다. 사실 이 시기의 학생운동은 낭만적인 성격이 짙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서울대 문리대의 4·19탑은 여러 모로 ‘성소’였고, 지금은 다 복개되어 없어지고 대학로로 불리지만, 미라보다리나 개천 주변에는 낭만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4월19일은 ‘수난의 날’이 되었다. 그날이 되면 대학에 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었다. 데모를 막기 위해서였다. 4·19 그날은 권력자한테는 두려움의 표상이었다.

그런데 이미 수난은 그 이전에 용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1960년 4월26일 이후에도 4·19를 사건으로 말하기도 하였고, 4월혁명기 청년·학생운동과 통일운동에 영향을 주었던 이종률은 4·26 직후 4월혁명을 3, 4월항쟁이 정확하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4·19혁명 또는 4월혁명으로 불렀다. 언론에서는 4월혁명기에 ‘혁명과업’ 또는 ‘4월혁명과업’이라는 용어를 빈번히 사용했다.



4월혁명은 쿠데타가 일어나고서 ‘의거’ 또는 ‘학생의거’로 변하였다. 쿠데타정권이 처음부터 의거라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 등 쿠데타 주동자들은 초기에 4·19혁명이라는 말을 쓰고, 또 그것과는 모순되게 ‘두 번 혁명해서는 안 된다, 우리 혁명이 마지막’이라는 말도 썼다. 그렇지만 얼마 안 있어 쿠데타만 혁명으로 부르고, 4·19를 의거로 낮추어 불렀다. 그리고는 교과서에 그렇게 사용하게 해서 ‘정착’시켰다.

‘의거’라는 말 속에는 박태순이 지적한 바와 같이 민족적 사건, 역사적 사건이란 인식이 결여돼 있고, 자연발생적이라는 뜻이 강하다. 또 ‘4·19의거’는 독재를 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짐으로써 원인 무효가 되어, 그 이후의 문제는 정치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학생들은 학업이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4월혁명 이후 1990년대까지 30여년간 학생운동이 끊이지 않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 발생했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4월혁명의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0년 3, 4월항쟁을 대학생들이 주로 펼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피의 화요일’인 4월19일에 서울에서 나이 어린 초등학생만 해도 5명이나 숨졌고, 남녀 중고생의 희생자 수가 대학생의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 실제로 4월18일 고려대생이 시위를 벌이고, 다음날 수많은 대학생이 일제히 교문을 박차고 나오기 이전까지는 2월28일 대구 고교생들의 시위로부터 시작하여 거의 대부분이 중고교생들이 한 것이었다. 그리고 4월19일에는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모두가 참여했던 것이다.

왜 3, 4월의 시위가 중고생 중심으로 전개됐는가. 여러 요인이 있지만, 중고생들이 가장 순수한 정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중고생들은 데모를 하면서 선배들은 썩었다고 외쳤는데, 3, 4월항쟁 직전만 하여도 기성세대는 말할 나위 없고, 요즘 청년과 학생들도 무기력하고 개인주의적이어서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다는 얘기를 들어오던 터였다. 이와 같이 한국은 근대세계에 들어오면서 나이 먹은 사람일수록 보수성이 강하여 계급갈등 못지않게 세대갈등이 많은 지역으로 지적되고 있다.

학생운동이 30여년간이나 지속된 것은 학생세대가 정의감이 강하기 때문에 독재권력이나 극단적인 보수성에 도전할 수 있었다는 점 외에 다른 이유도 있다. 5·16 쿠데타 권력의 철저한 정보정치와 반공통치는 혁신세력의 활동을 불가능하게 하여 학생들이 민족자주성의 문제, 통일문제, 사회문제 등 진보세력이 제기하기 마련인 문제를 발언하게 됐다는 점이 그것이다.

학생운동은 1980년대에 순수한 정의감에 이념성까지 작용하여 최고조에 달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은 2학기보다는 1학기에 고조됐다. 여기서 4월혁명 기념일은 서전을 담당했다. 4월 그날이 오면 전국의 대학가는 출정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3, 4월의 젊은 혼들이 묻혀 있는 수유리묘지 일대에서는 일대 격전이 붙었다. 5월에는 대학의 함성이 한층 높아지고, 캠퍼스와 학교 주변에는 최루탄가스 때문에 눈을 뜰 수 없는 사태가 계속됐다. ‘5월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클라이맥스에 달한 감을 주었다.

6월 민주항쟁으로 4월혁명에서 쟁취했다가 쿠데타로 실종된 자유민주주의가 다시 소생했지만, 6월 민주항쟁은 자유민주주의의 쟁취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7, 8, 9월 노동대투쟁과 다음해 초부터의 통일운동, 북한바로알기운동으로 이어졌다. 6월민주항쟁, 7, 8, 9월 노동투쟁, 통일운동은 하나의 세트였다. 그리고 그것은 4월혁명 정신의 계승과도 연결돼 있었다.

이미 4월혁명기에 4·19, 4·26은 혁명의 종말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지적했고, 5·16 이후 여러 지식인이 4월혁명은 미완의 혁명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강만길은 4·19운동에 포함돼 있던 또 하나의 민족사적 과제, 곧 그것이 민족통일운동 달성으로 연결될 때, 4·19는 어떠한 개념으로도 바꾸어놓을 수 없는 거대한 혁명운동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피력한 바 있는데, 4월혁명기에 자유민주주의의 쟁취에 이어 신생활운동, 민주노동운동이 일어나고 통일운동이 전개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쿠데타로 미완의 혁명이 되고 말았고, 1987년경에 이르러서 폭과 깊이가 달라진 형태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자유민주주의는 상당부분 외형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정치는 참담한 상황을 계속 연출하고 있다.

4·19세대와 386세대

한국정치에 출구는 보이는가. 양식을 가진 사람들은 수십년간 기회주의적 정상배로 독재의 하수인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패거리정치를 해온 부패정치인은 21세기가 시작된 이제는 사라져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낙천낙선운동의 역사적 의의도 그것에 있다. 그러면 소위 386세대는 믿음직한가.

386세대와 관련하여 떠오르는 것이 4·19세대다. 그리고 4·19세대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제기되는 것이 왜 4·19세대는 변절자가 많으냐 하는 문제다.

4·19세대의 변절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의 항변을 포함해서 이의가 적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4·19를 내세우면서 유신독재에 가담하고 신군부체제에서 한 몫 한 것을 합리화하려는 주장은 아무래도 궁색하고 측은해 보인다.

일부 연구자들은 4·19세대의 분화는 4월혁명기 활동에 직결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신생활운동과 같은 소시민적 운동을 주로 한 사람들은 대체로 체제순응의 길을 걸었고, 통일운동 등 변혁 활동을 한 사람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점도 생각해볼 수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됐다고 보기 어렵다.

이른바 4·19세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60년 3, 4월항쟁의 성격과 4월혁명기의 분위기를 알아야 한다. 4·19세대의 상당수는 학도호국단 간부였고, 자유민주주의나 민족자주정신이 내면화하지 않은 상황에 4월혁명의 분위기에 휩쓸렸다. 또 어느 운동에서나 볼 수 있는 소영웅주의자, 출세주의자들도 적지 않았다. 다른 한 편으로 오랜 세월 정치에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이 자포자기로 이끌어간 점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신동엽은 “껍데기는 가라 / 4월도 알맹이만 남고 / 껍데기는 가라”라고 노래했는데, 4·19세대의 상당수는 껍데기일 수밖에 없었다.

‘386세대’는 믿음직한가. 누구나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치계에 입문한 진보적 활동가의 행동거지가 기성 부패 정치인과 무엇이 다르냐는 비판이 최근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혼탁한 정치계에 무언가 새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했는데, 하나도 새로운 것이 없다는 지적이다. 나아가 기성정치인보다 더 약삭빠르게 현실정치에 야합하여 인기나 얻고 지위를 보장받으려는 일부 재야 입당파 정치인의 추태에 분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40년 구정치를 상징하는 인물의 행적을 찬양한 민중당 출신 인사도 있었고, 그 사람과 함께 거대 신당을 만들자는 운동권 출신 정치인도 나왔다.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막대한 세금이 들어가는데도 꿀 먹은 벙어리인가 하면, 영호남지역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당연하다고 옹호하는 강심장조차 있다.

비록 일부라고 하지만 재야 입당파 정치인들의 기회주의와 현실추수주의는 끝이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수년 동안 일부 ‘민주인사’가 민주주의를 짓밟는 사태를 목도해왔다. 무슨 짓을 하든 ‘자리’만 유지하면 되는 일일까.

1990년대에 지긋지긋하게 계속되는 야합정치로 원칙도 없고 양식도 사라진 채 정치가 표류하는 ‘예측 불가능’의 불확실성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데, 일부 ‘민주인사’들이 그런 현상을 한껏 부추기고 있다. 불확실성이란 견강부회가 횡행하고 가치관이 오도되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이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증표다.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386세대 정치인을 4·19세대 정치인과 맞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그렇지만 그들에 대한 의구심을 쉽게 떨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신동엽은 “껍데기는 가라. / 한라에서 백두까지 /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외쳤는데, 386세대가 ‘향기로운 흙가슴’으로 남을지 ‘쇠붙이’나 ‘껍데기’가 될지 지금으로서는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386세대건 다른 세대건 올바른 정치를 기원하는 사람들은 원효가 말한 초발심(初發心)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4월혁명 정신을 살려 우리의 정치를 맑게 할 수 있다. 4·19 직후 초등학교 4년생인 강명희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 엄마 아빠 아무말 안해도 /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하며 울먹이면서 노래했지만, 우리 모두는 4·19희생자들이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신동아 200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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