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정착과 신뢰구축안을 공동선언에 포함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1차 회담 때는 얘기가 나왔다가 2차 회담에서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각에선 나중에 김위원장이 서울 올 때 평화선언을 하려고 아껴둔 것 아니냐, 그런 추측도 있었는데.
“공동선언의 2항 남북연합의 기본 잣대는 결국 남북 기본합의서의 실천입니다. 그러면 기본합의서의 기본은 무엇인가, 남북 군사공동위원회에서 다룰 게 결국은 긴장완화와 신뢰구축입니다. 그래서 우리 대통령도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하자고 하면 어려움이 많으니까 그런 식으로 다 포함되는 형식으로 한 겁니다.
사실 나는 그런 내용을 공동선언에 넣는 것도 중요하지만 15일 오찬에서 임동원·조명록 두 사람이 서로 싸우지 말자고 말한 것도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실천이 돼야 하겠지만.”
―김대통령이 나중에 회담과정에서 상당히 힘들었고, 때로는 절망감도 느꼈다고 말한 부분이 바로 북측의 양보를 얻어내는 문제였습니까?
“자주의 문제, 남북연합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 문제,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 문제, 이런 걸 갖고서 ‘뭘 그걸 넣습니까’ 하는 것을 수용하도록 한 것을 두고 한 말씀이겠지.”
―아무튼 이제 남은 과제는 국보법이나 주한미군 문제 등에서 국내 보수진영을 어떻게 설득해가면서 컨센서스를 만들어 가느냐는 것일텐데, 국가보안법 문제만 해도 그것이 폐지될까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요?
“국보법 개정 문제는 노동당 규약에 나오는 남조선 적화통일이라는 북측의 기본 시각과 바로 맞물리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로 자민련 이완구 의원도 많이 고민하고 저와 많이 토론했어요. 그래서 김대통령이 ‘실천이 가능한 것부터 해나가면서 북이 변화를 보이면 사람들이 신뢰를 갖게 된다’고 계속 강조하는 겁니다. 김대통령은 바로 거기에 희망을 두고 있는 겁니다. 이산가족 문제는 날짜를 박아서 하자고 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고….
지금까지 남북관계가 왜 이랬습니까? 주한미군 철수 문제, 정전협정 문제, 이렇게 원론적인 얘기만 되풀이했기 때문 아닙니까? 여기서 내가 놀라웠던 게, 김대중 김정일과 같은 실사구시의 실용주의자는 다시 없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은 호탕한 성격이고, 다른 한 사람은 꼼꼼한 사람인데, 이런 것도 조화가 맞았겠지만, 여기에 두 사람을 엮어주면서 수렴점을 찾게 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두 사람 모두 실사구시의 실용주의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두 사람이 왜 2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만났을까요? 훨씬 전에 만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건 역사를 보면 간단히 나와요. 80년대 말부터 독일 통일,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소련 해체 등을 보면서 북한은 엄청난 위기의식을 갖게 됐어요. 그래서 무언가 해보려고 하던 차에 92년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했고, 그러다가 핵문제가 나오면서 94년에 전쟁 위기를 겪었고, 김일성 주석 사망으로 3년상을 치렀어요. 그러고나서 이제 2년이 지난 겁니다.”
―북쪽 입장에서 보면 남북 기본합의서에 서명하던 92년 상황과 지금은 다르지요. 92년에는 북한이 세계의 변화에 대해서 위기감을 느꼈던 때라면, 지금은 극단적인 경제침체 상태에서 이제 최악의 상황은 겨우 면한 상태라고 할 수 있고, 92년에는 북한이 전반적으로 불리해진 상황에 대한 국면전환 차원에서 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면, 이번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남북 기본합의서에 서명하던 당시 북한이 냉전해체 과정에서 위협을 느꼈다고 보고 있는데, 잘 보세요, 그 때 부시 미국 대통령이 남한의 전술 핵을 다 뺐습니다. 남북 기본합의서는 바로 그것에 대한 화답인 겁니다. 이게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의 지론인데, 사실 부시의 전술핵 철수가 상당히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북한이라는 상대는 우리가 뭔가를 보여주면 자기들도 반드시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동안 이런 점을 너무 간과해왔어요”
―그렇다면, 북한의 정책결정 과정에 대해서 지금까지는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이라는 견해가 많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말씀인가요?
“적어도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상당히 합리적이고, 솔직하고, 일이 성사되게 하는 방향으로 나왔으니까.”
―아무튼 북한이 정상회담의 시점으로서 왜 2000년 6월을 선택했는지, 해석이 가능할까요?
“나는 김대통령의 포용정책이 크게 작용했다고 봐요. 지속적인 포용정책이 저 쪽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봅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지난해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 학술회의에서 내가 북쪽 참석자들에게 한 얘기가 김대중 정부가 있을 때 빨리 대화하라, 북한도 평행선만 그리는 논리는 이제 버려라, 당신네가 계속 그런 식이면 남쪽에서 당신들 돕고 싶어 하는 사람들 다 등 돌린다고 얘기했었어요. 나는 그런 얘기가 북측에게 상당히 먹혔다고 나름대로 믿고 싶습니다.”
김정일은 자기 자리에 있는 술병을 들어 따라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버티려면 끝까지 버텨야지, 경희가 먹인다고 드시면 됩니까?”
황비서는 하는 수 없이 눈을 질끈 감고 입에 털어 넣었다. 놀랍게도 그 술은 맹물이었다. 그 자리에서 김정일이 맹물을 마시고 있다는 걸 아는 간부는 아무도 없었다. 김정일은 잦은 비밀 연회 등으로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를 몇차례 들었다.
”개혁·개방이란 말은 이제 그만”
―이제 화제를 좀 돌려보지요. 요즘 남북 경제협력과 관련해서 엄청나게 많은 안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북측으로서는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아무래도 경제면에서 기대하는 게 많을 텐데, 실제로 현장에서 어떤 제안이 나왔습니까?
“그렇게 많이 나온 건 아니고, 14일 저녁에 우리측 대표단이 북측 사회단체 대표들을 만났는데, 경제 분야와 비경제 분야로 나눠서 했어요. 경제 분야에서는 재벌 회장들이 많은 얘기를 했는데, 우리측이 우선적으로 제기한 것이 제도정비 문제였고 북측도 여기에 동의를 했어요. 예컨대 이중과세 방지, 투자 보장, 결제 수단 확정 등 제도적 틀을 만드는 문제입니다. 구체적인 사업으로 대표적인 것은 경의선 복선화였어요. 김위원장이 식사 중에 그 얘기를 꺼내더군요”
―종합적으로 볼 때 향후 북한의 개혁·개방 전망은 어떻습니까?
“나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봅니다. 개방·개혁을 하지 않으면 이런 모든 게 안될 테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방·개혁이라는 표현을 가급적이면 쓰지 말자는 겁니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은 이래요. 교류·협력을 하다 보면 결국 개방이 될 것이고, 다른 한편 개혁의 핵심은 제도 개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류·협력을 해서 투자가 들어가는데, 열악한 제도 때문에 못 들어가게 되면 아무 소용없는 것 아니에요? 결국 제도를 바꿀 수밖에 없지요. 중국의 덩샤오핑이 73년에 개방을 했다가 83년부터 개혁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도 그런 거였어요.
그런데 자꾸만 개혁·개방과 북한이 자유화되는 것을 얘기하니까 오히려 더 안되는 겁니다. 지금은 북한이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게 중요합니다. 교류·협력을 강화해서 개방·개혁을 해도 문제가 없고 잘될 것이다, 이런 확신을 갖게 해주자는 겁니다. 이런 식의 긍정적인 강화 전략으로 나가야지 자꾸만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보면 안됩니다. 내 생각엔 보수진영에 속하는 분들은 그런 점을 생각하시는 게 좋겠다고 봐요”
―사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사고의 틀 자체는 바꾸기가 힘들지 않겠어요?
“바뀐 상황이 사고의 틀을 바꿀 수 있지요.”
―정상회담과 관련해 앞에서 윈-윈 게임을 말하셨는데, 김위원장이나 김대통령이나 국내정치 차원에서도 윈-윈게임이 될 수 있을까요?
“대통령 말씀대로 쉬운 것, 작은 것부터 하나씩 실천해나간다면 윈-윈 게임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게 안되면 어려워지겠지요. 김대통령의 접근법은 기대를 낮추고, 실현 가능한 것부터 가시화해나가면 정치적인 지지세력을 확대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국민적 합의를 따라서 하나하나 해나가면 설령 국회에서 여당의 세력이 약하다고 해도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가까이서 보니까 김위원장의 핵심 브레인들은 어떤 사람들이던가요? 에피소드라도 있으면 소개해주시지요.
“에피소드는 얘기하지 않는 게 좋겠고, 하여튼 정중하게 우리를 환대해줬어요.”
―그들이 합리적인 대화 상대라는 느낌이 들던가요?
“물론이지요. 그런데 저 쪽 체제는 기본적으로 지도자가 결정하면 다 되는 겁니다. 총론만 잡히면 각론은 다 따라가게 돼 있어요.”
―그런 게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최고 지도자가 결정하면 나머지는 일사불란하게 따라간다는 식의 비민주적인 시스템이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니….
“사실 현실세계에서 보편적인 합리라는 것은 참 찾아보기 힘들어요. 주어진 상황에서 효율을 극대화시키는 게 합리성의 기본이라면, 북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기 이익을 최대화하는 데에 합리성이 있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저쪽의 유일지도 체제의 합리성과 우리 다원주의 체제의 합리성이 반드시 같을 수는 없어요. 상호 이득이 되는 윈-윈 게임으로 서로 얻을 게 많다면 큰 변화가 나올 수 있는 거지요. 이번 정상회담의 의미는 거기에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인의 정서와 민족주의
―앞서 오찬장의 분위기를 말씀하셨지만, 외국 사람들이 볼 때에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남북한간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한국 민족주의, 나쁜 의미에서의 민족주의가 고조되는 게 아니냐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볼 가능성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만약 남북이 화해·협력과정에서 ‘닫힌 민족주의’를 추구한다면 물론 걱정스럽겠지요. 그러나 이번 일은 분단 55년만에 만난 한 민족으로서 인지상정,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것을 폐쇄된 민족주의로 비하하는 것도 문제가 있어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고 봅니다. 민족주의라기보다는 그냥 ‘만남의 감격’이라고 하는 게 훨씬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또, 손님을 지극 정성으로 접대한다는 동양문화, 거기에 감격한 쪽은 감사를 표하는 것이고…. 이런 게 한국의 문화적인 특성 아닙니까? 어떤 면에서는 자주적인 통일이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주시죠.
“첫 날 공항에 도착할 때 김정일 위원장이 나타난 것.”
―우리 정부에서는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했지요?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로 올지는 모르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김대통령에게도 ‘저 쪽에서 나올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유보적으로 보고한 겁니다. 나온다고 했다가 만약 나오지 않으면 누가 그걸 책임질 겁니까? 아무튼 그때 김정일 위원장의 공항영접으로 깜짝 놀랐어요.
또 한 가지는 15일 오찬때 남북의 최고 안보책임자가 나와서 앞으론 싸우지 말자고 연설한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정상회담 전에 북측과 계속 조율이 있었겠지요? 어느 정도 큰 틀은 합의해 놓고서 평양에 간 것 아닙니까?
“내가 듣기로 그건 아니에요.”
―모든 합의를 현장에서 다 만들어낸 겁니까?
“협상과정에서 북쪽이 왜 의제를 사전에 정하지 말자고 나왔느냐, 그건 김정일 위원장에게 ‘이거 하십시오’ ‘저건 안됩니다’ 이렇게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걸 받아들인 게 이번 회담이 성공한 비결입니다. 우리 식대로 사전에 다 정해놓고 정상회담을 했더라면 이산가족 문제와 경협문제 정도로 그치고 말았을 겁니다.”
―지금 분위기로는 김정일 위원장이 서울에 올 가능성이 크지요?
“아, 공동선언에 기재돼 있는데….”
―문교수께서도 개인적으로 평생 남을 경험을 하신 겁니다?
“이번에 평양에서 나와 세종연구소 이종석 박사가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했어요. 아마 평양에서 생중계로 대담한 첫 케이스일 겁니다.”
시계를 보니 시침은 새벽 3시에 거의 도달해 있다. 더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이젠 인터뷰를 끝내야 한다. 주섬주섬 녹음기를 챙겨 일어나는데 문교수가 계속 말했다.
“15일 오찬 때 정말 굉장했어요. 김위원장이 박지원 문광부 장관을 지목해서 노래를 청했는데 박장관, 노래 정말 잘하시데…. 앵콜이 나와서 박장관이 또 한 곡을 부르고, 김정일 위원장 주변에서는 술잔들이 마구 돌아가고, 000사장은 술도 못하시는 양반이 몇 잔 드시고서 얼굴이 불그레해져서 앉아 계시고, 다같이 일어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는데…”
그에겐 남북이 함께 어울렸던 그 날 낮의 흥분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 하긴,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중 누군들 그러지 않으랴. 그 열정이 남북을 진정한 화해로 이끌고 통일로 나아가는 기관차의 원동력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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