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10일,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지난 3일 민주당 정세분석국이 비공개로 실시한 전화여론조사 결과가 언론에 공개된 것이다. 이 여론조사는 지난 7일 최고위원 워크숍에서 참석자들에게만 나눠준 보고서의 일부분에 포함돼 있었다.
조사를 진행한 실무자와 정세분석국에서는 “철저히 보안을 유지했으므로 우리 쪽에서 보고서가 새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워크숍에 참석해 자료를 회람하고 이를 가져간 일부 최고위원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런데 일반인의 주목을 끈 것은 여론조사 내용이었다. 조사결과 차기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응답자 37.9%, 이에 반해 민주당 후보의 지지율은 22.3%. 당선 가능성에서도 민주당 후보가 16.9%인 데 반해 한나라당 후보는 42.2%로 두 배 이상 높게 나타났다. 이 밖에도 조사결과 한나라당 지지자라고 밝힌 응답자의 74.2%가 한나라당의 승리를 점친 반면, 민주당 후보 지지자의 47.1%만이 민주당의 승리를 예측한 것으로 나타났다.
너무 참담한 여론조사 결과에 워크숍에 참석한 최고위원들은 말을 잊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최고위원들은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민주당의 앞날에 대해, 자신들의 앞날에 대해 격렬한 토론을 전개했다. 토론은 무려 4시간 동안 진행됐는데 참석자들은 ‘개혁 마무리론’ ‘작전타임론’ 등 그날 이후 며칠간 정가에 화제가 될 만한 말들을 쏟아냈다.
최고위원들의 자기반성
“큰 방향에서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모든 문제를 대통령에게 넘기고 피동적으로 있지 않았나 반성할 필요가 있다.”(김원기 최고위원)
“남북간만이 아니라 여야간 햇볕정책도 필요하다. 정책도 중요하지만 대통령이 화해와 용서의 대통령으로, 큰 정치를 이룬 대통령으로 남도록 해야 한다. 민심이 좋지 않은 원인 중 하나가 정권의 정체성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사진도 나왔듯이, 총리를 포함한 여권 지도부가 모두 구여권 출신이라 민심이 좋지 않다. 청와대와 정부·정당이 서로 협조하는 종합적인 시스템에 의해 국정이 운영돼야 한다.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대통령에게 집중되고 책임 또한 대통령에게 집중된다.”(정대철 최고위원)
“최고위원 개개인이 공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과 같이 가야 한다. 3년간 우리가 해온 일을 면밀히 평가하고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이제 개혁이란 단어를 쓰지 말고, ‘변화’ 등으로 바꾸었으면 좋겠다. 국민의 정부가 너무 전선(戰線)을 확대하다 보니 학계·법조계·언론계 등이 모두 등을 돌리는 상황이 됐다. 지금은 더 이상 일을 벌일 때가 아니라 그 동안 추진해 온 개혁작업들, 예컨대 교육·의료·언론 등을 잘 정리해야 하고, 그래야만 이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한화갑 최고위원)
“국정의 큰 방향은 옳지만, 시스템과 스타일에서 문제가 없었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일을 벌이기보다 현재 추진하고 있는 정책을 철저하고 완벽하게 매듭 지어야 한다. 지금의 시스템으로는 사실상 종합적 판단이 어렵다. 실업문제만 하더라도 3D 업종에는 10만 명의 일손이 부족한데 실업자는 100만명이 넘는 구조다. 이를 통합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논의가 있어야 한다.”(김근태 최고위원)
“대통령에게 시중 민심이 제대로 전달되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은 분위기를 바꿀 때로, ‘작전 타임’을 불러 정국의 흐름을 한번 차단하고, 작전을 바꾸든지 멤버를 바꾸든지, 하여튼 흐름을 바꾸어야 한다.”(김기재 최고위원)
“인사 면에서 적재적소 원칙이 지켜졌는지 짚어봐야 한다. 개혁과정에서 민주세력은 물론 합리적 보수세력의 지지도 함께 얻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민심이 흐트러진 것은 경제·의료보험·교육 등 세 가지 문제 때문이며, 특히 건강보험 문제는 재정대책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국민의 불편을 해소하는 방안들이 필요하다.”(박상천 최고위원)
“경제 문제는 제때 결단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국민이 불안해하고 있다. 새만금사업이나 대우차, 한보철강 문제 등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흘러가고 있다. 관료들은 위험부담을 안지 않으려는 속성이 있다. 당에서 정부측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결단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요구해야 한다.”(이인제 최고위원)
판이 벌어졌으니 말들이 쏟아진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민주당을 침울하게 하는 여론조사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 4·26 지방 재보궐 선거는 민주당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당시 민주당은 “투표율이 낮아 민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선거”였다고 자평했지만, 실제로는 청와대와 정보기관 등이 나서 은밀하게 사후 여론조사작업을 벌였다. 그런데 청와대와 국정원 등 다른 곳에서 실시한 조사결과도 정세분석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대통령 지지도 21%
여권의 한 소식통은 “4·26 지방선거 재보선 직후 실시한 국정원 여론조사 결과, 김대중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평가를 묻는 항목에 응답자의 21%만이 긍정적 반응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는 그전에 실시한 ‘한겨레’의 조사결과 17%보다는 높은 수치지만 대통령이 국민의 신임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수치였다”고 말했다.
최근 1년 사이 김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가 가장 높았던 시기는 지난해 6∼7월. 조사기관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김대통령이 국정수행을 잘하고 있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60% 이상에 달했다. 당시의 최대 이슈는 남북정상회담이었다.
결국 김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1년 사이 3분의 1로 줄어든 셈이다. 물론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최근, 정권차원의 악재가 겹친 것도 사실이다. 국민건강보험 재정 고갈, 교육문제와 대우자동차 폭력진압, 각종 개혁입법 지연, 그리고 지방 재·보궐선거 참패 등 최근 한두 달 사이 대통령의 지지도를 끌어올릴 만한 재료는 거의 없었다. 그렇더라도 20%를 밑도는 지지율은 여권 인사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최근 여권 핵심부에서는 돌아선 민심을 다잡기 위한 노력들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정보원은 5월 들어 전 부서 차원에서 민심수습 아이디어를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아이디어는 5월 안으로 문서로 정리해 상부에 보고할 예정이며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참고자료로 활용될 계획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부서보다 은밀하면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곳은 청와대 비서실이다. 특히 박지원(朴智元)수석을 중심으로 한 정책기획수석실의 움직임이 정가의 주목을 끌고 있다. 김대통령의 신임이 깊은 박수석인 만큼 그의 청와대 복귀 이후 김대통령의 정국운영에도 중대한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 관측이었다.
박수석의 평소 언행으로 보아 지금 같은 정권차원의 위기상황에 손을 놓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취임 초기 기자들을 전혀 만나지 않던 박수석이지만 최근 들어 굳이 찾아오는 사람을 거부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박수석과 정책기획수석실을 ‘현정권의 컨트롤 타워’라는 묘한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
여권 주변에서는 김대통령의 임기 말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한 강력하고도 구체적인 정국운용 보고서가 여권 핵심부에서 만들어져 대통령에게 보고됐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보고서는 철저한 민심탐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선언적 의미의 기존 보고서와 달리 상당히 구체적인 전술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격적인 프로그램’이 담긴 보고서라면 컨트롤 타워인 정책기획수석실이 그 출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정가의 중론이었다. 그러나 정책기획수석실 관계자들은 보고서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캐물으면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어버렸다. 한 관계자는 “물어보면 우리가 파악하는 민심에 대해 얘기는 해줄 수 있지만 보고서 같은 것은 없다”고 말했다.
지난 14일 박지원 수석을 찾아가 직접 그 핵심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박수석은 첫마디에 “나는 말을 안 하는 사람”이라고 거리를 뒀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현정권의 지지가 이렇게까지 하락한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박수석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외국 언론들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국내 언론들은 독재정권의 서슬에 눌려 비판도 못한 채 정권을 칭찬하고 있을 때, 외국 언론들은 정권을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국민의 정부 들어 상황이 반대가 됐습니다. 외국언론은 우리 대통령을 칭찬하는데 국내 언론은 지나칠 정도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 하고 못한 것은 못했다고 비판해야 하는데, 우리 언론은 잘한 것은 말하지 않고 못한 것만 부각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국민에게 알리면 되지 않느냐”고 묻자 박수석은 “언론이 그런 장을 어디 마련해 줍니까?”라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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