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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현지르포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주경로 답사기

“12개 도시의 여관, 빈민촌 전전했지만 임정은 성공한 정부”

  • 글: 조창완 중국 전문 프리랜서 chogaci@hitel.net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주경로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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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서 충칭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주경로 답사기

자싱 난후의 배

김구 선생의 가장 중요한 자싱 유적은 메이완졔(梅灣街) 76호와 르후이차오(日暉橋) 17호다. 청나라 말기 일반 백성들의 민가였던 두 곳은 서로 200m 가량 떨어져 있는데, 최근 메이완졔에선 대대적인 재개발 공사가 시작되었다. 필자가 그곳에 들렀을 때, 1996년 8월 수리 복원된 김구 선생의 집터도 모든 전시물이 치워진 채 헐릴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의 집들이 대부분 헐려 마지막 모습이라도 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자싱시는 메이완졔 일대를 저우주왕이나 통리와 같은 관광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재개발을 추진중이었다.

김구 선생은 메이완졔 한 집에서 보낼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일본의 수사망이 자싱으로 뻗쳐왔기 때문이다. 얼마 후 김구 선생은 하이옌(海鹽)의 재청별서(載靑別墅)로 피신한다. 하이옌의 양대 가문 중 하나인 저우(朱)씨의 별장인 재청별서는 빼어난 휴양지인 난베이후(南北湖)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하이옌은 중국 현대 출판계의 거장 장위안지(張元濟)의 고향으로 그의 도서관이 있는 곳인데, 난베이후는 산과 바다, 호수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고, 현대식 휴양시설이 갖추어진 곳이다.

자싱에서 하이옌으로 가는 길은 우리나라의 농촌 풍경과 흡사하다. 최근 도로들이 급속히 정비되고 있는데, 작은 길 양옆에 늘어선 낙엽송의 자태가 아름다운 곳이다. 하이옌에서 난베이후에 도착하기 직전에는 제법 높은 산이 있다. 김구 선생은 그 길을 걸으면서 훗날 그 길을 카메라에 담아서 전하고 싶다는 소회를 ‘백범일지’에 밝히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재청별서의 한쪽에 김구선생의 행적을 기념하는 김구기념관을 만들어놓았다. 우리 돈 1억원 가량을 들여 1996년 준공한 이 기념관은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너무 외진 곳에 있어 찾는 이가 많지 않는 다고 한다.



재청별서는 도시와 떨어져 있어서 임시정부를 책임져야 할 김구 선생에게 오랜 휴식처는 되지 못했고 결국 다시 자싱으로 돌아왔다. 김구 선생은 여기서 우리보다 진보된 농기구를 보고,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朱喜) 학설 같은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 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원래의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라며 통탄했다.

김구 선생, 중국여성과 선상동거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주경로 답사기

자싱에 있는 임시정부 유적지 메이완졔

자싱에서의 생활은 불안의 연속이었는데, 김구 선생은 여성 뱃사공인 주아이바오(朱愛寶)와 선상생활을 했다. 낮에는 땅 위에서 활동하지만 밤에는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배 위에서 사는 생활이었다. 이런 선상생활은 1924년 최준례 여사의 영면으로 외로웠던 김구 선생에게 안정감을 주었다고 한다. 베트남 혁명의 지주인 호치민 역시 광둥 시절 중국인 여성과 같이 산 경험이 있었다.

자싱의 난후는 중국 공산당이 상하이에서 피신해 배 위에서 회의를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난후의 중간에는 작은 섬이 있는데, 이곳에 옌위러우(烟雨樓)가 있다. 중국 공산당에게는 가장 역사적인 장소인 만큼 섬의 한단에는 회의가 열렸던 모양의 배가 복원되어 있고, 섬으로 연결되는 나루 옆에는 혁명기념관이 있다. ‘백범일지’에는 김구 선생이 옌위러우를 비롯해 삼탑(三塔) 등을 구경했다는 기록이 있다.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 선생은 개인적으로 움직였고, 임시정부는 다양한 방편으로 투쟁을 계속해야 했다. 1932년 5월10일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이었던 김철이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 칭타이(淸泰) 제 2여사(현재 항저우 위산(吳山)로 췬잉(群營) 여관) 32호에 임시정부 사무실을 개설함으로써 항저우 시대를 준비하게 된다.

항저우는 진시황이 도시로 만든 이후 남송 시대에는 수도였던 고도다. 하지만 근대 이후에는 그다지 행복한 기억을 갖지 못했다. 19세기에 태평천국군(太平天國軍)의 싸움으로 파괴되었고, 난징조약(南京條約)에 의해 상하이가 개항되자 항구로서의 번영을 상하이에 빼앗겼다.

1932년 5월14일 김구, 이동녕, 조완구, 조소앙 등 임정 주요인사가 항저우에 모여 향후 활동계획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중국측이 임시정부에 제공한 지원금의 처리를 놓고 갈등이 벌어졌다. 이 일로 김구 선생과 이동녕은 인사도 없이 자싱으로 돌아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1년 동안 항저우에 자리한 임시정부는 유명무실한 상태가 됐다. 1933년 양기택 등이 김구 선생의 복귀를 유도했지만 선생은 자싱에서 두문불출하면서 비밀리에 임시정부 내의 통일을 유도했다.

췬잉으로 이름을 바꾼 칭타이 여관은 현재도 여관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100여 개의 객실을 갖춘 이 여관은 카운터를 지나면 하늘이 내다보이는 화단에 파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면서 1층 방은 100번대, 2층 방은 200번대의 번호로 바뀌었는데, 당시 32호는 지금 150번대 위치라고 관리인이 말해주었지만 아무런 표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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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창완 중국 전문 프리랜서 chogaci@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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