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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김승호의 약초 이야기 ⑮

어혈 풀고 굳은 것 깨뜨리다

장자의 나무 옻

어혈 풀고 굳은 것 깨뜨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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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혈  풀고 굳은 것 깨뜨리다

충북 단양군 가곡면 말금마을 `옻나무 샘`. 수령 90이 넘은 옻나무가 옆에 서 있다. 샘물이 몸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다.

‘경전의 숲’ 모임 시즌 1이 끝났다. 시즌 1에는 ‘장자(莊子)’내편을 읽었다. 시골 목사, 방송국 PD, 치과 의사, 혈액 암 전공 의대 교수와 개원 한의사 등 7명이 모여 각자의 분량을 맡아서 원문을 강독했다. 다들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고 자기 몫의 삶이 바쁘고 힘들다. 그런데도 끄떡없이 해냈으니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시중에 나온 번역본들을 참조해서 지난겨울부터 매주 월요일 저녁 우리 한의원에 모여 공부한 끝에 거의 반 년이 걸려 끝났다. 이렇게 일부를 독해만 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이를 번역해 꼼꼼히 각주를 달고 해설하신 분들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장자의 국내 번역본과 해설서는 거의 다 참조했는데, 개인적으로 캐나다 리자이나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가르치시는 오강남 교수의 번역과 해설이 단연 돋보였다. 신학을 하셔서 그러리라. 통찰의 깊이가 있다.

장자에 의하면 선택의 여지없이 특정한 국가체제에 태어나서 사는 동안 먹고살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노심초사해야 하는 일들이 모두 ‘부득이(不得已)’한 일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 세간(世間)에서 사는 일 모두가 부득이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속에서 이로운 것만 취하려 하고 이롭지 못한 것은 피하려 하니 괴롭고 고통스럽다.

옻 관리였던 장자

하지만 저것은 이래서 나에게 좋고 이것은 그러지 못해 나쁘다는 따위의 분별심만 거둔다면 사뭇 달라진다. 나와 타자(他者) 모두에게 두렵고 힘든 세상의 뭇 파도가 남태평양의 짙푸른 해변에서 서핑이라도 하듯 올라탈 만한 일이 된다. 그것이 내편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장자의 ‘승물이유심(乘物而遊心)’이다. 누구나 어쩔 수 없이 파도(物)를 탄다. 부득이한 일이 아닌가. 그 파도에 대한 분별을 버리고 파도의 흐름을 타고 마음을 자유롭게 노닐도록 하라는 것이다.



필자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불안과 절망의 시대를 살았던 장자의 얘기다. 크다 작다, 좋다 싫다, 쉽다 어렵다, 있다 없다 하는 분별을 여의면 된다. 왜 인간은 이것을 못하는가. 왜 파도에 호오(好惡)가 있는가. 일미(一味) 아닌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들에 대한 그의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 ‘인간세’에 나오는 글 한토막이다. 마치 선시(禪詩) 같다.

“저 빈 것을 보라(瞻彼·#53462;者). 텅 빈 방이 뿜어내는 흰 빛(虛室生白). 행복은 분별을 여읜 고요함에 머무르는 것(吉祥止止). 머무르지 못하면 몸은 앉아 있어도 마음은 달리는 것이니라(夫且不止 是之謂坐馳).”

나를 잊는 좌망(坐忘)과 마음을 굶기는 심재(心齋)를 말하던 장자도 역시 세간에서 먹고살아야 했으므로 부득이하게 직업을 가졌다. ‘칠원리(漆園吏)’라는 관직이다. 하는 일이 우습게도 옻나무 밭을 관리하는 거였다. 그런데 장자의 시대에는 생각 외로 이 칠원리가 상당한 직책이었다. 기원전 4세기 장자가 살았던 중국의 전국시대에는 옻나무 밭, 곧 칠원(漆園)을 나라에서 직접 관리했다. 왜냐하면 먹이 발명되기 전에는 옻칠이 왕실이나 관청에서 문서를 작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옻이 없으면 문서를 만들 수 없었다. 당시엔 죽간(竹簡)이나 갑골에 이 옻칠액으로 글을 썼는데, 죽정(竹挺)이라는 대나무로 만든 펜으로 옻나무 액을 찍어 썼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문서를 죽간칠서(竹簡漆書)라고 한다. 공자나 맹자 시대의 문서 대부분이 죽간칠서였다. 국가 행정에서 문서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감안하면 옻의 안정적인 조달은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칠원리가 옻나무 밭을 잘못 관리하면 일국의 행정이 큰 차질을 빚게 되므로 자칫 잘못하면 그 책임을 지고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벌도 받았다.

어혈  풀고 굳은 것 깨뜨리다

노장사상의 태두인 장자는 옻나무 밭을 관리하는 ‘칠원리(漆園吏)’였다.

옻나무가 그냥 내버려두어도 아무 데서나 잘 크고 쉽게 죽지 않는 나무였으면 굳이 나라에서 옻나무 밭을 만들어 관리할 것까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옻은 생육조건이 무척 까다롭다. 다른 나무보다 씨앗의 발아율이 낮아서 번식시키기 어렵다. 또 씨앗이 발아한 후 잔뿌리가 제자리를 잡는 데 3년 정도가 걸린다. 잘 자라지 못하고 죽는 게 많다는 얘기다. 그러니 옻액에 대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선 옻나무 밭을 두고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옻나무 씨앗의 발아율을 높이기 위해 씨앗을 짚불에 살짝 볶아서 심기도 했는데, 그렇게 하면 자연 상태에서보다 발아율이 높아진다고 한다. 이런 방법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 홍만선의 ‘산림경제’에도 실려 있다. 아무튼 옻나무는 관리를 잘해야 했다.

장자가 칠원리 직책을 얼마나 유지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 길이 없다. 장자가 죽은 뒤 200년쯤 뒤에 쓴 사마천의 ‘사기(史記)’ 장주열전에 초나라 위왕(魏王)이 사자를 보내 재상이 돼주기를 청했으나 가볍게 거절했다는 것으로 보아 옻나무 밭을 계속 지키며 지내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아무튼 그는 극히 궁핍한 생활을 했으나 부귀와 영화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잡편의 열어구(列禦寇)에는 그런 장자의 모습이 잠깐 비친다. 그 앞에서 자신의 영달을 뽐내는 조상(曺商)이라는 세객(說客)에게 장자는 “세상의 부귀는 권력자의 항문에 난 치질을 빨아 얻은 것과 같다”고 일갈한다. 언젠가는 다 떨어진 신발에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위왕을 만났다. 위왕이 “선생은 왜 그리 지쳐보이는가”하고 비웃자, 장자는 “지친 것이 아니라 단지 가난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지금같이 어리석은 군주와 못난 신하가 있는 곳에서는 어느 누가 병들고 지치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가 있겠는가”라며 한마디 덧붙인다. 가난과 궁핍이라는 파도를 타고도 자유로웠다.

우리나라 역시 왕실에서 많은 양의 옻을 필요로 해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옻나무 심기를 권장한 기록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칠기를 비롯해 가구, 제기, 병기, 미술공예품 등 고급스러운 생활용품의 제작에 옻은 필수적이었다. 흔히 무언가를 표면에 바를 때 칠을 한다고 하는데 옻나무를 가리키는 칠(漆)에서 나왔다. 옻칠에 대한 수요가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게 하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도 옻 생산을 독려했는데 관청에서 무리하게 징수하는 통에 백성의 원성을 사는 일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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