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호

열과 조(燥) 다스려 오장의 맥(脈) 살린다

억척의 생명력 맥문동(麥門冬)

  • 입력2012-07-20 11: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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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과 조(燥) 다스려 오장의 맥(脈) 살린다

    연보라색 꽃을 피우는 맥문동.

    부추나 꽃무릇(석산)의 잎처럼 생긴 길쭉한 잎사귀가 사철 무성하다. 언뜻 보면 춘란(春蘭)으로 착각한다. 겨울에도 좀처럼 시들지 않고 푸르고, 웬만한 환경에서도 잘 자란다. 바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맥문동(麥門冬)에 관한 얘기다. 추위를 잘 이기는 보리를 닮았다 해서 이름 붙여졌는데 알뿌리의 모양이 보리알과 비슷해 그렇다는 설도 있다. 그냥 맥동(麥冬)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의약서 ‘향약구급방’에는 동사이(冬沙伊)라고 기록돼 있다. 동사이는 겨울에도 푸르른 겨우살이를 한자로 음차한 말이다. 동의보감에는 우리말로 ‘겨으사리불휘’라고 적고 있고, 중국에선 부추(?)를 닮았다는 뜻으로 오구, 마구, 우구라 했다. 좀 난데없지만 불사의 영약이란 의미로 불사초(不死草)라고도 하고, 돌계단 주변에 많이 심어서 계전초(階前草)라는 이명(異名)도 있다.

    야생의 맥문동은 우리나라 전국의 산야에 많다. 요새는 지자체에서 도심의 도로 주변이나 공원의 공터, 관광지에 정말 많이 심어 놨다. 조경용으로 적당한 지피식물(地被植物·잔디처럼 낮게 자라 지표를 덮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산의 등산로 주변에도 굳이 잡목들을 베어버리고는 이 맥문동을 지피용으로 심은 곳도 많다. 그래서 아무리 조경이라지만 정도가 심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맥문동은 그늘에서도 무리지어 잘 자라며 가뭄과 추위를 잘 견딘다. 예부터 뜰의 가장자리나 마당의 길섶에 많이 심었다.

    불사초로 불린 까닭

    잎사귀도 그렇지만 연보라색의 물결을 이루는 꽃들이 더 볼만하다. 무성한 잎들 사이 길게 꽃자루가 올라와 6~8월경에 총상꽃차례로 꽃이 핀다. 시골에 가보면 장독대가 있는 뜨락과 정원 한쪽의 이끼 낀 돌들 사이에 맥문동을 무더기로 심은 집이 더러 있다. 그늘진 마루에 앉아서 꽃들을 보고 있으면 자줏빛 주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한여름 무더위로 상한 기운이 적이 안정된다. 전남 구례의 유서 깊은 한옥 곡전재(穀田齋) 같은 곳에서 그런 소슬한 풍경을 누릴 수 있다.



    맥문동 열매는 푸른 구슬같이 꽃자루에 둥글둥글 맺혔다가 가을이 되면 검은색으로 익는다. 겨울까지 붙어 있는 흑구슬 같은 열매를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약재로 쓰는 것은 뿌리와 줄기 부분이다. 약재로 쓰기 위해선 2년 이상 자란 맥문동을 꽃이 피기 전인 봄철에 캐야 한다. 알뿌리의 씨알이 굵기 때문이다. 수북한 수염뿌리 끝에 송골송골 매달린 흰색의 알뿌리를 채취해 맑은 물에 담그고 불린 다음 가운데에 박힌 심을 빼고(去心) 말려서 쓴다. 거심하지 않고 써야 더 좋다는 말도 있다. 꽃은 자주색이 흔하지만, 흰색으로 피는 소엽 맥문동도 있다. 잎사귀에 흰 줄무늬가 있는 것 등 관상용 변종이 좀 있다.

    맥문동에는 진나라 시황과 얽힌 이야기가 전해온다. 진시황에게 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왔는데 부추 잎과 비슷하게 생긴 풀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기이하게 여긴 시황이 방술에 능한 귀곡자(鬼谷子)에게 물었다. “기이하다. 그 새가 물고 있는 풀잎이 무엇인가?” 귀곡자가 대답했다. “불사초의 잎입니다. 죽은 사람을 그 풀잎으로 덮어두면 사흘 안에 살아납니다. 동해에 있는 삼신산(三神山) 중 영주에서 납니다.” 진시황은 귀곡자의 말을 듣고 기뻐해 방사 서복(徐福)의 무리를 바다로 보내 찾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불사초를 구해 돌아오지 못했다. 시황은 마지막까지 불사약을 찾아 모산과 낭야, 동해 등지를 순행했지만 미처 수도인 함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하북의 사구에서 객사했다.

    방사들의 말을 너무 믿은 진시황을 상대로 귀곡자가 희대의 사기극을 벌였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귀곡자도 정말 불사초가 있다고 믿고 있었던 걸까. 후세의 사람들은 항간의 약초들 중에서 이 불사초를 추정하다 이파리가 부추 잎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맥문동을 불사초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더 허망하다. 산과 들, 집 주변, 도처에 흔해빠진 게 맥문동인데. 귀곡자가 진시황과 방사들을 제대로 골탕 먹였다는 얘기가 된다.

    동해 삼신산까지 서복의 무리를 애써 보낼 필요도 없었다. 어쨌든 본초강목을 비롯한 옛 의서에는 맥문동을 불사초라고 굳이 적고 있다. 생각하건대 맥문동에 불사의 효능이 있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만물이 얼어붙는 겨울에도 잎이 죽지 않고 푸른 까닭에 그 생명력을 기려서 불사초라고 하지 않았을까.

    자음청열(滋陰淸熱)의 약재

    사실 맥문동은 그 억척스러운 생명력으로 따지면 불사초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예를 들어 맥문동의 알뿌리를 수확하고는 포기를 쭉쭉 갈라서 흙바닥에 그 뿌리를 아무렇게나 던져놔도 좀처럼 죽지 않고 잘 살아난다. 들판의 어느 잡초보다도 더 강인하다. 그늘진 곳에서 잘 자라지만 양지에서도 잘 산다. 매연이 많은 척박한 도로 주변에서도 끄떡없이 사계절 푸릇푸릇하다. 억척스러울 만큼 힘이 좋은 풀이다. 그러고 보니 믿을 것은 아니지만, 혹시 그 약효에도 그런 힘이 있는 것은 아닐까. ‘동의보감’에 나타난 맥문동의 효능은 이렇다.

    ‘성질은 약간 차다. 맛이 달고 윤택하다. 독이 없다. 심장을 보하고 폐를 맑게 한다. 정신을 진정시키며 맥기(脈氣)를 안정시킨다. 허로(虛勞·기혈이 손상되어 나타나는 빈혈이나 신경쇠약 등 만성적인 소모성 질환)로 인해 열이 나고 입이 마르고 갈증이 나는 것을 다스린다. 폐위(肺·#54291;·폐의 열로 인해 체액이 소모되어 생기는 병)로 피부와 털이 거칠어지고, 가쁘게 기침하고 숨찬 증상, 열독(熱毒)으로 인해 몸이 검어지고 눈이 누렇게 변한 것을 치료한다.’

    허로나 폐위, 열독은 열(熱)과 조(燥)의 증상이다. 열은 알겠는데 조(燥)는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진액, 오장(五臟)의 체액이 모두 고갈돼 부족해진 상태를 가리킨다. 조가 먼저고 열이 뒤따른다. 자동차로 말하면 엔진은 돌아가는데 엔진오일이 부족한 상황이다. 오일이 떨어져 냉각과 세정, 윤활작용을 못하면 발열이 심해진다. 결국 엔진이 눌어붙는다. 인체도 거의 비슷하다. 사람의 몸도 오일과 같은 진액이 부족해지면 열이 난다. 그래서 입 안이 마르고 갈증이 나고, 피모(皮毛)가 거칠어지고 살과 근육이 위축되며 몸이 기름지지 못하고 마른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어서 엔진이 눌어붙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지만, 어쨌든 전조 증상이 나타난다. 심화(心火)로 인한 불면증, 위열로 인한 위장장애(식욕감퇴, 팽만감 등), 맥기(脈氣)가 안정되지 못해 심장이 제멋대로 뛰는 부정맥 같은 증상 등이다. 열과 조로 인해 몸의 기운이 쉽게 소모되는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살이 잘 찌지 않는 이들은 일견 단단해 보이긴 한다. 그러나 당장에 큰 병이 없더라도 그의 몸은, 사실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잘 처리 못해 심장이 늘 불안하다. 오일이 바닥난 자동차 엔진이 툴툴거리기 시작하듯, 진액이 부족하면 조만간 이런 증상들이 찾아든다.

    신경쇠약, 당뇨, 고혈압, 면역계의 이상과 호르몬의 대사장애를 비롯한 현대인의 만성적인 각종 소모성 질환도 그 범주 안에 든다. 물론 현대문명의 산물인 부적절한 먹을거리와 공해환경, 화학적 의약품 등으로 몸이 혼탁해진 까닭도 있다. 그러나 밤낮을 모르고 에너지를 퍼내 쓰고 과도한 스트레스 환경에서 지나치게 심기(心氣)를 억누르고 소모해도 그런 증상이 찾아온다. 오장이 조한 상태에 있는데 그 기능을 지나치게 항진시킨 결과다.

    그렇다면 열과 조를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너무 차지 않은, 미량(微凉)한 물로 열을 식히고 눅진눅진한 진액성 물질을 보충해 오장이 안정되게 해줘야 한다. 맥문동은 성질이 조금 차고 맛이 달고 질이 윤택하다. 미량하면서도 진액이 풍부하다. 그래서 오장의 음(陰)인 체액을 보태고, 심장과 폐와 위장의 열(煩熱)을 맑게 한다. 이렇게 자음청열(滋陰淸熱)하는 약재로는 맥문동을 따라갈 만한 것이 없다.

    중국 도홍경의 ‘명의별록’에는 맥문동이 ‘마른 몸을 살찌고 건장하게 하며(令人肥健), 얼굴색을 좋게 한다(美顔色)’고 적고 있다. 모두 열과 조로 인해 내부의 진액이 마른 증상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몇 마디 더 옮기면 이렇다.

    ‘족위(足·#54291;)로 종아리 근육이 마르고 힘이 빠져 불구가 되는 것을 다스린다. 위열(胃熱)이 심해 자주 허기지는 증상을 다스린다. 음정(陰精)을 보익해 정신을 진정시키고 폐의 기운을 안정시키며 오장을 편안히 한다.’

    폐 윤택, 심장 안정

    감기에 걸려 양방의원에서 한 달 가까이 감기약을 먹은 환자 이야기를 해보자. 독한 양약을 계속 먹었지만 차도가 없다. 기침만 더 심해졌다. 한번 발작적으로 기침을 하기 시작하면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될 때까지 해댄다. 이로 인해 온몸이 결리고 가슴과 허리와 등짝이 꿈쩍을 못하게 아프다. 구역질을 하고 토하기도 하지만 가래가 많지는 않다. 야간에 더 심해 잠을 자다 느닷없이 기침을 하느라 숙면을 취할 수가 없다. 여기서 그냥 내버려두면 결국엔 병원으로 가서 갖가지 겁나는 질병 명을 달고 치료를 받다가 제풀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될 것이 분명하다.

    맥문동탕(麥門冬湯) 열 첩에 기침이 잡혔다. 맥문동탕은 맥문동이 군주와 같은 역할을 하는 군약(君藥)으로 쓰인다. 반하(끼무릇), 인삼, 감초, 대추 등이 신하가 되어 맥문동을 보좌한다. 폐의 진액이 말라 해수(咳嗽)가 심해질 때, 특히 백약(百藥)이 무효일 때, 맥문동탕은 드라마틱한 효과를 낸다. 실제 주위를 보면 이런 환자가 꽤 많다. 아마도 진해제로 염산트리메토퀴놀, 염산슈도에페드린 따위를 과다하게 쓴 탓이리라. 감기를 고친다는 약이 오히려 기관지의 진액을 말려 더 심한 증상을 초래한 것이다. 맥문동은 이로 인한 폐의 조와 열을 다스렸을 뿐이다. 부족한 진액을 보태주고, 진액이 부족해 생긴 열을 가라앉혔다. 열이 더 심한 이는 여기에 죽엽(시누대 잎)이나 석고를 더 넣어 쓴다.

    맥문동이 폐에 작용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을 양음윤폐(養陰潤肺)라고 한다. 그러나 진액이 부족한 곳은 폐만이 아니다. 소화기도 그렇다. 맥문동이 위장 등의 소화기에 작용하면 익위생진(益胃生津)이다. 인후와 혀(舌)가 건조하고 장조(腸燥)로 인한 변비가 있을 때 쓴다. 심장도 그렇다. 맥문동이 심장에 들어가면 청심제번(淸心除煩)을 한다. 현대적으로는 강심 및 안심작용이다. 스트레스로 인해 심장의 진액이 손상돼 나타나는 증상들, 예를 들면 부정맥이나 불면증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 사무실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장인의 경우 맥문동을 차(茶) 대신 마시면 좋다. 그러나 조해서 바짝 마르고 정신적으로 불안한 이가 쓰면 좋지만, 습(濕)이 많아 소통이 잘 안되고 불안하다면 먹으면 안된다. 오히려 습을 더 조장한다. 병을 더 만드는 꼴이 된다.

    양음익기(養陰益氣)의 생맥산

    열과 조(燥) 다스려 오장의 맥(脈) 살린다

    맥문동은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고급 약재다.

    소아의 불면증에도 좋다. 심화가 왕성한 아이들은 심신이 안정되지 못하고 다동불안(多動不安) 증상이 잘 생긴다. 맥문동을 끓여서 음료 대신 주면 잠도 잘 자고 마음도 편해진다. 소아의 틱 장애나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도 체액이 부족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역시 맥문동 음료가 도움이 된다. 맥문동은 또 조와 열로 인한 고혈압에도 효과가 있다. 굳어진 혈관을 연화하고 혈압을 떨어뜨리는데 도움이 된다. 여성의 생리통이나 생리불순에도 조가 주증이라면 당연히 이 맥문동이 군약으로 들어간, 이를테면 온경탕(溫經湯) 같은 약이 크게 효과를 낸다. 노인들의 심계항진이나 부정맥에도 맥문동이 들어간 자감초탕(炙甘草湯) 같은 약들이 참 잘 듣는다.

    ‘맥을 못 춘다’는 우리말이 있다. 여름철에 땀을 많이 내는 데다 장마철의 꿉꿉한 무더위에 시달리다보면 영 기운을 차릴 수가 없게 된다. 식욕도 없고 숨이 차고 매사에 피곤해져 일을 해도 좀처럼 의욕이 안 난다. 역시 장(臟)의 진액이 조해진 까닭이다. 그러나 여름철에 미리 생맥산(生脈散)을 상복해 이 진액을 보충한다면 이렇게 맥을 못 출 일 따윈 없다. 맥문동 8g에 인삼과 오미자를 각각 4g씩 쓴다. 처방이 간단해 집에서도 쉽게 끓일 수 있다. 여기에 향유와 백편두를 적당량 넣으면 맛도 약효도 더 좋다. 인삼 대신 황기를 쓰기도 한다.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중국 금·원 시대 의학 학파) 중 한 명인 이동원의 양음익기(養陰益氣)하는 명방(名方)이다.

    생맥산은 시들시들 생기를 잃어가는 오장의 맥을 팔팔하게 되살려낸다. 그래서 기력을 솟구치게 한다. 여름이라는 힘든 절기를 음식이나 약물을 통해 이겨낸다는 사유는 서양의 근대의학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동아시아적 세계관의 히든 카드들이다. 생맥산은, 그러나 단지 더위를 이기는 약인 것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당뇨로 갈증이 극심할 때도 생맥산이 대효(大效)하다. 또 충혈성 심부전으로 가슴이 답답하고 심계와 불면이 있으며 숨차고 땀이 그치지 않을(自汗) 때도 쓴다. 동계를 진정시키므로 부정맥에도 쓴다. 굳이 말하자면 강심제이고 안심제이다.

    열과 조(燥) 다스려 오장의 맥(脈) 살린다
    김승호

    1960년 전남 해남 출생

    現 광주 자연마을한의원 원장

    前 동아일보 기자·송원대 교수


    맥문동은 어디에 좋은 약인가. 부정맥, 당뇨, 심부전, 불면, 고혈압, 감기에 쓰는가. 아니다. 조와 열을 다스리는 맥문동의 의미를 알면 그 쓰임이 고정되지 않는다. 장자(莊子)의 말이 있다. ‘도(道)의 추(樞)가 환중(環中)을 얻으면 열고 닫는 것이 자유롭다.’ 무엇이 어디에 좋다는 식의 약물 이해로는 절대 통하지 않는다. 그것은 양방이 범한 오류들을 생약으로 거듭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병이 결코 낫질 않으며 터무니없는 부작용만 생긴다.

    집 주변의 흔한 풀뿌리로도 병을 치료할 수 있으려면 가장 먼저 뉴턴-카르테시안의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논리가 달라져야 한다는 말이다. 쉽지는 않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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