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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기행

둔황(敦煌) 동굴벽화 화가 서용

“이역 땅에서 모래바람 맞으며 그려낸 건 내 민족의 뿌리였어요”

  • 글: 조희숙 자유기고가 gina05@hanmail.net

둔황(敦煌) 동굴벽화 화가 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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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敦煌) 동굴벽화 화가 서용

2000년 실크로드 고도 답사길에 오른 그는 다양한 문화를 맛보았다. 현지의 전통 양 우리 앞에서.

“무조건 화랑에 찾아가서 10만원을 계약금으로 주고 전시관이 비어 있는 날로 전시 날짜를 잡았어요. 액자나 팸플릿 비용은 모두 외상으로 처리했죠. 그림이 팔리지 않으면 고스란히 빚더미에 올라앉아야 하는 상황인데도 불안하지 않더라고요. 그날부터 열심히 그림만 그렸는데 전시회가 열리자 정말 제 그림이 팔리는 거예요. 그 전시회 마지막 날 미래의 장모님을 만나는 행운도 얻었죠.”

당시 그의 장모는 초대 중국참사관으로 부임한 장인을 따라 중국에 머물고 있었다. 그림을 좋아한 장모는 서용씨의 전시회 마지막 날 주재원 부인 몇몇과 화랑을 찾았다. 그의 그림을 사려는 장모에게 “왜 내 그림을 사려 하냐”고 묻자 “딸이 시집갈 때 주려고 한다”고 답했다. 훗날 처음으로 처가에 갔을 때 거실에 걸린 자신의 그림을 보고 그는 ‘저건 내 건데’라고 빙그레 웃었다고 한다.

전시회를 계기로 그와 친분을 나누던 장모는 장인이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그와 같은 학교에 다니던 딸을 보살펴달라고 각별히 부탁했다. 처가 어른들이나 그 역시 당시엔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아내와 결혼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막상 아내와 결혼 얘기가 나오니 처가에서 대접이 달라졌어요. 나이차가 열 살이나 나고 미래가 불투명한 그림쟁이인 데다 키도 작고 못생겼으니 어디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을 거예요. 그때 장인어른께서 마지막으로 내민 카드는 ‘나는 국가 공무원이기 때문에 나라가 허락하지 않은 결혼은 시킬 수 없다’는 거였어요. 저와 아내는 동성동본이거든요.”

다행히 동성동본 혼인금지가 폐지되면서 그는 국가가 허락하는 결혼을 할 수 있게 됐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 할밖에 없었다. 결국 처가에서도 결혼을 허락했다.



실크로드의 꽃 경주 석굴암

그는 올 여름 완전히 귀국, 동덕여대에 출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10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둔황학회가 있지만, 그곳은 문헌 위주로 연구하는 단체라 실제로 둔황의 벽화를 연구하는 사람은 서씨뿐이다.

“둔황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둔황 석굴에서 신라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면서입니다. 이로써 삼국시대에 서역과 교역했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저는 둔황과 한민족을 직접 연관시키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둔황 벽화에 고구려인의 모자인 조우관(鳥羽冠)을 쓴 사람이나 전통악기인 장고, 고구려인의 수렵도와 비슷한 형상이 나오지만, 이것이 한민족이라고 할 만한 구체적인 근거는 아직 없어요. ‘유마힐변상도’라는 벽화에는 머리에 깃털을 쓴 사람이 나오는데, 이는 각국 사신들을 표현한 벽화의 공식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하지만 서역에서 들어온 불교문화가 둔황에서 꽃을 피우고 동으로 전해져 경주 석굴암에서 다시 꽃을 피웠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요. 둔황의 와불과 석굴암의 본존불이 서로 닮아있지만 우리 문화가 훨씬 우수해요. 둔황의 와불이 흙을 빚어 만든 데 비해 석굴암은 그보다 훨씬 작업하기 어려운 화강암으로 만들었거든요.”

그는 “문화란 흐르는 것”이라며 “둔황벽화와 같은 세계문화유산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둔황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므로 어느 한 나라만의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 불교문화가 실크로드를 통해 끊임없이 흘러왔다면 둔황은 중국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와도 근본을 같이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 문화를 보다 열린 자세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둔황 막고굴에는 외국인이 거주할 수도, 석굴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도 없었어요. 관광객도 석굴에 들어가려면 여러 기관에서 발급하는 추천서를 제출해야 했고요. 자국의 문화재 관리를 위한 정책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같은 문화권 사람들끼리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죠.”

고구려 벽화 연구하고파

그는 둔황벽화 연구의 출발을 ‘뿌리 찾기’에서 찾는다. 한국 문화의 뿌리가 불교문화에 있다면 불교문화의 뿌리는 둔황에 있기에 둔황에서 우리의 뿌리를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한국에는 없는 조상의 특징들이 둔황에는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연구할 수만 있다면 문화의 공백을 얼마든지 메울 수 있다.

문화 연구에 관한 한 그가 가장 부러워하는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은 둔황뿐 아니라 세계 각지의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활발한 연구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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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희숙 자유기고가 gina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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