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출구 없는 속도전 버릴 수 없는 ‘대박 신화’

벤처로 간 K과장, 인생 대차대조표

  • 이나리 byeme@donga.com

    입력2006-10-10 13: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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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벤처 행을 택한 대기업 과장들. ‘막차 탄다’는 심경으로 가족 반대까지 무릅썼다. 그러나 끝없는 격무, 무너지는 건강, 냉랭해져만 가는 집안 공기…. 체계 없는 조직은 의료보험증 하나 제때 챙겨주지 못한다. 그래도 날 선 눈빛, 희망을 찾는 사람들. “나를 바치마, 성공을 보여다오!” 》
    서울 삼성동에 있는 인터넷 벤처기업 A사. 투자 설명회 자료 작성에 골몰하던 기획실장 김정한(가명·38) 씨의 눈에 모니터 아래편 한 구석의 전자시계가 들어왔다. 오전 2:26. 벌써 5시간 째 자세 한번 바꾸지 않고 PC 앞에 앉아 있었던 셈이다. 이틀째 집에 못 들어간 데다, 오전 10시엔 창투사 사람들과 미팅 약속까지 잡아 놓은 터. 쌓인 일 때문에 마음이 무겁지만 오늘은 단 몇 시간이라도 편하게 자고 싶다….

    PC 전원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의 입에서 일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야구 방망이로 목을 얻어맞은 듯 극심한 통증. 고개가 전혀 돌아가질 않았다.

    뻣뻣한 목을 가까스로 지탱하며 차를 몰았다. 자유로를 맹렬히 달려가는 차들이 문득 무섭게 느껴졌다. 검은 밤, 굳은 목, 돈가뭄에 시달리는 회사, 질주하는 사람들…. 웬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날 처음 그는, 대기업 과장 자리를 버리고 벤처 행을 택한 것이 진정 옳은 선택이었는지를 뼛속 깊이 회의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삼성역에서 강남역까지의 일직선 거리. 이른바 테헤란밸리에는 수많은 전직 ‘김과장’들이 있다. 벤처 엑서더스 열풍 속에 ‘막차 탄다’는 심경으로 새 세계에 뛰어든 사람들. 돈을 벌고 싶어, 조직이 갑갑해, 비전이 없어, 하고픈 일 한번 실컷 해보려 명함을 바꿔 든 그들은 지금 과연 행복한가. 혹 삶의 질이 낮아진 것은 아닌가, 아니면 예상대로 희망에 찬 하루하루인가.

    여기 벤처로 간 대기업 과장 20명의 인생 대차대조표가 있다.



    “내 인생에 찾아온 마지막 기회”

    소프트뱅크 웹 인스티튜트 경영지원팀장 김일근(37) 씨. 삼성 그룹 모 계열사 과장이던 그는 지난 4월 현재의 직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상명하달식 조직에서 벗어나 내 가치만큼 기여하고 인정받고 싶어’ 선택한 새 회사가 그는 지금 적이 만족스럽다.

    “대기업에 다닐 땐 부서 이동이 있을 때마다 ‘화분갈이 당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내 포지션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 사정에 따라 강요당하는 거죠. 아이디어를 내도 반응이 너무 늦어 좋은 기회를 놓쳐버리기 일쑤였고, 무엇보다 결정권이 없어 성취감을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대기업에서 벤처로 간 사람들이 내세우는 이직 이유는 대부분 김 팀장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특히 한 직장에서 짧게는 7년, 길게는 십 수년 씩 ‘우물안 개구리’ 생활을 이어온 과장급 인사들에게 변화에 대한 욕구는 막연한 동경을 뛰어넘어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다’는 절박함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바야흐로 벤처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의 시대 아닌가.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반, 하릴없이 반(半)생을 살아버렸다는 초조감에 잠 못 드는 밤이 많아진 이들에게 벤처맨으로의 변신은 ‘일생에 세 번 찾아온다’는 기회 중 놓쳐서는 안될 마지막 카드로 여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를 설명해주지 못하는 명함

    변신을 결심한 ‘과장님’들에게 길은 두 가지다. 스스로 경영자가 되거나, 벤처 임원이 되는 것. 기술 쪽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많은 경우 사장이 된다. 벤처의 꽃은 아무래도 기술이기 때문. 그러나 나홀로 창업에 나서는 이는 드물다. 자금 문제도 그렇고, 아무래도 혼자서는 여러모로 힘이 부치는 까닭이다. 그래서 신흥 벤처 중에는 경영진이 직원 대부분을 차지하는 회사들이 적지 않다. 사장, 부사장, 이사, 전무, 실장, 팀장…. 직위에 따라 겪는 고충은 조금씩 다르지만 한 물에서 ‘노는’ 만큼 비슷한 점이 더 많다.

    대기업 문을 나서는 순간, 이들이 가장 먼저 겪는 당혹감의 진원지는 어디일까. 바로 ‘명함’이다.

    대기업에 다니던 시절,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그들은 명함을 내밀었다. ‘△△그룹 △△전자 과장’. 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가 제법 머리 좋고 성실하며 조직생활에 무리 없이 적응할 만큼의 소양을 갖춘 ‘평균 이상의 인간’임을, 그것이 설령 사실이 아닐지라도 그 한 장의 종이는 충분히 웅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물론 벤처맨이 된 지금도 그들은 첫 대면 때 명함을 내민다. ‘○○테크놀로지 팀장’. 그런데 명함은 더 이상 그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이제 그가 명함을 설명해야 할 차례다. 6000개나 되는 벤처기업에 족히 10만 명은 될 임원 중 이름 없는 한 사람. 각오했던 일이고 조직의 힘을 제 것인 양 허세 부리는 이들을 비웃어왔지만, 역시 뒷덜미 어딘가가 조금 시려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유명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부장 박모(36)씨. 이직 전 재벌그룹 주력사의 자재과장이던 그는 업무 차 한 기업을 찾을 때마다 자꾸 ‘본전’ 생각이 난다.

    “제법 규모 있는 회사라곤 하지만 예전에는 어떻게 납품 길을 한번 뚫어볼까 하도 달라붙어 내심 귀찮아하던 곳이었어요. 그런데 이젠 상황이 역전됐죠. 부서 책임자는커녕 대리랑 통화하기도 힘들고, 애써 약속 잡아 찾아가면 이제 겨우 1~2년차인 사원이 나와 ‘과장님께 여쭤보겠다’는 말만 되풀이해요. 속으로 그러지요. ‘나도 왕년에 과장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부장이야!’”

    어쩌면 ‘명함’의 무게에 더 민감한 것은 가족들인지도 모른다. 음성인식 전문업체 B사는 최근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는 엔지니어 한 명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특급 호텔에서 사장이 직접 주재하는 만찬을 베풀었다. 주빈은 바로 스카우트 대상의 부인. “불안해서 싫다”며 이직을 반대하는 부인 때문에 영입 작업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중앙일간지 기자 박모(33) 씨는 고민 끝에 벤처 행을 결심했으나 예비 장인이 “이름도 모르는 회사 직원에게 딸을 줄 수는 없다”고 고집해 곤란을 겪은 경우다. 결국 박씨는 기자 신분으로 결혼식을 올린 뒤 곧바로 사표를 내는 ‘편법’을 사용했다.

    실제로 대기업 사원 중에는 벤처 행을 원하지만 아내나 부모의 반대 때문에 주저앉고 마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제 서서히 안정을 찾을 나이, 아이들은 쑥쑥 커 가는데 무슨 모험을 한단 말인가.

    경찰 출신인 해커스랩 이정남(48) 사장은 “창업을 준비하며 주변 사람들의 진면목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경찰 그만뒀다니 전화 받는 목소리부터 달라지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친척들도 마찬가지고. 아, 이래서 어려워져봐야 진짜 내 편을 알 수 있는 거구나, 실감했지요.”

    통닭 사들고 옛 직장을 찾는 이유

    ‘이직 스트레스’라는 말이 있다. 새 직장에 적응하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그 직장이 벤처일 때는 좀 다른 단어를 쓰는 편이 나을 성싶다. 아예 ‘동화(同化)’라는 표현은 어떨까.

    “벤처는 새 사람에게 ‘적응기’라는 것 자체를 허용치 않습니다. 그럴만한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어요. 입사했으면 작은 것이라도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야죠. 일당백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데 배부르게 앞 뒤 재며 몸 만들 시간이 어딨습니까.”

    라스21 홍보이사 우광식(39)씨 말이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꽉 짜인 조직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 단번에 생경하기만 한 ‘벤처 정서’에 익숙해지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터넷 커뮤니티 업체 기획실장 김모(36)씨. 대부분 20대 초·중반인 직원들은 사장보다도 나이가 더 많은 그를 상당히 어려워한다.

    “이거 안되겠다 싶어 친근하게 군답시고 어린 여직원에게 농을 걸었죠. 작은 실수를 했기에 ‘뽀뽀 한번 해주면 그냥 넘어가마’했더니 정말로 달려드는 거예요. 도리어 제가 혼비백산해 뒤로 물러섰습니다. 도대체 그 친구들 코드가 뭔지…. 마음 맞추기가 쉽지 않아요.”

    때로는 그런 ‘차이’들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정모(40)씨가 관리팀장으로 있는 휴대전화 단말기 부품업체는 직원들이 돌아가며 저녁밥을 지어먹는다. 식비도 줄이고 시간도 아끼자는 발상인데, 밥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열댓 살은 어린 직원들의 말투며 생각 없는 행동들이 자꾸 정씨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밥이 조금 잘못 되면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싫은 소리들을 해요. 물론 자기들끼리도 그러니까 나만 특별히 미워한다고 할 순 없지요. 하지만 전 그렇게 나이도, 직위도 무시한 채 뭐든 ‘내 감정대로만’ 말하고 움직이는 친구들이 종종 이해가 되질 않아요. 업무 처리가 부실해 좀 나무라면 토라져 불러도 대답조차 하지 않지요. 요즘은 내가 너무 리더십이 없고 포용력도 부족한 것이 아닌가, 자격지심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비즈니스 컨설팅 업체를 운영하는 김도연(36)씨는 직원을 뽑을 때 대기업 출신을 선호하게 된다고 말한다.

    “능력은 조금 못 미쳐도 기본 소양을 갖춘 사람들에 게 마음이 가요. 1,2년이라도 대기업 생활을 해 본 친구들이 아무래도 참을성 많고 예의도 바르지요. 그렇다고 할 말도 못하며 살라는 뜻이 아니라, 때로는 조직을 위해 자기 계산은 좀 접어둘 줄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거죠.”

    동료들과의 공동 창업이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낯선 회사에 몸담게 된 이들은 말 통하는 사람이 없어 외롭다는 하소연을 하기도 한다. 월간지 기자 출신인 신모(36)씨는 매달 원고 마감 시즌이면 통닭이며 과일 등속을 사들고 전 직장을 찾는다. 반갑게 맞아주는 옛 동료들과 이런저런 잡담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기분전환이 된다. 휴대폰 단말기 부품업체 정팀장도 마음이 울적할 때면 옛 직장 근처 호프집에서 입사 동기들을 만난다. 이직 전에는 술자리를 별로 즐기지 않던 그였다. 그러나 이제는 같은 추억, 동일한 웃음과 고민의 주파수를 가진 그들과 나누는 맥주 한 잔이 그렇게 달고 시원할 수가 없다.

    대기업이 가진 최대의 장점이라면 잘 짜인 근무 인프라일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인사조직실 노사팀장 이정일 박사는 “근무 인프라란 첫째 근무 환경, 둘째 조직의 지원, 셋째 사내외 관계, 즉 인맥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근무 환경이란 실내 공기, 냉난방 시설, 사무용품, 식당이나 휴게소 등 말 그대로 직장 생활의 ‘배경’이 되는 모든 것들을 말한다. 저렴한 주차장, 직원 전용 헬스클럽, 자녀 학자금과 경조사비 지원, 회사 보증 대출, 자료실을 꽉 채운 신문·잡지들, 깨끗한 사무실, 휴가철 콘도 이용권, 늘 준비되어 있는 생수…. 어찌 보면 별것도 아닌 것들이 막상 없어지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현대그룹에 있다 최근 동료가 창업한 회사의 영업 담당 이사로 영입된 조형수(41) 씨는 “퇴직한 사람끼리 만나면 대기업 연봉 3600만원이 벤처 6000만원이랑 맞먹는다는 얘기를 나누곤 한다”고 전한다. 대기업에서라면 일주일에 두 세 번은 회사 식당에서 뚝딱 해치워도 될 점심 식사를 벤처에선 끼니마다 부하 직원들 밥값까지 내가며 밖에서 해결해야 한다. 사람들을 만나도 얻어먹을 일보다는 살 일이 더 많고, 과거 회사에서 지급되던 소소한 물품이며 편의 사항들도 아예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생활이 쪼그라든 것 같아요. 주머니에서 돈 나갈 때마다 자꾸 아까운 생각이 들고. 예전에는 월급이야 몽땅 아내 손에 들어갔지만 야근·특근비며 부정기 보너스 따위로 딴주머니 차는 맛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불가능하죠. 연봉이 2000만원이나 늘었다고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버리는 느낌입니다.”

    그래도 조씨는 비교적 상황이 좋은 경우다. 어쨌든 연봉이 오르질 않았는가. 대다수 벤처 기업의 연봉은 밖에서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많지가 않다. 자금 사정이 특별히 좋은 업체나 일부 최상급 전문가들을 제외하곤 대기업, 같은 연차 직원과 비슷한 수준이거나, 혹은 그보다 좀 낮은 선에 머물러 있다. 스톡옵션이나 우리 사주로 보상을 받는다지만 증시가 요즘 같아선 그 역시 ‘꿈’에 그칠 개연성이 높다. 하물며 ‘100개 중 3개만 살아남는다’는 벤처생존공식이 점차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요즘에야….

    조직의 지원이 전무하다시피 한 점은 벤처 이직자들이 겪는 또 다른 고통이다. 삼성SDS 퇴직 후 벤처 인큐베이팅 업체 팀장으로 일하는 이승원(32) 씨는 “누군가 내 일을 덜어주리라는 기대는 애시당초 하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한다.

    “벤처에는 기존 판매망도, 영업 노하우도, 각종 자료며 분야별 전문가도, 비서도 없습니다. 총무부나 관리부 같은 지원 부서 또는 담당자가 아예 없는 경우도 많아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자신이 알아서 해야죠. 그런 상황을 달게 받아들일 수 없다면 벤처맨으로는 부적격이라 해야 할 겁니다.”

    직장인이면 당연히 드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의료보험, 국민연금, 고용보험, 산재보험. 하지만 회사에 따라 그런 것들이 있는지도, 혹은 알면서도 어떻게 가입하는 지 몰라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곳이 적지 않다. 사장이 기업체에 근무한 경력이 없거나 기술 전문 인력이어서 ‘사무’ 쪽에는 아예 관심도, 지식도 없는 경우다. “연구할 시간도 부족한 데 보험 가입하겠다고 몇 날 며칠 뛰어다닐 정신이 어디 있느냐”는 변명도 한다. 어처구니없어 보이지만, 한 사람이 대기업 2,3명 몫의 업무를 감당해야 하는 벤처기업임을 생각하면 아주 이해할 수 없는 일만도 아니다.

    LG그룹 출신인 워프미디어 이수봉(41) 사장은 “대기업 시절 다닌 해외 출장 횟수가 60번을 넘는다. 한번 나갈 때마다 많은 것을 배웠고 좋은 인연도 맺을 수 있었다. 넓은 세상을 경험케 해주고 다양한 자기 학습 기회를 제공해준 전 직장에 지금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회사 돈으로 받는 특별·장기 교육, 출장과 지사 근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학습자료며 전문가들…. 웬만한 벤처에선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신화’와 사기, 그 위태로운 경계

    대기업은 또한 직원들에게 ‘나보다 나은’ 사내외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제공한다. 명함이 주는 힘일 뿐 아니라, 얽히고 설킨 조직의 방대함으로 인해 생겨나는 시너지 효과이기도 하다. 대기업에서는 선배·동료들이 닦아놓은 인맥이며 회사 차원의 공적·사적 관계들이 곧 내 것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한번 계단을 밟고 내려오면 그 ‘급’ 이상의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아진다. 그때부터는 지금까지 쌓아온 인맥을 파먹고 살아가는 형국이 연출되기 십상이다.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한 인터넷업체 기획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양모(35)씨는 “벤처 생활 7개월만에 내 지나온 삶의 ‘바닥’이 다 드러난 느낌”이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분명 조직이 나를 지켜준 측면이 없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젠 내가 조직의 방패막이가 돼야 해요. 할 일은 많은데 지원사격은 없다 보니 일 하나하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쏟아부어야죠. 지식 체력 인맥, 비단 그런 것들만 말하는 게 아니에요. 큰 조직에선 적당히 숨겨가며 살 수 있었던 제 인간적인 약점, 단점들까지 그 과정에 다 공개돼버리고 마는 거지요.”

    때로는 ‘사기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괴롭기도 하다.

    “벤처라는 게 잘 되면 일확천금, 잘못되면 사기잖아요. 그럴 듯한 아이디어로 투자자는 끌어 모았는데 막상 일을 해보니 생각대로 안되더라, 그러면 그게 뭡니까, 바로 사기지요. 물론 벤처 투자라는 것이 워낙 그런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될지 안될지 모르는 일을 ‘된다’ ‘됩니다’하면서 돌아다니는 것도 못할 짓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러한 자괴감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가 똑 부러지게 내세울 만한 기술이나 비즈니스 모델이 없거나, 장부 상 매출 외에는 실질적인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일 때 더욱 커진다.

    라스21 우광식 이사는 “대기업 출신들은 의외로 순진한 데가 있다”고 말한다.

    “옛 동료 중에 벤처로 옮겼다 견디지 못하고 다른 직장을 찾거나 아예 창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이유를 물어보면 십중팔구 ‘뭘 몰라 회사를 잘못 골랐다’고 해요. 그쪽에서 제시한 자료만 보고 덜컥 결정해버린 거죠. 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며 말이 아닌 거예요. 자기 혼자 아무리 똑똑하면 뭐합니까. 주변에서 받쳐주지 못하고, 사업계획서는 그야말로 ‘계획서’일 뿐인데….”

    부도덕하고 자질 부족한 사장은 또 다른 갈등의 원인이다. 독선적이고 권위적이다, 기술 개발은 뒷전이고 머니 게임에만 골몰한다, 상습적인 매출 조작 등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다…. ‘더욱 인간적인 직장 문화’를 꿈꾸며 이직을 감행한 이들에게 일부 사장들의 이같은 행태는 실망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벤처인가 중소기업인가

    ‘벤처 문화’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흔히 경직되고 권위적인 대기업 문화에 비해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능력에 따른 보상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의 좋은 뜻으로 사용되곤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벤처의 조직 문화는 엄밀히 말해 ‘벤처형’이라기보다 ‘중소기업형’에 가깝다는 것이 실제 내부 사정을 경험한 사람들의 전언이다.

    벤처기업 S사에는 이모(37)씨 외에 3명의 부장이 있다. 어느날 무심코 다른 부장의 연봉 액수를 들은 이씨는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연봉이 다른 부장들 것보다 400만원이나 낮았던 것이다. 으레 같으려니 하고 연봉을 공개했던 사람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이씨만 연봉이 낮을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부장 4명 중 이씨의 경력이 가장 뛰어나며, 업무에 있어서도 사실상 회사를 이끌어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은 사내외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다음날 연봉 차별의 이유를 설명해달라는 이씨에게 사장은 황당한 이야기를 했다. “자네 나이가 (다른 부장들보다) 한 살 어리지 않은가.” 경력도 당연히 1년 짧지 않으냐는 얘기였는데, 사실 초등학교를 7살에 입학한데다 병역 면제로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씨의 경력은 다른 부장들에 비해 2,3년 이상 많은 상태였다.

    비슷한 사례는 다른 벤처기업에서도 심심치않게 찾아볼 수 있다. 명확한 기준이 없이 어림짐작, 사장과의 친분, 영입할 때의 상황, 회사의 필요에 따라 호봉과 연봉이 제멋대로 책정된다. 업무 분담이 제대로 되지 않아 특정한 사람에게 지나친 책임이 돌아가기도 한다.

    더 걱정스러운 건 그러면서 오히려 은근히 권위적이라는 사실이다. 과거의 1인 지배형 중소기업처럼 사장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돼 있는 데다, 또 그 사장이 조직 생활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일 경우 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면 나름의 ‘체계’를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조직 생활에는 익숙하지만, 조직의 운영에 대해선 무지한 사장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입니다. 과거 (대기업) 방식에서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는 거지요. 서류가 많아지고, 절박한 이유 없이 직원 수가 늘어나며, 사장 자신도 급속도로 권위적이 됩니다. 경험 적은 사장의 무모한 추진력에 브레이크를 걸려다가 오히려 회사에서 밀려나는 임원들이 생기는 것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직무는 벤처형인데 조직 관리나 갈등 처리법은 중소기업식이라고나 할까요.”

    삼성경제연구소 이정일 박사의 설명이다.

    최근 일부 벤처기업에서는 스톡옵션 등 보상 체계의 불합리성을 이유로 직원들이 집단 사표를 내거나, 급속도로 커진 조직 내에서 계파간 갈등이 일어나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몰아내는 불미스러운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임대료 비싸기로 유명한 테헤란밸리에는 의외로 병원이 많다. 남서울병원은 그 거리 심장부라 할 강남구 삼성동 144번지에 있다.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환자 대다수가 주변 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장인들이다. IMF 구제금융체제에 들자 한때 매출이 뚝 떨어졌었지만 지금은 내과, 정형외과, 신경정신과 할 것 없이 환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25~40세 남자 환자가 많습니다. 목 허리 손목 등에 심한 통증이나 마비가 오고, 손가락이 저려 수저를 들 수 없다는 호소도 있지요. 대개 하루종일 PC 앞에서 보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식으로는 그런 증상들을 ‘컴퓨터너 신드롬(컴퓨터 사용자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정형외과 전문의 임호영 의무원장의 설명이다.

    하지만 벤처맨들의 질병이 단지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어서’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심신복합증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듯.

    “신체적으로는 별이상이 없는데도 본인은 손도 못 댈 만큼 아프다고 해요. 과중한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일종의 심인성 질환이죠. 그렇게 해서라도 몸을 쉬게 하려는 잠재의식의 비상 처방이라고나 할까요.”

    남서울병원 신승철 원장은 신경정신과 전문의다. 그의 환자 중에도 벤처맨이 적지 않다.

    “우선 업무량이 너무 많아요. 일주일씩 밤을 새우다시피 하니 몸이 배겨날 재간이 없죠. 입맛 없고 피곤하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데다 잠도 잘 오지 않습니다. 그런 걸 수면박탈증후군이라고 해요. 정신적인 압박감도 심각한 수준입니다. 특히 30대 후반의 임원급들은 투자자 끌어모으랴, 사업 확장하랴, 그러면서 속으로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잠재울 수 없어 노심초사합니다.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나다 보니 과잉적응증후군(살아남기 위해 일과 사람에 정도 이상 적응하려 애쓰는 상태)에 빠지기도 해요. 꼬챙이처럼 말라가는 아들을 보다 못해 ‘까짓 투자금 2,3억 날려도 좋으니 그만 손 떼라’는 부모도 있다더군요. 직장을 옮긴 사람이라면 거기 이직 스트레스까지 겹친다고 봐야죠.”

    신원장은 벤처맨들에게 주로 나타나는 신체적, 정신적 병증들을 뭉뚱그려 ‘테헤란밸리 증후군’이라 명명했다. 이빨이 썩어 들어가는 줄 알면서도 치과 갈 시간이 없어 참고만 있는 사람, 벤처 입사 6개월 만에 앞머리가 하얗게 세버린 사람, 손목이 시어 몸조리 잘못한 산모처럼 문고리 하나 힘껏 잡아 돌리지 못하는 사람, 먹는 게 부실해 영양실조로 쓰러진 사람, 새벽 귀가 중 깜박 졸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 테헤란밸리에 가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우리 시대 벤처맨들의 평균상이다.

    “아빠, 내일 아침에 봐요”

    인터넷전화 개발업체 연구원인 김현덕(35)씨도 “LG에 다닐 때보다 업무량이 두 배는 늘어난 것 같다”고 말한다. 평균 귀가 시간은 밤 11~12시, 일요일 약속도 맘놓고 잡지 못해 친구들 얼굴 본 지가 까마득하다. 아직 총각인 김씨는 “이렇게 시간이 없어 어디 연애나 할 수 있겠느냐”며 내심 불안한 표정이다. 그래도 신제품 개발에만 성공하면 최고의 신랑감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며 희망을 내보인다.

    그러나 아직 가정이 없는 김 씨는 오히려 행복한 편에 속한다. 최소한 남편을, 아빠를 벤처에 ‘빼앗겨버린’ 가족의 원망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벤처기업 클라리스의 CEO 랜디 코리사르는 95년 돌연 은퇴를 선언하며 이런 말을 했다.

    “5년간의 CEO 생활로 내게 남은 것은 이혼과 건강 악화밖에 없다. 사생활은 전혀 없었고 극에 달한 압박감 때문에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도 없었다.”

    벤처로 직장을 옮기며 가정에 찾아올 변화를 고민하지 않는 기혼남성은 없을 것이다. 대개 ‘당장은 힘들겠지만 일단 성공하면 풍요로운 노후와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서 짐을 싼다. 그러나 막상 시작된 벤처맨 생활은, 또 그런 남자의 아내 노릇, 자식 노릇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모인터랙티브 고객지원팀장 진국영(36)씨는 지난 3~4월, 새 사업 준비에 몰두하느라 새벽 귀가를 밥먹듯 했다. 오전 4시쯤 도착해 다시 오전 11시쯤 현관문을 나서는 생활. 피로에 찌든 얼굴로 출근하는 아빠에게 여섯살배기 외동딸은 종종 이런 인사말을 던지곤 했다. “아빠, 내일 아침에 봐.” 유달리 가정적인 진씨로선 고사리손을 흔드는 딸아이의 모습이 가슴이 콕콕 와 박힐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많은 벤처 직원 가족들은 가장과 함께 하는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한다. 어쩌다 쉬는 주말도 밀린 잠을 자거나 업무상 필요한 책 따위를 읽느라 훌쩍 날려보내기 일쑤다. 남편이 벤처컨설팅 업체 차장인 김은희(가명·32)씨는 “아이와 셋이 주말 여행을 가본 지가 언젠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이젠 다 포기했고 그저 건강이나 해치지 말았으면 싶지만, 과연 이렇게 사는 것도 부부생활이라 할 수 있는지 때때로 의심스러워진다”며 아픈 속을 털어놓았다.

    이렇듯 자의반 타의반으로 가정을 ‘방기’한 채 성공을 향해 매진하는 벤처맨들이 가족을 위해 준비한 최고의 선물이 있다면 아마도 ‘스톡옵션’이리라.

    스톡옵션 행사할 날, 과연 올까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벤처라 하면 백이면 백 스톡옵션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누군가 벤처로 말을 갈아탔다면 염치 불고하고 “스톡 옵션 받았느냐, 그게 도대체 얼마치냐”는 질문부터 던지곤 한다.

    스톡옵션, 즉 주식매입선택권이란 ‘회사가 임직원에게 부여한 일정 수량의 자사 주식을 일정 기간이 지난 뒤 매수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옵션 수혜자가 권리 행사시 행사 가격만큼 자기 자본을 투자하는 ‘투자형’, 자본 투자 없이 현금·주식·현금 주식 혼합형으로 지급받는 보상형, 임직원에게 업무 실적에 따라 회사 주식이나 가치를 제공하는 전체가치형 등이 있다.

    사실 지금의 벤처 열풍도 지난해 말부터 올 4월까지 지속된 코스닥 활황, 그로 예상됐던 벤처기업 스톡옵션 수혜자들의 ‘대박 신화’가 없었다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벤처 기업 종사자들은 정말 스톡옵션을 통해 떼돈을 벌었는가.

    앞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 스톡옵션은 부여받는 것보다 언제, 어떻게 행사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그런데 그 과정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일단은 회사가 무척 ‘잘 나가야’ 한다. 시장성, 장래성, 매출 신장세, 건전성 등 온갖 잣대를 들이대는 심사를 무사히 통과해 코스닥에 성공적으로 안착해야 한다. 제3시장, 거래소도 있지만 아직까지 벤처 주식 거래의 주무대는 아무래도 코스닥이기 때문. 상장이 실현됐다 해도 주식을 당장 처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행법상 스톡옵션은 취득일로부터 만 3년이 지나야 비로소 행사가 가능하다. 그 사이 초기의 높은 주가가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예를 들어 주당 2만5000원에 제공받은 주식이 3년 후 1만5000원밖에 되지 않는다면 아예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손해를 줄이는 길일 것이다.

    다행히 회사가 코스닥에 진출해 3년째 높은 주가를 유지했다 치자. 그렇더라도 권리 행사는 역시 쉽지가 않다. 내부 임직원들이 자사주를 매입·매도하는 상황은 시장에 그대로 공개된다. 만일 임원진이 주식을 대거 내다 판 사실이 알려지면 주주들이 동요하고, 주가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니 회사를 계속 발전시켜나갈 생각이라면 함부로 주식을 처분할 수도 없는 일이다.

    지난해 회사를 그만두고 벤처기업에 합류한 많은 ‘과장’들은 대부분 스톡옵션의 수혜자들이었다. 경력이 짧지 않은만큼 스스로 경영진이 되거나 최소한 임원급으로 채용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스닥 폭락에 이어 벤처업계로 쏟아져 들어오던 시중자금마저 거짓말처럼 사라진 지금, 스톡옵션 또한 일확천금을 가져다줄 씨알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다.

    지금 이들에게 급한 건 오히려 고갈되어가는 자금을 끌어 모으는 일이다. 특히 신생 인터넷 벤처기업들의 상황은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데, 이미 제법 많은 돈을 투자받아 놓은 회사들이라 할지라도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매출이 크게 오르지 않는 상황에 비축해 놓은 자금이 떨어지는 올 연말, 내년 초쯤이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2000여 전자상거래 업체 중 실제 거래가 일어나고 있는 쇼핑몰은 800개 수준이며, 그중에서도 영업 수익을 올리고 있는 곳은 6.4%인 50개에 불과하다. 98년 말 3개뿐이었던 퇴출 벤처기업 수가, 최대 성수기였던 지난해 도리어 50개로 급증했고, 올 들어서만도 4월까지 벌써 16개에 이른다는 중소기업청 조사 결과도 눈에 띈다.

    “이제 그만 성공을 보여다오”

    적극적인 광고 공세로 제법 잘 알려진 한 인터넷 경매업체 이모(33) 부장은 “솔직히 연말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며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벤처라는 게 원래 모험이지만, 코스닥이 이렇게 폭락하기 전까진 ‘우리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위 해본 적이 없었어요. 며칠 전 신문을 보니 한 결혼정보회사에서 조사한 ‘신랑감 선호도’ 결과가 나와 있더군요. 3월에는 벤처·정보통신업계 종사자가 35%로 1위였는데 한 달 만에 10%가 뚝 떨어져 2등이더라고요. 세상 참 무섭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요.”

    그래도 이씨는 아직 젊은데다 미혼이라 다시 대기업으로 돌아간다는 생각까지는 하고 있지 않았다. 혹시 잘 안되면 지금까지의 경험을 살려 더 나은 조건의 벤처로 옮겨가고 그도 여의치 않을 땐 아예 창업을 하겠다는 복안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다시 대기업으로 발길을 돌리는 이도 없지 않다.

    삼성물산은 올 들어 인터넷 및 정보통신 분야에서 벤처기업 출신 경력사원 28명을 채용했다. 삼성화재의 경우 웹 기획·디자인 분야 경력사원 30명 중 10명이 벤처 출신이다. 최근 경력사원 모집 공고를 낸 삼성SDS에도 수백명의 벤처 종사자가 원서를 냈다. 그중에는 사표를 내고 나갔던 SDS 출신 벤처 인력 십여 명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벤처맨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든 승부를 보고 싶다고 한다.

    “벤츠 타다 프라이드 탈 수 있습니까? 지금은 이사지만 대기업 가면 잘해봐야 다시 과장인데, 답답한 조직에서 눈치보며 살 자신이 없어요.”(36세, 롯데그룹 출신, 인터넷 쇼핑몰 업체 마케팅담당 이사)

    “되든 안 되든 끝까지 가볼 겁니다. 얼마나 어렵게 한 결정인데요. 그 동안 고생한 동료들, 가족들에게 미안해서라도 꼭 성공하고야 말겠어요. 아무리 다들 망한다, 망한다 하지만 좋은 기술 있고 경영 잘 하면 크게 한 번 일어설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42세, LG전관 출신, 기업 인트라넷 개발업체 대표이사)

    이들의 결의에 힘을 실어주려는 듯 오늘도 테헤란밸리 한 귀퉁이에는 새 벤처빌딩이 문을 열고, 심야 사우나, 24시간 편의점은 밤샘 작업에 지친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자고나면 달라지는 세상. 그래도 이들은 날 선 눈빛으로 어디 숨어있을지 모르는 희망을 애타게 찾는다.

    “나를 다 바치마, 이제 그만 성공을 보여다오!”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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