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아무개씨(46)는 오랫동안 마약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런 그가 올 가을 결혼할 예정이다. 결혼을 결심했을 정도로 그의 몸과 마음 상태는 크게 좋아졌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마약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말한다. “히로뽕을 끊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를 통해 그의 연락처를 알아낸 것은 6월8일 오후였다. 그날 밤 그는 한 호텔 커피숍에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아내 될 사람을 소개했다. 그 자리가 길어지는 바람에 인터뷰 약속은 다음날로 미뤄졌다.
다음날인 토요일 오후 시내 중심가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 자리에는 그의 결혼 상대자와 더불어 그녀의 남동생, 그의 여동생 등이 함께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나서 조금 떨어진 테이블로 옮겨 앉았다. 인터뷰에 응하기 전 그는 “흥미 위주로 다루지 말 것”을 간절히 부탁했다.
그가 처음 마약을 접한 것은 1974년 대입 재수생 시절이었다. 당시 서울의 젊은이들 사이에선 히피문화가 유행이었다. 젊은이들이 많이 몰리는 명동과 신촌 일대에는 대마초가 흔했다. 주한미군을 통해 환각제인 LSD도 돌아다녔다. 명동의 한 음악감상실에 자주 들락거리던 그는 음악 하는 친구들의 권유로 ‘별 생각 없이’ 대마초를 피웠다. 그때만 해도 자신이 중독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또 실제로 그렇게 자주 하지도 않았다. 마약보다는 오히려 알코올에 더 심취했다.
그가 마약에 깊이 빠져든 계기는 사업실패에 따른 고통이었다. 실의에 빠져 지내던 그는 1988년 어느날 길거리에서 우연히 재수 시절 알고 지내던 친구를 만났다. 이씨가 “너무 괴롭다”고 하자 그 친구는 히로뽕을 권했다. 당시 그는 이미 알코올 중독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술과 히로뽕은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이후 그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몸이 완전히 망가질 정도로” 히로뽕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자신의 삶이 파멸로 치닫는 것을 깨닫고 알코올 중독자모임을 찾아갔다. 그 모임을 이끄는 성당 신부는 그에게 충북 음성에 있는 ‘꽃동네’로 가 봉사활동을 하도록 권했다.
“사회의 온갖 유혹에서 멀어져야겠다 싶어 ‘꽃동네’를 찾아갔다. 그렇지만 자원봉사를 하면서도 마약을 끊지는 못했다. 휴가 삼아 사회에 나올 때마다 다시 히로뽕을 투약한 것이다. ‘꽃동네’에 머무르는 10년 동안 그런 일이 대여섯 차례 되풀이됐다.”
그가 꽃동네를 나오게 된 동기는 ‘분노’였다. 1998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다. 그런데 ‘꽃동네’ 측은 그가 충격을 받을까 염려해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사회에 나왔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꽃동네’ 측의 처사에 몹시 분개했다. 또다시 ‘몸이 망가질 정도’로 히로뽕을 투약했다.
황홀감 뒤에 오는 비참함
약기운에서 깨어난 후 그는 ‘꽃동네’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어느날 외박을 나왔다가 우연히 동창생인 의사 친구의 연락처를 알게 됐다. 침례교회에 다니는 그 동창생은 그에게 신앙을 권했다.
그는 그 친구의 권유를 받아들여 서울 목동에 있는 한 침례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는 그에게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을 줬다.
어느 정도 안정을 회복한 그는 1999년 이화여대 평생교육원의 ‘약물 상담사’ 과정에 등록했다. 1년 과정이었는데, 6개월 만에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마약에 손을 댄 것이다.
“주변 친구들과 나 자신을 자꾸 비교하면서 자괴감에 빠졌다. 그러다 우연히 예전에 약을 했던 친구를 만났다. 다시 약을 하면 큰일난다고 생각했지만 끝내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며칠 뒤 약에서 깨어나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기자가 ‘우연히’라는 표현에 의문을 나타내자 “술에 취해 나도 모르게 약을 거래하는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긴 것 같다”고 고쳐 말했다. 히로뽕의 ‘마력’에 대해 그는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이 세계에서는 ‘생각이 꽂힌다’는 표현을 쓴다. 사업에 실패하고 직장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은 재벌이 돼 수천 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환상을 보게 된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황홀한 기분에 젖어 있다 깨어나면 이번엔 반대로 견딜 수 없을 만큼 비참해진다. 그 비참한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다시 약을 찾게 되는 것이다. 투약자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인데, 어느 순간 기가 막힌 느낌이 찾아온다. 그것을 잊지 못하기 때문에 약을 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망상이다. 그런 느낌은 결코 다시 오지 않는다. 중독될수록 약효는 더 빨리 떨어지고 몸과 마음, 나아가 영혼까지 망가진다.”
13년 동안 마약에 빠져 있는 동안 그의 건강은 크게 나빠졌다. 위와 간이 상했고, 뇌가 손상됐다. 술과 병행하다 보니 폐해가 더 컸다. 특히 기억력에 심각한 장애가 생겼다. 약속을 잊어먹기 일쑤고, 이미 한 얘기를 또 하거나 했던 얘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약에 빠져 있는 동안 ‘현실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다 보니 나쁜 짓을 했을지 모른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갑갑해 미칠 것 같다”는 말로 기억상실증에 따른 괴로움을 토로했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몇 가지 단편적인 장면들이 떠오르기는 하는데 전체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약을 구한 장소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병원에 입원했다. 마지막으로 입원한 것은 지난해 11월. 함께 교회에 다니던 어머니가 죽자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또다시 히로뽕을 찾은 것이다.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었다.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을 투약했다.”
며칠 만에 제정신이 돌아온 그는 국립공주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곳에서 공주치료감호소 근무 경력이 있는 조성남 의료부장의 따뜻한 배려에 힘입어 상태가 호전됐다. 이것이 인연이 돼 그는 현재 조부장의 치료를 받은 환자들이 만든 ‘약물중독자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 그는 마약환자 치료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했다.
“대부분의 병원 시설은 감금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전문치료병원을 가봐도 치료 프로그램이 충실치 않다. 지난해 국립부곡정신병원에 가보니 텅텅 비었더라. 마약을 하다 구속되면 1년 정도 형을 살면 된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2년 이상 감금되니 환자들이 입원하기를 꺼린다. 정신병원에서 치료받고 나오면 바로 집으로 가게 돼 있는 현재의 치료시스템은 문제가 많다. 사회적응에 필요한 최소한의 여유를 갖지 못하다 보니 가족을 비롯한 주변사람들 눈치도 보이고 감정적으로 부딪히게 된다.
그 탓에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재발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외국처럼 사회와 집을 연결하는 halfway house(중간거주시설; 정신장애자를 위한 사회복귀훈련시설)가 필요하다. 거기서 가족과 유대감을 회복하는 시간도 갖고 재활훈련도 받고 직업도 소개받는 것이다.”
그는 마약수사의 문제점도 거론했다.
“마약을 하는 사람들은 환자다. 그런데 수사기관에서 범죄자 취급을 하니 범죄자라는 인식이 굳어져 있다. 한성대 대학원 과정에 국제마약범죄학과가 있다. 학교 관계자에게 ‘마약이 왜 범죄냐’고 따졌다. 수강생 중에 수사관계자가 있는데 그 사람도 내 얘기에 동의한다. 검찰의 마약수사는 치료보다 실적 위주다. 보호관찰제도도 형식에 치우쳐 있다. 마약환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처벌이 아니라 사회의 따뜻한 눈길이다. 환자로 여기고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주변에서 도와줘야 한다.”
전문 상담사를 꿈꾸는 그는 이날 인터뷰 장소에 나오기 직전 한성대 대학원 국제마약범죄학과 과정에 등록했다. 가을학기부터 수강한다고 했다. 그에 앞서 올봄엔 한국성서대 사회복지학대학원에 입학했다.
“마약퇴치운동본부와 YWCA 등에서 상담활동을 하면서 체계적인 교육프로그램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내가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봉사활동을 하다 보니 몸에 있는 기가 다 빠졌다. 당분간 공부에만 전념할 생각이다.”
그는 “기억력이 좋지 않아 공부가 남들보다 몇 배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로 생각하고 이를 감수하고 있다는 것. 그는 “요즘도 하루에 여러 번 마약 충동을 느낀다”며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처음엔 다들 ‘한번쯤’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하는데, 아예 시작을 말아야 한다. 히로뽕을 끊으려면 목숨을 건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다시 약을 하면 나는 죽는다는. 그 정도 의지가 아니면 끊을 수 없다. 마약 중독자에게는 recovered(회복한)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recovering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끊었더라도 평생 다시 안 한다는 보장이 없다.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오늘 하루 약 없이 충실하게 살겠다’는 다짐을 하고 그대로 지켜나갈 경우 그것이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면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오늘 하루 약 없이…”
그의 대학원 학비는 교회에서 지원한다. 아내 될 사람도 교회에서 만났다. 그는 자신이 행운아라고 말했다.
“가족(여동생)이 있고 지지해주는 친구들이 있고 교회와 목사님이 있고 이제 아내까지 얻게 됐다. 지금은 잘 알고 있다. 내가 여기서 또 ‘깨지면’ 그 모든 사람이 나를 떠나리라는 것을. 그때는 비참하게 죽는 일만 남을 것이다. 그 동안 나무가 푸르고 꽃이 예쁜 것을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게 보인다. 새로 태어난 기분이다. 그 동안 사랑의 감정을 몰랐던 것이다. 약에서 깨어나면 세상에 대한 적개심에 가득 찼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고 나만 불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교회의 도움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떳떳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