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호

美 共和黨,강경파 대 온건파

  • 이흥한 < 미 KISON 연구원 >

    입력2005-05-24 1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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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임스 제퍼즈 의원의 공화당 탈당은 미국 정치이념 변화의 속사정을 드러냈다는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치인 한 사람의 정치쿠데타이기 전에 공화당 온건중도파가 마침내 자기 목소리를 낸 것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제퍼즈 미 상원의원이 공화당을 탈당한 지 12일째 되던 지난 6월5일, 존 매케인 상원의원 부부는 부시 대통령의 저녁식사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닭고기 스테이크를 대접받았다. 부시 대통령이 매케인 의원과 단 둘이 만난 것은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에 들어간 후 처음이었다.

    이 소식을 알린 6월8일자 ‘워싱턴 포스트’ 2면의 머릿기사 제목은 ‘온건파(moderates), 느닷없이 부시의 주목을 받다’였다. 온건파 제퍼즈 의원 탈당 후 부시 대통령이 당내 온건파 의원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부시 대통령이 매케인 의원 부부를 백악관에 초청한 것은, 매케인 의원이 상원 다수당이 된 민주당의 상원 리더 톰 대슐 의원을 자신의 애리조나 농장에 초청한 지 사흘째 되던 날의 일이었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맞섰던 부시와 매케인의 이 정치 게임은 제임스 제퍼즈 의원의 공화당 탈당과 민주당의 상원 점령이 아니었다면 물론 보기 힘들었을 진풍경이었다. 매케인 의원은 이날 백악관에서 밥만 얻어먹고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부시 대통령에게 환자 기본권의 입법화를 추진하겠다며 온건파의 목소리를 잊지 않고 들려준 것이다.

    이 환자 기본권은 부시가 시답지 않게 여기던 것이었고, 매케인은 내심 벼르던 정책안이었다. 며칠 전 매케인을 만났던 민주당 상원의 사령탑 톰 대슐도 매케인과 같은 주장을 펴고 있었다.

    매케인은 대통령 선거 이후 찬밥 신세였다. 백악관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백악관 참모가 매케인과 접촉한 것은 백악관이 상무부 관리를 임명하면서 상원 상무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매케인에게 협조를 부탁한 것이 전부였다.



    부시-매케인이 만난 다음날, 백악관 참모들은 매케인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환자 기본권 법안에 대해 상의하자고 했고, 또 그 다음날에는 백악관 비서실 차장과 보건 담당 참모가 매케인 사무실로 찾아갔다. 온건파 매케인의 목소리가 먹혀든 것이었다. 부시가 당내 온건파와 민주당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겠다는 정책 변환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부시는 이틀 후 로드 아일랜드 주 출신 공화당 상원의원으로 역시 당내 온건파이며, 매케인처럼 찬밥 신세였던 링컨 초피와도 만났다. 제퍼즈 의원의 공화당 탈당이 불러온 변화임은 물론이다. 머리 꼿꼿이 세우고 팔다리 쭉쭉 뻗으며 기세 등등하던 부시 대통령의 행진곡이 순간에 사라지면서 그만 부시 대통령을 그 자리에 주저앉힌 것이다.

    제퍼즈 의원의 공화당 탈당은 혁명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은 정치판의 대변혁이었다. 일단, 제퍼즈 의원 한 사람이 움직임으로써 50 대 50으로 의석 수가 양분되어 있던 상원이 1석 차이로 민주당 손에 넘어갔다. 공화당이 백악관과 상하 양원을 장악했던 1954년 이후 거의 반세기 만에 백악관과 상하 양원을 다시 한 번 장악했던 공화당은 그야말로 둘도 없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더구나 선거 결과로 판세가 뒤집힌 것이 아니라, 1994년 이후 줄곧 꽉 잡아왔던 상원을 의회 임기 중에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단 한 석 차이로 민주당에 지휘봉을 넘겼으니 공화당으로서는 속이 쓰려도 이만저만 쓰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이고 시위 떠난 화살이다. 공화당 지도부가 멀쩡한 두 눈을 감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정치 감각이 마비되어 있었던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한순간에 벌어질 수 있었는가? 지난 대통령 선거 개표 때 그런 위기 상황에서도 악다구니 한번 쓰지 않고 차분하게 위기를 넘겼을 때 알아보긴 했지만, 이런 대격변을 겪으면서도 역시 상원 지휘봉을 비굴하지 않게 넘겨주고 점잖게 받는 정치 게임의 막후는 어떠했는가?

    제임스 제퍼즈라는 의원은 또 누구기에 이런 절묘한 상황을 만들어냈으며, 과연 제퍼즈 의원의 탈당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궁금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공화당 내 강경파가 도대체 온건파를 어떻게 두들겨 팼기에 이런 꼴을 당했으며, 공화당 내 온건파라는 딱지는 어떻게 붙게 된 것인가?

    미국 의회정치의 묘미는 바로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는 데 있으며,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또한 들어볼 만하기에 묘미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을 미국답게 만든 미국의 역사와 문화와 건강한 지역색이 정치와 겉도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고유의 색깔로 묻어나기 때문이다.

    뉴잉글랜드 유권자의 변화

    제퍼즈라는 사람을 알려면 그의 출신지인 뉴잉글랜드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미국 동북부 끄트머리의 메인, 버몬트, 뉴햄프셔, 로드 아일랜드,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6개주를 일컫는 뉴잉글랜드야말로 한때 공화당의 굳건한 ‘섬’이라고까지 불리던 곳이다.

    공화당의 역사적 요람이라 불리던 뉴잉글랜드의 유권자들은 이제는 자신들을 코끼리 당(공화당)이라기보다는 무소속이나 민주당으로 여긴다. 최근의 공화당을 지배하고 있는 남부나 서부 출신 공화당 사람들과는 색채가 다르다는 것이고, 사실이 그렇다. “남부 공화당 사람들의 보수 이념으로 우리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말이다.

    제퍼즈 의원이 공화당을 탈당했을 때 그의 지역구인 버몬트의 유권자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공화당 내 강경 우파인 트렌트 로트 전 상원 원내총무와, 98세의 노구로 보좌진의 도움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처지에서도 끝까지 의원직을 유지하는 스트롬 서몬드 의원이 좌지우지하는 현대 공화당(Modern Republican Party)은 더 이상 머물러 있을 곳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공화당 내 힘의 중심이 중서부와 남부로 옮겨가면서 동북부 뉴잉글랜드 출신 공화당 의원들의 기가 꺾인 것은 사실이다. 청교도 정신으로 무장하고 미국의 새 역사를 수놓던 뉴잉글랜드 시대는 지난 것이다.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조상들은 그 자손들에게 도덕심을 깊숙이 불어넣었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상호 의무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으며, 극기와 자제를 가르쳤다. 미국 개혁의 역사를 이끌어간 곳도 뉴잉글랜드였다. 여성의 참정권에서부터 노예 반대 운동에 이르기까지 뉴잉글랜드는 미국의 맨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목소리만 앞세우지 않았다. 때가 되면 움직였고 소신껏 행동했다.

    제퍼즈 의원이 부시 대통령의 미사일 방어 계획을 반대한 것도 이런 뉴잉글랜드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뉴잉글랜드 출신의 공화당 의원들은 미 공화당의 스페인 전쟁에 반기를 들고, 핵 실험 폐지 조약을 지지한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소속 공화당의 당론일지라도 자신들의 믿음과 거리가 있다면 그들은 청교도 선조들의 가르침을 따랐다.

    제퍼즈 의원이 밝힌 탈당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공화당이 공교육에 대해 뚜렷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642년 매사추세츠 베이 식민지 당시 모든 아이들은 읽기를 배워야 한다는 법을 처음 제정했고, 북미에서 가장 오래된 하버드 대학이 있는 뉴잉글랜드 출신다운 생각이었다.

    뉴잉글랜드에서도 특히 제퍼즈 의원의 출신주인 버몬트와 메인은 뉴잉글랜드의 프런티어라고 불리는 곳이다. 버몬트와 메인 주 사람들은 스스로 “우리는 뉴잉글랜드의 오스트레일리아”라고 말할 정도다. 1936년 대통령 선거에서 플랭클린 루스벨트 대신 알프 랜돈 후보에게 표를 던진 곳은 전미국을 통틀어 버몬트와 메인 두 주뿐이었다. 그래도 기 한번 꺾이지 않고 버몬트 주의 벌링턴 신문은 1면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 ‘온나라가 괴상한 신을 좇아가고 있으나 버몬트는 굳건히 자기 땅을 지키다.’

    물론 일부 공화당 사람들이 버몬트와 메인을 특별히 취급하는 것에 반대를 하는 것도 사실이다. 버몬트 주 의원의 절반 이상이 타 지역 출신인데다가, 자유로운 정치 분위기에 밀려 뉴잉글랜드의 완고했던 정치 분위기는 과거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버몬트는 여전히 제퍼즈라는 인물을 지지하고 있으며, 제퍼즈 의원도 버몬트 유권자들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다.

    사사건건 부시와 충돌한 제퍼즈

    이런 배경을 가진 제퍼즈 의원은 부시 행정부 출범 직후부터 사사건건 부시와 부닥쳤고, 공화당 강경 우파의 선봉에 섰던 체니 부통령을 비롯한 트렌트 로트 전 상원 원내총무 등 의회 지도부와 백악관 참모들이 여기저기 눈치 안 보고 강경 보수의 기치를 드높일 때마다 이들에게 제동을 걸었다. 공화당의 보브 돌 의원이 상원 원내총무를 할 때만 해도 제퍼즈 의원 등 온건파가 당 지도부와 얼굴을 붉히는 일은 흔치 않았다.

    어쨌든 교육 환경 보건 문제 등 주요한 사회 현안에서 부시 정권의 강한 보수 색채와 제퍼즈의 정치신념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1994년 클린턴 대통령이 보건 제도안을 내놓았을 때 공화당에서는 유일하게 클린턴을 지지한 사람이 제퍼즈였다. 올해 초 부시가 1조6000억 달러에 달하는 감세안을 내놓았을 때도 제퍼즈는 눈치를 보기는커녕 대놓고 반대해 부시의 부아를 돋웠고, 한술 더 떠 연방 교육비를 증액하라고 대들기까지 했다. 물론 공화당 내 중도파, 즉 온건파 의원들의 뒷심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는 취지의 교육비 증액 요구를 부시가 묵살하면서, 교육 문제에 관한 한 공화당 내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이자 존경받는 고참 의원인 제퍼즈는 졸지에 조롱감이 되고 말았다. 환경 문제도 마찬가지. 환경이야말로 제퍼즈 의원이 성심을 다해 매달렸던 문제였고 버몬트 주의 주요 쟁점도 환경이었으나, 환경 분야에서도 극우적인 환경 정책의 선봉장인 체니 부통령이라는 높은 벽에 부딪혀야 했다.

    공화당 온건파 의원들은 환경 보호를 주장하는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를 닫은 채 원자력 발전소 추가 건설과 석유공 시추 등 사업자들의 개발 논리 일변도로 치닫는 체니 부통령과 백악관 참모들에게 경고를 보냈다. ‘행정부가 계속해서 환경 현안에 부드러운 자세를 취하지 않을 경우, 도시 근교 유권자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것이며, 공화당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온건파 의원들의 입지를 위험하게 한다’는 것이 경고의 요지였다.

    공화당 하원의 온건파 핵심 의원 몇몇은 5월8일 상원에 있는 체니의 사무실로 찾아가 정중하게 제동을 걸었다.

    “부시의 환경정책은 내 선거구 핵심 유권자인 녹색표(green vote)의 반감을 사, 결과적으로 공화당을 위협하고 있다.”(낸시 존슨, 코네티컷)

    이들의 요구는 백악관이 환경 법률안을 쉬쉬하며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 말고 자신들에게도 알리면서 상의하라는 것이었다. 공화당 지도부도 나름대로 사연이 없지 않다. 클린턴이 임기 말기에 환경 현안 등 몇몇 분야에서 덫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부시의 임기 초반에 당내 보수파와 산업계의 격한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클린턴 때 만들어진 규정들을 뒤집지 않을 수 없었다. 온건파들도 물론 이런 사정을 모르지 않았다.

    “전임 클린턴 행정부가 물러나면서 다음 행정부를 의도적으로 곤혹스럽게 만들어 놓았다는 점은 우리도 인정한다. 하지만 부시의 몇 가지 결정은 잘못된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에너지 위기만 봐도 그렇다. 새로운 에너지 정책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으면 동북부에도 가스 값 폭등의 위기가 곧 닥칠 것이다.”(마이클 캐슬, 델라웨어)

    이들은 체니에게 온건파가 의회에서 아주 간발의 차지만 엄연히 공화당의 다수파라는 점도 상기시켜주었다.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주류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해서는 안 되며, 대다수 미국 유권자들은 정치적 이념 분포에서 극우나 극좌가 아닌 중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정치 지도도 새삼스럽긴 하지만 펼쳐 보여주었다.

    그러나 부시도 백악관 참모들도 체니도 온건파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체니는 향후 20년 동안 최소 1300개의 발전소를 건설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고, 당내 환경보호론자들의 반발에 부딪혔으나 모르쇠로 버텼다. 교토 의정서 탈퇴, 지구 온난화 방지에 대한 무관심, 북극 국립야생생물 피난처(ANWR) 지대에 대한 석유 및 가스공 시추 지지 등도 온건파의 뒤통수를 때리는 조치들이었다.

    제퍼즈를 따돌린 부시

    제퍼즈 의원은 그럴수록 자신의 목소리를 더 높였다. 부시의 예산안과 감세안에 일일이 반대했다. 그러니 백악관과 공화당 지도부의 눈초리가 고울 리 없었다. 저러다 당하지 하는 귀엣말들이 떠돌았다. 제퍼즈 의원이 탈당하기 딱 열흘 전인 5월14일에 발행된 의회 관련 전문 주간지 ‘롤콜(Roll Call)’에는 ‘변절자’ 제퍼즈 의원을 ‘처벌’하는 아이디어가 백악관 내에 떠돌아다닌다는 한 칼럼니스트의 글이 실리기도 했다. 당내 보수파와 보수 언론의 논객들이 제퍼즈 의원에게 화살을 겨누고 있다는 것이었고, 이 칼럼의 제목은 ‘부시, 제퍼즈의 탈당을 부추기는가?’였다.

    백악관의 공격은 이미 개시된 뒤였다. 백악관에서 열린 ‘올해의 교사’ 표창식 참석자 명단에 제퍼즈 의원의 이름이 빠진 것이다. 공교롭게도 올해의 교사는 버몬트 출신이었다. 백악관은 제퍼즈 의원의 이름이 빠진 것은 단순한 실수라고 둘러댔다. 그러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올해 67세인 제퍼즈는 과묵한 사람이다. 버몬트에서 나고 자라 예일대학을 졸업했고 하버드 로스쿨 출신으로 전형적인 동북부 엘리트다. 버몬트 주 상원의원(1967~68)을 거쳐, 주법무장관(1969~73)을 지냈고, 연방 하원의원 생활 13년(1975~88)에 이어 1989년부터 지금까지 12년째 상원의원으로 있다. 태권도 검정띠의 유단자이며, 크로스 컨트리를 즐기고, 한때는 트렌트 로트 의원과 함께 ‘상원의원 4중창단’의 멤버이기도 했다.

    그는 클린턴 대통령의 열광적인 팬이었다. 상원 표결에서 75%나 클린턴 편에 섰다. 공화당 상원의원 가운데는 초피 의원에 이어 두 번째로 민주당 편이었다. 클라렌스 토머스 대법관 임명에도 반대표를 던졌고, 클린턴 탄핵안도 반대했다. 공화당의 이단자였고 변절자였으며 몸은 공화당에 있었지만 무소속이었다.

    1995년 공화당이 상원을 접수했을 때만 해도 8~10석을 민주당에 앞서 있었기 때문에 제퍼즈 의원 같은 온건파가 당론과 다를망정 독립적으로 투표를 하더라도 당 지도부는 여유가 있었다.

    온건파도 독립적인 투표를 하더라도 당 지도부의 견제를 덜 받았다. 그러나 2001년의 상원은 50 대 50이었고, 8년 만에 새 행정부가 들어섰으니 당 지도부로서는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미 상원이 어떤 곳인가? 독립 입법체의 자유의지 경연장 같은 곳이고, 그것이 또한 미 상원의원의 덕목이요 정치적 실체이기도 하다. ‘상원은 자기 위주로만 움직이는 프리마돈나의 클럽 같은 곳이다. 99명의 왕과 1명의 여왕이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헌신하는 곳이 상원이다.’(마거릿 체이스 스미스, 1971년 12월21일자 ‘뉴욕 타임스’ 칼럼)

    상원의원의 지나친 독립성을 비꼬면서도 상원의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버몬트 주립 대학의 개리슨 넬슨 정치학과 교수도 이런 지적을 했다. “내가 보기에 제퍼즈 의원은 상원의 개인주의 전통과 버몬트의 정치적 독립을 이해하지 못하는 백악관 참모들에게 지친 것이 틀림없다.”

    결국 제퍼즈라는 상원의원은 점잖게 공화당을 걸어 나왔다. 54년 만에 백악관과 상하원을 동시에 장악한 공화당의 정치적 대승리를 눈 하나 깜짝 않고 뭉개버리면서.

    여담 하나. 공화당 탈당을 발표하던 날 그는 회색 양복에 회색 넥타이를 했다. 전 미국의 주목을 받는 날이었고, 텔레비전 카메라 불빛이 쏟아지는 날이었으며, 정치판의 대변혁을 선포하는 날이었다. 다른 정치인이라면 짙은 감청색 양복에 하늘색 와이셔츠와 빨간 넥타이를 맸을 것이다. 워싱턴 정치인의 유니폼이 그런 것이었고, 더구나 그날은 독립의 날이요 반란의 순간이었으며 자유를 선포하는 날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회색이었다. 빨간색도 아니고 파란색도 아니었다. 한 패션 디자이너는 역사적인 ‘독립선언’을 하는 날 회색 양복에 회색 넥타이를 하고 나타난 제퍼즈를 ‘화강암 조각’ 같다고 했다. 정치 독립을 선언하는 그날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 패션 디자이너는 제퍼즈의 회색은 ‘고결한 인간, 고매한 성품’을 표상하는 것이라고 평했다.

    하기야 제퍼즈는 언론 앞에 서기조차 부끄러워하는 인물이었다. 거만과는 거리가 멀어 겸손했고, 정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절개로 버텼다. 한 언론인은 그를 이렇게 평했다.

    “남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정치인들과는 다르다. 자기 절제를 할 줄 알고, 공화당 지도부처럼 자기 중심적이거나 자만하는 기색이라고는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하고는 더 이상 일을 같이 못 하겠다는 판단도 탈당의 한 이유가 됐을 것이다.”

    공화당의 악의에 찬 분노

    공화당에 있었을 때도 강경파는 제퍼즈를 별렀다. 이젠 당을 제 발로 걸어나간 마당인데 제퍼즈의 뒤꼭지만 쳐다보고 있을까? 공화당원이었다가 민주당으로 당을 바꾼 후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도전했던 마이클 포브스가 그런 제퍼즈의 정치적 앞날을 우려하는 글을 ‘워싱턴 포스트’(5월25일자)에 써 보냈다.

    공화당 하원의장으로 매파 지도자였던 깅리치와 사사건건 멱살잡이를 하다 결국 공화당을 떠난 후 자기가 겪은 경험담을 들려준 것이다. 자신이 본 공화당에 대해서도 한마디 잊지 않았다. 간추리면 이렇다.

    “제퍼즈 상원의원처럼 나도 GOP(공화당)는 더 이상 내가 헌신적으로 일하던 그런 당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가족들의 관심거리에 대해 실제적인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극단으로 치닫는 것이 지금의 공화당이다. 편협하고, 관용을 베푸는 법이 없고, 다수를 무시하고, 동북부 사람들과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관심은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노인의료보험제도와 사회보장을 사설화하려 들지를 않나, 거대한 관료 집단을 통해 납세자들의 세금만 탕진하려 든다. 오늘날 워싱턴의 공화당이라는 조직은 교육개혁과 노인보험제도, 환경 문제 같은 것에 대해서는 빈말만 잔뜩 늘어놓고 있다.

    제퍼즈 의원은 이제 공화당의 악의에 찬 분노를 각오해야 한다. 신기하게도 지난 20년 사이에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긴 사람들은 이런 앙갚음을 당하지 않았다. 공화당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제퍼즈 의원의 기록을 왜곡하고, 인격을 깎아 내리며, 보수파 언론을 구슬려 제퍼즈 의원을 공격하려 들 것이다. 그를 파괴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들쑤셔 낼 것이다. 그들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내가 민주당으로 당을 옮긴 후, 민주당에는 나와 관련된 왜곡된 기록과 거짓투성이 정보가 수도 없이 날아들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나와 함께 일하던 전 참모들을 고용해 대통령 예비선거에 나선 나를 두들겨댔다. 민주당 예비선거에 민주당 돈보다 공화당 돈이 더 많이 흘러 들어갔다면 알 만하지 않은가. 한마디로 피의 스포츠였다. 극단 과격파가 둥지를 틀고 앉아 있는 현재의 공화당에는 온건파가 비집고 앉을 자리는 없다.”

    자기 편에서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을 때에는 다른 편으로 옮기는 것도 정치판에서는 상식이요 불문율로 통하며, 생존의 한 방법이다. 그리고 배경이야 어떻든 제퍼즈의 반란은 정치적 행동이며 게임이었다. 보수파 논객인 로버트 노박은 제퍼즈가 배를 바꿔 탄 이유를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고 꼬집었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상원의석 수가 50 대 50으로 갈려 있던 상황에서 공화당의 98세 노령인 스트롬 서먼드 의원이 타계하면 어차피 상원은 민주당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는데, 제퍼즈 의원이 위원장 자리를 노리고 한발 앞서 민주당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25년 동안 잘 있다가 제퍼즈가 느닷없이 복도를 건너간 것(상원에서 당을 바꾼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서먼드 의원이 세상을 뜨면 제퍼즈 의원은 51번째가 아닌 52번째가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탈당 효과가 반감되어) 상임위원장 자리를 보장받기 힘들었을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 때인 지난해에 그는 이미 민주당 지도부와 거래를 시작했다. 상원이 50 대 50으로 똑같이 나뉘자 민주당 톰 대슐 원내총무와 다음 단계를 밟았던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노박의 이 글은 뒷말을 무성하게 만들었다. 포브스가 지적했던 우려가 나타나기 시작한 징조로도 읽힌 탓이다.

    노박의 주장에 따르면 의원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화제가 되고 말 많기로 유명한 상원에서 제퍼즈 의원의 탈당 가능성을 공화당 지도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탈당 이틀 전에야 눈치챘다는 것이다. 제퍼즈 의원은 민주당과 환경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비밀리에 거래해 놓고도 탈당 결행 하루 전 공화당 온건파 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부시를 비난하기는커녕 심사숙고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는 것이 노박의 주장이다. 한마디로 공화당에서 빼먹을 것 다 빼먹고는 극적으로 배를 갈아탔다는 것.

    배를 갈아탔든 복도를 건너갔든 제퍼즈 의원이 아무리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돌출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그의 공화당 탈당은 미국 정치 이념 변화의 속사정을 드러냈다는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치인 한 사람의 정치 쿠데타이기 이전에 공화당 온건 중도파라는 집단이 마침내 자기 목소리를 낸 것이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의 사설(5월24일자)은 ‘제퍼즈 의원은 1940년대 로널드 레이건이 공화당으로 당적을 바꿨을 때의 심정인 것 같다. 당시 레이건은 자신이 민주당을 떠난 것이 아니라, 민주당이 자신을 내쫓았다고 했다’고 지적하면서, 제퍼즈 의원의 공화당 탈당을 1940년대 레이건 의원의 민주당 탈당과 견주었다.

    공화당 중도파 의원들은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에 들어간 다음부터 자신들의 당내 입지가 주변으로 밀려난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노인을 위한 제조약 처방과 의료보험 등 사회보장안을 들이밀었으나 대부분 거절당했다.

    상원뿐이 아니었다. 221 대 210석으로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는 하원의 중도파 의원들도 체니 부통령에게 경고를 보낸 사례처럼 부시 행정부와 손발을 맞출 수가 없었다.

    1994년 상하 양원 장악이 문제

    진보 진영의 인사들은 공화당이 오늘처럼 온건파들이 극우파를 성토하는 장으로 변하게 된 것은 가깝게는 1994년의 상하 양원 장악에 직접 원인이 있다고 지적한다. 상하 양원을 장악한 후로 극단주의자들이 대담해지기 시작했고 당 내분이 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연방정부가 임시 문을 닫게 만든 것, 클린턴을 탄핵으로 몰고 간 것 등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해머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공화당의 톰 딜레이 의원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환경보호단체들은 모두 게슈타포 같은 곳”이라고 비난하고, 트렌트 로트 전 상원 원내총무 같은 의원이 “힐러리 클리턴은 상원의원이 되기 전에 벼락을 맞을 수도 있다”는 가시 돋친 농을 던지는 것 등이 모두 거만하기 짝이 없는 행태의 본보기라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가 보수 일변도의 강경으로 치달으리라는 것은 대선에서 체니를 부통령으로 지명했을 때부터 예견된 것이다. 그때 이미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온건파가 설 자리는 없어진 셈이다.

    체니의 투표 기록은 부통령직을 그만둘 때까지 민주당 진보 진영의 공격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 안전음수법안 반대, 서민을 위한 주택공급안 반대, 에이즈 실험 및 자문을 위한 연방 지원법 반대, 극빈 가정 아동의 학교 급식을 위한 기금안 반대 등이다.

    보수 진영도 나름대로 온건파에 대한 불만이 많다. 뉴 깅리치 하원의장은 젊은 공화당 의원들에게 “우리 공화당의 큰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구역질 나는 일일망정 필요할 때는 해야 한다고 격려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신보수주의의 대부로 불리는 보수파 논객 어빙 크리스톨은 “어느 정당이나 국가의 비전과 이상을 제시하긴 하지만, 특히 좌파 정당이 그 이상을 정리하고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지적했다.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 즉 소득 재분배, 산업 국유화, 새로운 정부 같은 그럴듯한 아이디어를 잘 짜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좌파가 말하는 ‘유토피아’란 결국 ‘아무 데도 없다(nowhere)’는 것이 문제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미국 정당정치는 이념에 따른 줄서기

    이 논리는 결국 우파 정당인 공화당이 민주당의 유토피아 논리에 끌려만 다닌다는 결론에 가 닿는다. 점잔만 떨어서는 할 일을 못 한다, 비열한 일이라 하더라도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는 깅리치의 항변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온건파 제퍼즈 의원의 탈당은 결국 미국의 이런 좌우 이념 극단화의 절정으로 평가된다. 동북부의 한 자유 온건파 의원이 자신의 정치 견해를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제퍼즈의 반란은 정치 지도의 색 구분을 분명하게 만든 동시에, 당의 이념적 양극화 현상을 뚜렷하게 만든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의 정당 정치는 이념에 따른 줄서기가 분명하다. 이념의 체로 사람들을 가려내고 추려내고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줄을 세운다. 1960년대의 공화당과 민주당은 좌우의 폭이 넓고 넉넉했다. 공화당에는 극우파 배리 골드워터에서부터 온건파 넬슨 록펠러까지 다양한 이념이 같이 섞여 있었고, 민주당 안에도 남부 출신의 인종분리자인 제임스 이스트랜드에서부터 흑인과 백인이 같은 버스에 타야 한다고 주장한 에이브러햄 리비코프에 이르기까지 역시 상반된 이념이 공존했다.

    1960년대 이후 공화 민주 양당은 조금씩 이념의 스펙트럼을 체로 걸러내기 시작했고, 공화당과 민주당의 성격이 뚜렷해지는 동시에 각당 내에서도 정치 이념에 따른 줄서기가 이루어졌다. 의회 정책 전문지인 ‘내셔널 저널’이 보수와 진보라는 두 축을 기준으로 의원들의 정치 성향을 구분한 자료에 따르면, 1999년이 처음으로 이런 줄서기가 완성된 해로 기록된다.

    즉 가장 보수적인 민주당 의원이 모두 공화당 왼쪽에 위치하고, 가장 진보적인 공화당 의원들이 민주당의 오른쪽에 위치하는 일직선 현상을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왼쪽에서부터 민주당 좌파-민주당 중도파-민주당 우파-공화당 좌파-공화당 중도파-공화당 우파가 일렬 횡대로 줄을 서게 된 셈이다.

    이런 분류는 당을 빠르게 결집시켰다. 1970년 의회 의원들은 소속 당이 제출한 입법안에 60%의 찬성률을 보였고, 최근 들어 소속 당 제출 법률안의 찬성률은 90%에 육박한다. 당의 정체성 확보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정치의 극단화라는 부정적인 현상도 동시에 부각되었다.

    이론적으로 본다면 제퍼즈 의원의 탈당은 상원에서 의견의 폭과 영역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당 지도부가 수용하는 의견의 폭이 훨씬 좁아지고,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의 극단화 현상을 혐오하는 제퍼즈 의원 같은 이가 결국은 극단화 현상에 일조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미국 시민은 중도론자들이다. 여론 조사가 그렇게 말하고 선거 결과가 이를 입증한다. 이 중도화 현상은 1972년 처음 일반사회조사(General Social Survey)가 행해진 이후 차츰 빨라졌다. 의회는 점점 더 날카롭게 양극으로 극단화하고, 일반 여론은 가운데로 몰리는 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더욱 눈에 띄는 현상은, 1900년대 전반기에는 집권당이 상하 양원을 장악하고 있던 기간이 전체 시간의 85%에 이른 데 반해, 1955년 이후에는 양원을 장악하는 기간이 3분의 1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이르러 백악관은 상하 양원 가운데 최소 한쪽과 앙숙이 되었다. 이런 흐름에서 공화당은 드디어 백악관과 상하 양원을 동시에 접수하는 정치 승리를 거두었는데, 자축 잔치가 끝나기 무섭게 제퍼즈 의원의 탈당으로 상원을 민주당에 빼앗긴 것이다.

    제퍼즈 의원의 탈당은 한때 공화당의 아성이었으나 이제는 과거의 영광이 되어 버리다시피 한 동북부 출신 공화당 의원들의 쇠락한 입지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동북부의 공화당은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아 있었다. 그나마 제퍼즈 의원 같은 뉴잉글랜드 출신이 동북부 공화당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던 판이었다. 이젠 의회 내의 보루였던 존재마저 공화당을 떠난 것이다.

    반세기 전인 1950년대 초 동북부는 공화당 상원의원들의 독무대였다. 1953년 83회 의회 임기 당시 공화당은 48석으로 상원 다수당이었다. 남부 주의 공화당 상원의원은 단 1명뿐인 데 반해 당시 뉴잉글랜드 6개주와 뉴욕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등 동북부 9개주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은 14명으로 절대 다수였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사정은 전혀 딴판이다. 동북부 9개주의 공화당 상원의원 수는 7명으로 줄었고, 남부 11개주의 상원의원은 13명이 되었다.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이 현상이 가속화되다가는 동북부 민주당과 남부 공화당이라는 지역당 도식이 탄생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공화당 지도부 인사들 사이에서 남부 주를 일컫는 딕시(Dixie) 발음을 듣는 것이 예사가 된 지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미국의 지난 20년간 정치사에서 당적을 옮긴 의원은 모두 15명이다. 이 가운데 14명이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옮겨갔고 이중 13명이 남부 출신이었다.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옮긴 이는 뉴욕 주 출신 포브스 전 의원뿐이다.

    1995년에는 무려 5명의 민주당 하원 의원이 공화당으로 옮김으로써 1955년 이후 40년 만에 처음으로 공화당이 하원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제퍼즈 의원의 공화당 탈당도 이때의 정치판 변동 못지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더구나 제퍼즈 의원은 버몬트 출신의 무소속 하원 의원 버니 샌더스가 말했듯이 나름대로 “정치 판도의 앞날을 보고” 움직였다. 미국의 정치가 앞으로 더욱 우경화하리라는 것이 지난 20년의 미국 정치사를 지켜보면서 내린 제퍼즈의 판단이었다.

    진보적 이념에서 출발했으나 수십 년을 거치면서 보수로 움직인 신보수주의도 정치 우경화의 또 다른 움직임이다. 로널드 레이건, 잔 커크패트릭, 어빙 크리스톨, 거트루드 히머파브 등 이름을 다 열거하기도 힘든 인사들이 이런 움직임의 주류를 이루었다.

    자유와 진보주의의 시대라 불리며 좌파의 물결이 미국을 휩쓸었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신자유주의에 식상한 인사들이 보수로 돌아섰다. 그 반대로, 진보에 몸담았다가 보수로 돌아선 인사들이 주로 주동이 되어 치른 레이건 혁명 이후에는 제퍼즈 의원 같은 이들이 좀더 편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자유와 진보의 민주당 쪽으로 돌아서고 있다.

    미국 정치 우경화 현상 퇴조하는가

    제퍼즈 의원을 기회주의자라고 깎아내릴 수도 있고, 원칙주의자로 추켜세울 수도 있다. 어쨌든 제퍼즈 의원의 거사는 좌파 인사의 우파 이동이라는 미 역사의 한 조류가 쇠퇴하고, 우파 인사들이 좌파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인간의 이념은 주로 좌에서 우로 옮아가는 것이 대체적인 현상이다. 처칠은 “20대에 진보가 아니었다면 가슴이 없는 것이고, 40대에 보수가 아니라면 머리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좌에서 우로의 이동은 미국 정치에서도 정상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제퍼즈 의원은 거꾸로 움직였다. 상임위원장 자리가 탐이 나서 갔더라도, 그에겐 그 동안 축적해 놓은 소신 정치의 명분이 있었고, 몸담았던 소속 당을 욕할 자격이 있었다.

    제퍼즈 의원이 탈당을 선언하러 찾아간 선거구 버몬트 주의 지지자들이 그 앞에 치켜든 대자보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고맙소.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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