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의 집’은 서울 구의동에 있는 출소자들의 쉼터다. 출소자들은 평범한 삶을 애타게 찾고 있지만, 돌아오는 건 사회의 냉대와 차별뿐이다. 지난 겨울 나는 그들과 함께 살면서 출소자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사회의 관심이다.
‘평화의 집’으로 가다
‘평화의 집’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정사목위원회가 출소자 가운데 의탁할 곳이 마땅치 않은 사람들을 위해 운영하는 쉼터다. 즉 출소자들이 직업을 구하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때까지 잠시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평화의 집’은 원래 금호동 산꼭대기의 허름한 집이었다. 그러다가 작년 가을 더 많은 사람을 받기 위해 구의동의 단독주택으로 옮겨왔다. 이사오는 것도 순탄치 않았다. 경매가 진행중이던 집을 매입했는데 대금을 다 지불했는 데도 집주인이 명도를 하지 않아 결국 소송까지 갔던 것이다. 경매가 계속됐으면 헐값에 넘길 수밖에 없었던 집을 제값에 사준 것도 고마울 텐데 기천만원의 이사 비용까지 요구하다니….
그러나 재판일에 소복(素服)을 입고 나타난 집주인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기 때문에 결국 돈을 더 주어야 했다. 아마도 그녀는 매수인이 비영리 봉사단체라는 것을 눈치채고, 힘으로 밀어붙이면 돈을 더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결국 집주인의 끈질긴 투쟁 앞에 우리는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요구하는 대로 베풀 수밖에 없는 것이 ‘평화의 집’의 ‘태생적’ 운명이라고나 할까?
대대적인 수리 끝에 금호동 식구들을 이전시키면서 신부님들은 출소자의 집이란 사실이 이웃에 알려지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범죄인을 경계하는 우리 사회의 배타적 분위기를 의식했던 것이다. 고민 끝에 신부님들은 자신들이 몸소 출소자 형제들과 같이 기거하면, 마을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신부님과 출소자 형제들의 공동체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이전할 때부터 출소자 형제와 함께 지내온 서 수사님이 개인 사정으로 ‘평화의 집’을 떠나면서 금년 초부터는 이 신부님과 최 신부님 두 분이 머무르고 있다. 나는 연초에 “출소자들과 함께 살아보지 않겠느냐”는 이 신부님의 뜨거운 프로포즈(?)를 받고 술김에 “한 달만 살아보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결국 취중발언이 내 발목을 잡고 말았다. 10여 년간 교정사목위원이란 직책만 갖고 있었을 뿐 아무 일도 못하던 나는 뒤늦게 ‘평화의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평화의 집’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단독주택이다. 지하에 방 4개, 1층에 방 3개와 부엌, 2층에 방 2개가 있다. 나는 지하 방에 머물렀는데 최 신부님의 옆방이었다. 미닫이 방이었는데 처음 며칠은 밤중에 불쑥 누가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출소자 형제들이 혹시 밤에 몰래 들어와 위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경계심이 내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명색이 교정사목위원이라는 사람이 출소자들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으니 일반 사람들은 오죽할까?
“한 달만 지낼 수 있게 해달라”
‘평화의 집’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천주교 신자가 기본조건이지만, 신자라고 해서 모두 ‘평화의 집’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울 명동에 있는 교정사목위원회에는 하루에도 몇 사람씩 출소자가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 당장 가진 것이 없으니 한 달만 지낼 수 있게 해주면 자립하겠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중에는 돈을 주지 않는다고 난동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은 그들의 사정을 들어보고 꼭 방을 구해줘야 할 사람인 경우 직접 계약에 나선다. 그냥 돈만 주면 방을 구하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출소자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출소자들이 8만원짜리 쪽방에서 힘들게 지내는 반면, ‘평화의 집’은 깨끗한 방에 따뜻한 식사까지 제공한다. 이런 까닭에 ‘평화의 집’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대개 교도소나 구치소에서 신부님들을 만나본 경험이 있거나, 조금만 도와주면 자립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침대와 탁자만 덜렁 있는 방에서 첫날밤을 보내며 ‘같이 지낼 형제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져보았다.
일본의 어느 정신분석학자는 이런 설명을 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자식이 여섯 딸린 가족이 있다. 부모는 성실하고 자식 가운데 다섯 명은 모두 일류 대학을 나와 좋은 회사에 근무하며 술·담배도 전혀 안 하고 농담을 걸어도 통하지 않을 만큼 벽창호다. 그런데 자식 하나만 불량아다. 일류 대학에 들어가긴 했지만 재미없다고 중도에 집어치우고는 일정한 직업도 없이 이상한 여자들과 관계를 맺는가 하면, 여기저기 빚을 지고 형사사건에 연루되는 등, 가족들은 밤낮 뒤치다꺼리하느라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다….”
이 불량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학자는 우리 사회의 통념과는 다른 분석을 내놓고 있다.
“불량한 아들은 다른 자식들의 ‘억압된 불만’을 떠맡고 있는 것이다. 착실한 다른 아들들의 그 올곧음에는 억지스러움이 있고, 그들은 그 고집스러운 기준에 맞지 않는 많은 경향을 억제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일상은 메마르고 따분할 수밖에 없다. 이 가족에게 ‘우연히, 운수 사납게’ 불량한 아들이 태어난 것은 결코 아니다. 만일 불량아가 없었더라면 나머지 아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와 똑같은 불량한 자식이 되든가, 또는 그들의 일상 생활이 붕괴됐을 것이다.”
나는 그 정신분석학자의 추론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물음을 던졌다. 과연 ‘평화의 집’ 형제들은 우리 내부에 억압된 욕망을 대신 분출해 주는 사람들이며,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대신 저질러온 안전판인가?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러나 얼마 뒤 다시 잠을 깼다. 방 앞에서 누군가가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안드레아 형제였다. 아침식사를 8시에 하기 때문에 7시30분에는 일어나야 했던 것이다.
남자들만 사는 집이지만 봉사자들이 밑반찬을 만들고, 요리 솜씨를 자랑하는 형제까지 있어 어지간한 가정집 식사에 견줄 만했다. 낯선 공간에서 처음 맞이하는 아침식사였지만 신부님과 출소자 형제들이 정감 어린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기에 편안한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아침식사가 끝나면 사람들은 제각기 일터로 간다. 막노동을 비롯해 고물행상, 퀵서비스, 외판원, 미용실 조수로도 나간다. 이때 집에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과 몸이 아픈 바오로 아저씨가 남는다. 바오로 아저씨는 ‘평화의 집’의 산 역사라 할 수 있다. 10여 년이 넘게 있으면서 한때는 ‘평화의 집’ 관리자 노릇도 했는데 지금은 다리를 쓰지 못해 하루종일 집에 머물고 있다. 그는 요즘 신부님들이 ‘평화의 집’에서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를 걱정하고 있다.
‘평화의 집’은 원칙적으로 1개월마다 출소자의 지속적인 거주 여부를 결정한다. 이런 조치는 거저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이 장기화되면, 출소자 개인의 자립의지가 꺾일 수 있다는 취지에서 생겨났다. 이런 점에서 바오로 아저씨의 장기체류는 원칙 위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몸이 불편한 사람을 다른 기관에 무작정 보낼 수는 없는 일. 바오로 아저씨의 경우처럼 ‘평화의 집’ 운영 규정은 융통성이 있다.
자유시간은 저녁식사 시간인 오후 7시부터 취침시간인 10시 전까지다. ‘평화의 집’ 구성원들은 컴퓨터 게임을 하고 텔레비전도 보지만, 그날 겪은 일들을 소박하게 이야기하는 시간도 갖는다.
퀵서비스를 하는 형제는 오늘도 무사히 오토바이를 탔고 얼마를 벌었다며 자랑한다. 그는 퀵서비스를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돼 두 번이나 사고를 당했다. 사고 전부터 한쪽 발이 불편했던 그가 아침에 어렵사리 오토바이를 타는 모습을 보면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야기의 주도권은 안드레아 형제가 갖고 있다. 그것은 안드레아 형제가 제일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가장 오랫동안 ‘학교’에 다녔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오전은 모든 식구가 한자리에 모이는 시간이다. 이때 밀린 빨래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 등산도 가고 연극도 보러 갔다. 연극은 출소자 형제들에게 낯설지 않다. 1년에 한 번씩 청송교도소를 방문하는 연극단이 ‘평화의 집’에 구성돼 있을 뿐만 아니라, 연극을 전공한 형제도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가출소녀를 보호하는 ‘나눔터’의 아이들 3명이 와서 함께 지낸 적이 있었다. ‘나눔터’를 책임지는 자매님이 며칠간 개인적인 용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화의 집’ 식구들은 위아래층을 뛰어 다니는 철없는 소녀들을 보고 말로는 귀찮다고 하면서도 같이 놀아주는 모습으로 미루어 싫지 않은 눈치였다. 아마도 그들끼리는 아픔을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게다.
일요일 오후 5시에는 형제들이 모여 미사를 드린다. 신부님을 포함해 형제들은 일주일 동안 일어난 일들, 지난 세월에 있었던 일들을 반성한다.
이 자리에서 절도죄로 청송에 수감되었다 나온 안드레아 형제는 세상 모든 사람의 돈이 자기 것처럼 보였던 화려한 시절을 회고했다. 서울에서 한탕하고 부산에 내려가 재벌 회장 부럽지 않게 놀다가, 다시 돈 떨어지면 부산에서 한탕해서 인천으로 가고….
이렇게 방탕한 삶을 산 대가는 사회에서의 격리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다. 원래 안드레아 형제의 선친은 동네 유지였다. 그래서 그는 경제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유년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삐뚤어진 삶을 살았다. 그 결과 교도소에서 장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가 교도소에서 나왔을 때 아버지의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던 형은 빈털터리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형제가 있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고아로 태어나 기억이라고는 얻어맞은 것밖에 없다는 프란체스코 형제는 한때 죽기로 결심하고 며칠간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굶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호프집에서 오래 일했다. 그런데 호프집 주인은 그가 오갈 데 없다는 것을 알고 헐값에 무지막지하게 부려먹었다. 그러자 프란체스코 형제는 세상이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해 앞뒤 가리지 않고 가게에 불을 질러 전과자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과격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유난히 겁도 많고 조금은 모자란 것처럼 느껴진다. 선한 사람의 순박함이 어느 날 세상의 냉혹한 인심에 배신당했음을 알았을 때, 순간적으로 무서운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명문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여러 종류의 장사를 하던 바울 형제가 ‘평화의 집’에 오게 된 사연도 기구하다. 신혼부부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친 사정을 어눌한 말투로 이야기하는데 언뜻 희극인지 비극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이렇게 사연 많은 형제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긴다. 나는 지난 세월에 죄 지은 일이 결코 없었던가? 다만 그 죄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않은가?
출소자의 꿈과 좌절
시간이 지나 형제들과 개별적으로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소망과 좌절도 알게 되었다. 집과 직장 그리고 아내와 자식이 있는 가정…. 평범한 사람들이 꿈꾸는 것을 그들도 갖고 싶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꿈을 이루고 살기 때문에 출소자들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소박한 꿈은 출소자들에게 결코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있다. 출소자들에게 항상 따라 다니는 ‘전과자’라는 낙인. 그것은 삶의 멍에가 되어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안드레아 형제는 막노동을 열심히 나가지만 제대로 돈을 받지 못하는 눈치다. 돈을 달라고 말하면 도리어 책잡힐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일반인이라면 어림도 없을 일이지만, 출소자라는 낙인이 당연한 권리 행사까지 가로막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출소자의 사회 복귀를 돕지는 못할망정 그들이 지닌 약점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미용을 배워 보겠다고 미용실에 다니던 형제는 며칠 뒤부터 발길을 끊었다. 자신의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보통 사람처럼 편안하게 미용을 배울 수 없는 분위기 탓이 아니었을까?
빡빡이 형제가 주차 문제로 경찰서에서 조사받은 것은 작년 12월28일이었다. 아무런 연락처 없이 집 앞에 차를 세워둔 사람과 사소한 시비가 벌어졌는데 경찰서에서 정작 조사를 받은 것은 전과자인 빡빡이 형제였다. “잘못한 것은 저쪽인데 왜 우리 형제만 나무라느냐?”는 항의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카드영업을 하던 형제는 몸이 불편한 바울 아저씨의 부탁으로 은행에 돈을 찾으러 갔다가 그 길로 사라졌다. 퀵서비스를 하는 형제도 예전에 바울 아저씨의 통장에서 돈을 꺼내간 적이 있었다. 빨리 돈을 벌어 보겠다는 생각에 훔친 돈으로 동해안에서 액세서리 장사를 했지만 계속 비가 내리는 바람에 모두 날렸다고 한다. 지금은 어떤 여인과 데이트도 하지만, 집 한 칸 없는 처지이기에 결혼은 아직 산 너머의 일이다.
고물 행상을 하는 프란체스코 형제는 구리선을 모아둔 가게에서 네 번인가 물건을 훔치다가 구속되었다. 평소에 자기 돈은 한푼도 쓰지 않는 알뜰한 사람인데 빨리 돈을 모으려고 구리선을 훔쳤다고 한다. 대모인 리디아 자매님이 찾아가자 그는 경찰서 한구석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돈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닐 때 단념하는 법을 안다. 하지만 교도소에 다녀온 경험이 있으면서도 돈을 둘러싼 유혹에 유독 약한 이들이 출소자다.
프란체스코 형제는 구속되었다. 하지만 신부님과 리디아 대모님의 정성이 담당 검사를 감동시켜 그는 다시 ‘평화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신부님은 자기가 한 말을 지켜야 하는 것일까? “다시 나쁜 짓을 하면 ‘평화의 집’에서 내쫓겠다”는 그 말을…. 그들 형제가 용서를 구하고 다시 돌아오면 내보내야 하는 것일까? ‘평화의 집’에서 나가면 갈 길이 뻔한 상황에서 말이다.
이것이 신부님들의 고민이다. 신부님은 쉬지 않고 사고를 저지르는 형제들에게 실망하고,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고심하다가 수일간 가출(?)한 적도 있었다.
한번은 두 신부님이 모두 나가셔서 본의 아니게 내가 신부님 역할을 대신해야 하는 때가 있었다. 그날따라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는 한 형제가 걱정되어 여러 차례 안드레아 형제에게 연락을 취하게 했다. 의협심이 강하고 형제들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안드레아 형제는 걱정하지 말고 주무시라고 했지만 신부님도 안 계시는데 혹시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곤란할 것 같아 늦게까지 그 형제를 기다렸다.
나는 기다림에 지쳐 안드레아 형제에게 화를 냈는데 평소와는 달리 험상궂은 모습으로 나에게 맞서는 안드레아 형제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때서야 안드레아 형제가 저녁 때 밖에서 소주를 먹고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이 장사인 저 친구가 거칠게 나오면….
“신부님이 안 계실 때는 내가 신부님을 대신한다. 빨리 그 형제를 데려와.”
만약 그때 신부님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화만 냈다면 어찌되었을까? 내 이야기에 투덜대면서도 집을 나선 안드레아는 그 형제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러나 무엇인가 분이 풀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잘 참다가도 욱하는 날엔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것이 출소자들이다. 내가 ‘평화의 집’을 나오고 난 뒤 또 한 번 두 신부님이 동시에 집을 비운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안드레아 형제가 다른 형제와 다투다가 유리창을 깨고 마침내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왔다고 한다. 그 일로 결국 안드레아 형제는 ‘평화의 집’을 떠나야 했다.
오랜 기간 수형 시설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정신적 장애가 찾아온다.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평화의 집’ 형제 중 평소엔 농담을 잘하고 활발하던 형제도 사회활동 중에는 말을 아낀다. 혹시 오해가 생길까 두려워서다. 말 하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다 보니 그것이 본인은 물론 상대방에까지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것이다. 마치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수십 년 만에 가석방으로 출소한 흑인 죄수를 연상케 한다.
그 흑인은 정해진 공간에서 자고 정해진 슈퍼마켓에서 일을 하지만, 수십 년을 감옥에서 보낸 터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자유로운 세상에서 소변을 보러가면서도 꼭 주인에게 물어본다. 감옥에서의 오랜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세상에서는 친구가 없고, 그렇다고 친구들이 있는 감옥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던 그 흑인은 악몽에 시달린다. 자살하기 위해 목을 매는 현장에 갔더니 함께 감옥에 있다가 먼저 가석방되었던 사람이 자살하면서 남긴 서명이 있다. 결국 그 흑인은 먼저 탈출한 백인 죄수가 꾸민 낙원으로 탈출한다.
출소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
사회에 버려지는 오갈 데 없는 출소자들에게 탈출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하게 말하면 언제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으로 돌아가느냐가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범죄인들에게는 ‘그들만의 세상’을 별도로 꾸며주면 된다.
17세기 말의 한 법규에는 어떤 도시에서 페스트가 발생했을 경우에 취해야 할 조치가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우선 엄격한 공간적 분할이다. 도시와 지방을 격리하고 외출을 금지한다. 또 이를 위반하면 사형에 처하고, 부근을 배회하는 동물은 모두 도살한다.
우리는 17세기의 법규를 다시 적용해야 하는 것일까? 헌법을 개정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가진 인간’과 ‘인간의 존엄성이 필요없는 인간’을 구분해야 하는 것일까?
육체적인 장애자에게 법은 특별한 호의를 베푼다. 주차공간이나 취업 면에서도 배려한다. 정부도 보조금을 아끼지 않는다. 어린아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정서적 장애인에 속하는 출소자에게 법은 어떤 배려를 하고 있는가? 과연 육체적 장애인이나 어린아이를 배려하는 만큼 출소자를 배려하고 있는가?
이 글을 쓰는 도중에 어떤 신문기사를 보았다. 모 대학의 간호학부 교수 5명이 공동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다른 의학적인 처방 없이도 간호사나 보호자가 손을 잡아주는 ‘마음의 치료’를 해주면 수술환자의 심리적인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급격히 줄어 환자 회복에 큰 효과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마찬가지로 출소자라는 ‘환자’에게 우리가 따스하게 손을 잡아주는 치료를 한다면 그들도 우리처럼 될 수 있을 것이다. 의무적으로 한 차례 손을 잡아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을 끌어안는 마음에서 수시로 손을 잡아준다면 많은 출소자들이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개미가 모두 부지런한 줄 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어느 개미 집단은 70%만 부지런할 뿐 나머지 30%는 아무 일도 안 하고 게으름을 피운다고 한다. 게으름을 피우는 개미들을 골라 한 집단을 만들면 또다시 70% 정도만 부지런히 일하고 나머지는 게으름을 피운다고 한다. 반복하여 수차례 같은 실험을 해도 신기할 만큼 같은 비율의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손을 잡아준다고 해서 출소자 형제를 모두 구제할 수는 없다. 개미의 예에서 보듯 일정 비율만 구제할 뿐이다. 그러나 구제되지 못한 형제들에게 다시 꾸준히 손을 내민다면, 그중 일정 비율만큼은 구제할 수 있지 않을까?
예정된 시간이 지나 ‘평화의 집’을 떠나게 되었다. 한 달을 보내고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나를 맞이하던 가족들의 모습. 오랜 기간 함께 살아온 가족인데도 잠시 떠나 있다 보니 새롭게 느껴졌다. 이제 다시 무엇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잠자리에 들면서 ‘가족이 없는, 가족이 있어도 함께할 수 없는 평화의 집 식구들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 동안 정들었던 모양이다.
‘평화의 집’을 운영하는 신부님들은 민영교도소를 꿈꾸고 있다. 민영교도소를 만들어 출소자들의 사회적응을 돕는 프로그램을 실시하자는 것이다. 신부님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사회적응만이 재범을 줄이는 길임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정부는 현재 이에 관한 법과 시행령을 만들었지만, 사회적 관심은 낮은 상태다.
밤늦게 생맥주집에서 ‘평화의 집’ 운영문제를 놓고 고뇌하던 신부님들에게, 같이 지내면서 편안하게 대해주었던 형제들에게, 그리고 한 달간의 가출을 허락한 가족들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