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가 보도되자 서울과 평양은 동시에 깜짝 놀랐다. 우리 정보당국은 이런 얘기를 발설한 사람을 집중적으로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 추적망에 포착된 사람이 바로 국정원의 안아무개 과장(40)이었다. 그가 정기적으로 만나 정보를 넘겨준 사람은 미국대사관의 CIA요원 윤아무개씨(50)였다. 1998년 8월3일 한국에 부임한 윤씨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공군 장교로 전역한 뒤, 고등학교 교련교사를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부인과 두 자녀가 미국에 있으나, 한국에 혼자 와서 근무했다. 직급은 1등서기관으로 한국인 출신 치고는 승진이 빨랐다.
윤씨는 8월4일 비밀리에 한국을 빠져나갔다. 그는 출국하기 며칠 전 “최소한의 교류 차원으로 안과장을 만난 사실은 있다. 언론에 보도된 것은 실체와는 거리가 멀고 확대·과장·왜곡되었다. 내가 아는 안과장은 국가관이 투철하고 국정원 내에서도 인정받아 빠르게 진급한 사람이었다. 누가 시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일은 정말 아쉽다. 다만 북한 정보에 관한 한 동맹국가인 한국이 미국과 공유의 폭을 넓히는 것이 양국이 대북정책을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국정원도 윤씨의 발언대로 안과장이 대단한 정보를 유출하지는 않았다고 발표했다. 한편 미국 CIA는 서울에 파견되어 있는 CIA요원들에게 “한국 국가정보원 요원과 공식 업무 외에는 접촉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국은 한국을 낱낱이 알고 있다
한·미 두 나라 정보기관이 서로 불신하고 접촉 불가 지침을 내리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1977년 코리아 게이트 사건 이후 처음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미국에서 망명을 선언하고 박정희 정권의 비행과 KCIA 요원 30여명이 미국에서 정보를 탐지하고 박정희 반대 운동을 펴고 있는 교포들을 감시하고 탄압한다는 사실을 폭로한 바 있다. 이 사건 이후 한·미 두 나라는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두 나라 정보기관은 신뢰감을 회복하여 정보기관 책임자가 일년에 한 번씩 서울과 워싱턴에서 회담을 갖고 있다.
국정원은 얼버무리고 있지만 주한 미국대사관은 윤과장을 통해 핵심 대북 정보를 입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DC로 돌아간 윤씨를 만난 워싱턴 소식통은 “미국은 안과장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사이의 비밀 협상 내용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미국이 파악한 내용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남북한 사이의 ‘평화선언’이었다”고 말했다. 워싱턴의 이 소식통은 평화협정과 평화선언은 엄청나게 다르다고 설명했다.
평화협정은 통일을 하기 전 남북한이 똑같이 주권을 가지고 사이 좋은 이웃국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반도에 두 개의 주권국가가 존재하는 것을 말하며 남북한이 외국과 같은 자격으로 인적교류, 통상, 문화 교류를 통해 서로 이해하고 점진적인 통합으로 나아가는 협정이다. 이는 선언이나 문서로 되는 것이 아니고 상호 군사력을 감축하고 휴전선을 국경선으로 전환하고 유엔의 중재와 현장 검증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며 통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평화선언은 휴전 상태가 종전 상태로 바뀌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평화선언은 휴전협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 이럴 경우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할 명분이 없어진다. 미군 없는 한반도는 급격한 힘의 공백이 예상된다. 북한은 이런 공백을 노릴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군축 없는 평화선언은 아무런 뜻이 없다는 것이다.
주한미국대사관이 한국 내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단위는 대사관의 공식조직, ORS(Office of Regional Study:지역조사과), FBIS(해외방송청취반), DIA(미국방정보국), 501정보부대, OSI(Office of Special Investigation:미공군방첩수사대) 등이다. ORS는 국정원 안과장과 접촉했던 윤씨가 일했던 부서로 이곳이 ‘CIA 한국지부’인데, 인원만 수십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가운데 ORS와 FBIS는 세종로 미대사관 내에 설치되어 있고, DIA, 501정보부대, OSI는 모두 서울 용산 미8군 영내에 있는 군사정보기관이다. 501정보부대는 주로 특수장비를 동원하여 국내의 주요 통신을 감청한다.
이 조직들은 대부분 막후에서 활동한다.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곳은 미국대사관 공식조직이다. 그 가운데 정치과가 가장 민감한 현안을 다루는데, 현재 데이비드 스트라우브(David Straub) 정치참사관 밑에 1등서기관 세 명이 ▲북한, 군사문제 ▲북한, 정치문제 ▲한반도 외교, 통일 문제로 업무를 나누어 맡고 있다. 이 1등 서기관 세 명 밑에 스태프들이 붙어 있다. 정치과는 보안 때문에 한국인 직원(Local Staff)은 여직원 두 명만 쓴다.
미국대사관과 CIA 책임자, 정보부대의 핵심 정보참모들은 매주 금요일, 서울 용산 미군기지 안에 있는 한 식당에서 연석간담회를 가진다. 이 자리에서 각 단위가 수집한 한 주일 동안의 한반도 정세 전반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다.
미국대사관이 한국 내 여론을 수렴하는 가장 큰 줄기는 ‘서울 포럼’과 ‘Pong Club’이다. 이홍구 전주미대사가 회장으로 있는 서울 포럼은 전직 외무관리와 국내 유력 기업인, 언론인, 학자 등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 회원들은 대부분 보수 성향이 짙다. Pong Club은 회장인 봉두완씨의 성(姓)을 따서 지었는데 워싱턴 특파원을 역임한 언론인이 회원이다. 대사나 참사관 등 미국대사관의 외교관이 새로 서울에 부임할 때면 반드시 이 두 단체와 상견례를 갖는다.
이 밖에도 대사와 부대사, 정치참사관, 미문화원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서울 정동에 있는 대사관저에 국내 주요 인사를 초청해 식사(Dinner)를 같이한다. 호텔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한국의 호텔은 값이 너무 비싸서, 그 비용이면 관저에서 훨씬 많은 팀을 초대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다. 또 이들은 주말이면 한국 인사들과 자주 골프 모임을 갖는다.
미대사관은 미국의 외교정책을 한국에 알리고, 한국의 언론을 통해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USIS(미국대사관 공보원)라는 조직을 서울 용산 미8군 기지 옆인 남영동에 두고 있다. 이 조직은 과거 전국의 주요 도시에 흩어져 있던 미문화원 조직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다.
USIS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한국 언론을 분석하는 것이다. 한국 내의 주요 신문과 방송·잡지 등 언론을 검색해 미국과 관련된 내용이 나오면 한국인 직원이 이를 영역(英譯)해서 대사와 미8군, 미상공회의소에 매일 보고한다. 특이한 점은 미대사관이 이런 언론 분석을 영국 대사관, 프랑스 대사관, 호주 대사관, 캐나다 대사관에도 돌려서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 덕택에 한국관련 주요 정치 현안에 대해 앵글로색슨계 공관들은 즉각 한목소리로 대응할 수 있다.
또 미대사관과 USIS는 매년 외교기사를 쓰는 기자들과 한미관계 현안에 관한 주제로 1박2일의 세미나를 갖는다. 주로 온천이 있는 지방 소도시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데, 빡빡한 세미나 일정을 끝낸 뒤, 대사·부대사·주요 참사관·서기관 등 미국의 외교관들과 참석 기자들은 온천에서 목욕을 같이 하고 파티를 갖는다. 친분을 다지며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다.
USIS는 산하에 Information Resource Center(IRC:미국대사관 자료정보센터)를 두고 기자들에게 미국의 외교정책을 자세하게 전하는 자료를 서비스한다. 콜린 파월 장관이 아시아 순방길에서 방문국 외무관료와 회담을 가졌다면 기침소리까지 씌어 있는 회담록 전문이 거의 실시간으로 외교 기사를 쓰는 기자들에게 이메일로 전송된다. 스트레이트 기사를 쓸 수 있는 자료뿐만 아니라, 미 상원 청문회 발언록,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의 브리핑, 주요 연구소의 논문 등 미국의 외교정책을 가늠할 수 있는 주요 자료들이 그때 그 때 제공된다.
이 서비스를 받는 기자들은 누구나, 한국의 어느 정부 기관이나 기업도 USIS만큼 열심히 활동하는 곳은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자료가 얼마나 많이 오는지 해당 기자들이 다 읽어내지 못할 지경이다.
첫번째 관심사는 남북관계
이러한 미국대사관의 한국 내 정보활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남북관계와 관련된 것이다. 미대사관은 한국정부가 추진하는 햇볕정책의 세세한 부분까지 탐지해, 미국에 이익에 맞게끔 대응하고 있다.
남북관계와 관련하여 미대사관이 최근 주목한 것은 여당 외곽 연구소에서 터져나온 ‘통일헌법’ 논의다. 지난 7월6일 민주당 국회의원 79명이 참여하고 있는 민주당의 외곽기구 새시대전략연구소는 통일헌법 논의를 제기했다.
이 연구소의 이사장인 김원길 보건복지부 장관은 “그 동안 학계에 국한되어온 통일헌법 논의를 여야간 논의의 장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주제발표를 맡은 박상철 경기대 통일안보대학원 교수도 “양측 의회간 합의는 시스템이 달라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남북 정상회담을 제도화하고 통일논의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도 통일헌법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통일헌법 논의가 나온 뒤 워싱턴은 주한 미국대사관에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정치권·언론·민간연구단체가 남북간 통일 방안을 활발히 연구할 텐데 이를 세세히 파악해서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미대사관은 만약 김정일 위원장이 서울을 답방하면 한반도 문제의 키워드는 ‘교류’와 ‘협력’이 아니라 ‘통일’이 될 것이라는 전제 아래 이처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미국대사관은 지난해 12월 제4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북한이 남측에 요청한 50만kW 전력지원 문제도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정세현 국가정보원장 통일특별보좌역(전 통일부 차관)이 최근 이스트아시안 리뷰 연구보고서에 기고한 ‘제1차 남북정상회담의 성과와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전망과 과제’라는 글에서 밝히고 있다.
정세현 특보는 북한 지원과 관련해 큰 이슈는 50만kW 전력을 지원하는 문제인데, 남한측에서는 협의할 용의가 있었으나 미국의 요청으로 보류된 상태라고 밝혔다.
실제로 미대사관 관계자는 “대북 전력 지원은 KEDO 틀 안에서 다자간에 협의할 사안이다.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카드인데 한국정부가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미대사관이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대북 전력 지원은 북·미간 대화에서 미국이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주요한 카드 가운데 하나다. 이를 한국이 써버리면 미국의 협상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한반도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미대사관의 정보수집과 분석은 한국 국내에 그치지 않고 북한으로까지 확대된다. 미대사관이 북한 정보를 얻기 위해 주로 활용하는 단위는 미대사관 내에 설치된 ‘FBIS(해외방송청취반)’이다. 이 부서의 주된 업무는 대북 감청이다. 러시아에 파견된 외교관과 정보요원도 활용했겠지만 주한 미국대사관은 김정일과 푸틴 대통령 사이의 북·러 정상회담 내용도 샅샅이 파악하고 있다.
예를 들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이 모스크바 공동선언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다시 주장한 것에 대해서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는 이렇게 평가했다.
“김정일은 아마 서울 답방 약속을 연내에 이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는 주한미군 주둔 인정 발언을 번복하면서 여야 대립을 격화시켜 답방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명분을 축적하려 하는 것 같다. 김위원장은 푸틴과 회담시 답방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김위원장은 부시 행정부의 강경책을 문제 삼고 있는데, 김위원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모순이다. 입만 열면 한반도 문제는 외세를 배격하고 자주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김정일의 평소 주장에 어긋난다. 그런데 김정일의 발언에 한국의 일부 인사들이 동조하는 것이 문제다. 한국 정부 여당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워싱턴의 시각은 곱지 않다.”
이 관계자는 또 “김정일의 서울 답방 지연은 외부요인 때문이 아니다. 답방 문제를 놓고 한국의 여야간에 대립이 격화되는 것도 원인이겠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 내부 요인이다. 여러모로 볼 때 2000년 6·15 정상회담 당시에는 북한 내부에 해외파가 득세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군부가 주축이 된 강경파가 국면을 전환하고 있다. 지난 3월13일에 해외파는 김용순이 체포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현재 군부 강경파가 신중론을 내세우며 김위원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특히 김정일은 서울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세계 여론의 주목을 받아야 하는데, 여기에 대해 자신이 없고 부담스러운 것이다”고 말했다.
미국대사관은 이번 김정일-푸틴회담이 별 성과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회담의 핵심 의제는 북한이 러시아에 지고 있는 채무 상환과 S-300 지대공 미사일, 대공레이더 항법 시스템, 미그-29 전투기, T-80·T-90 부품 같은 러시아제 무기 구입 문제였다. 미국측은 푸틴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현금 직불을 제의했고 김정일 위원장은 15년 연불 상환으로 대응한 것으로 보고 있다. 푸틴은 이 대응에 화가 났고, 시종일관 김정일에 대해 소극적이고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미대사관이 파악한 북·러회담
미국대사관측에 따르면 북·러 회담에서 또 중요하게 논의된 것은 로켓 발사 사업이다. 미국측의 관측은 이렇다. 북한은 현재 통신위성 발사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북한은 이미 1970년대부터 계속된 스커드미사일 자체 개발과 대포동 1호 발사를 통해 로켓 기술을 축적하고 있다. 북한이 다음에 로켓을 발사한다면 아마 통신위성 실험을 목적으로 한 정지위성이 될 것이다. 단 북·미 관계가 악화되고 제네바 핵합의가 파기되면 김정일 위원장은 다탄두식 대륙간탄도탄(ICBM)을 시험 발사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북·미 대화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북한은 아마 두 번째 인공위성 발사 시험을 할 것이다. 북한은 산악지대가 많아서 전국적인 통신망을 효과적으로 구축하기 위해서라도 독자적인 통신위성이 필요하다. 정찰위성이나 과학관측위성은 다음 단계의 일이다.
북한은 장래에 거대한 인공위성 발사사업에 착수하여 외화벌이를 할 생각이라고 한다. 현재 세계 우주 관련 사업의 매상고는 엄청난 규모다. 종사자만 100만명이 넘는다. 중국과 러시아도 이 매력적인 위성 발사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러시아는 푸로턴로켓, 중국은 장정(長征)로켓을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의 로켓을 이용하면 인공위성을 아주 싸게 발사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의 록히드사는 러시아와 제휴하기 시작했다.
미국대사관 관계자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은 푸틴 대통령에게 러시아의 로켓 발사기술을 이전해주고 미사일 이동발사대를 지원해달라고 제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푸틴은 러시아의 기존 시설을 이용해서 위성을 대리발사하는 것은 허용할 수 있지만, 기술 이전과 이동발사대 지원은 곤란하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안다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이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러시아의 로켓 산업에 미국이 막대한 재정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켓 산업에 종사하는 과학자의 월급을 미국이 대고 있는 상황이니, 북한에 기술을 지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미국대사관이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의 옴스크 탱크공장 방문도 러시아 쪽에서 이를 거부해 무산됐다고 한다. 결국 김정일 위원장은 탱크공장을 보지 못하고 대신 맥주공장을 보는 것에 그쳐야 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으로 돌아가기 직전 푸틴 대통령을 다시 만난 것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문제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현재 지상군 4만5000명을 한국에 주둔시키고 있다. MD계획과 관련해서 이 지상군을 어떤 형태로 재편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펜타곤의 주요 과제 가운데 하나다. DMZ 전방에 전개된 주한미군 병력을 재조정하고, 해공군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지금까지 소개된 대략의 골자다. 지난 8월16일 데니스 블레어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방한한 것도 이런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리비어 대사대리가 배석한 가운데 8월17일 서울 정동의 미대사관저에서 미국에서 공부한 한국의 최고 외교 엘리트들과 식사를 했다. 이런 만남을 통해 미 국무부와 펜타곤은 주한미군의 재조정에 관한 논의를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미대사관이 남북한 문제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국내 정치권의 동향이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진행되는 국내 정치권의 움직임은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미대사관은 국내에서 발표되는 여론조사 결과를 낱낱이 수집하고 있다. 그러면서 차기 대선에서 여야의 승리 가능성을 저울질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미대사관이 YS의 행보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대사관의 판단으로는 YS가 여전히 영남권의 여론 향방에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권 분석 가운데 미대사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아무래도 집권 여당의 움직임이다. 미대사관은 지난 8월2일 동아일보 2면에 난 “美 때문에…’ 속끓는 與圈”기사를 영역해서 면밀히 분석했다. 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민주당의 한 핵심인사는 최근 사석에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다소 격한 어조로 ‘남북관계를 풀어가는데 미국이 사사건건 훼방을 놓고 있다’며 ‘남북관계가 현재 교착상태에 빠진 것도 미국의 방해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 인사는 또 ‘현재 남북간의 가장 큰 현안은 북한에 대한 전력지원 문제’라며 ‘그러나 미국 정부가 계속 협의를 피한 채 기다려 달라고만 이야기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사석이라고 하지만 집권당 핵심인사가 이처럼 노골적인 불만을 표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특히 지난 1월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대북한정책을 둘러싸고 계속 엇갈리고 있는 양측의 간극 때문에 민주당 내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이들의 대미관(對美觀)이 친미(親美)에서 비미(批美)로 바뀌어가는 듯한 인상마저 안겨주고 있다. …중략…
미 공화당 보수파 의원들이 중심이 돼 국내문제에 관여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데 대해서도 민주당 의원들은 몹시 불쾌해하고 있다. 특히 디펜스 포럼에 가입한 공화당 일부 의원들이 황장엽씨를 초청한데 이어, 미 하원의원 8명이 언론사 세무조사와 관련, 언론자유 억압을 우려하는 서한을 보낸 뒤 민주당의 분위기는 더욱 썰렁해졌다.”
미대사관은 또 같은 날짜 동아일보의 “與 수원 국정홍보대회…대선주자들 이총재 맹공”기사도 번역해서 공보자료로 활용했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주당은 1일 경기 수원시 수원문화예술회관에서 국정홍보대회를 갖고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대북정책 등을 맹공격했다. 이날 대회에서는 당내 ‘50대 트로이카’로 불리는 이인제·김근태 최고위원과 노무현 상임고문이 참석해 경쟁적으로 이총재를 성토했다.
▼노무현 상임고문=이총재는 민족적 자존심도 없이 조지 W 부시 미대통령의 대북정책을 그대로 복창하고, 공화당 일부 강경파 의원들에게 놀아나는 사대주의자다. 이총재는 98년 10월부터 2년간 영남집회만 10여 차례 가지는 등 지역분열을 조장해왔다.
▲이인제 최고위원=김대중 대통령이 지난해 분단 극복을 위해 무조건 평양에 갔듯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도 연내에 서울에 무조건 와야 한다. ‘정부가 북한에 퍼줬다’고 하는데 우리가 북한 주민을 지원한 것은 9000만달러로, 이는 한 해 음식물쓰레기 약 90억달러의 100분의 1일 뿐이다.
▼김근태 최고위원= 김 국방위원장은 올해 반드시 방한해야 한다. 김위원장이 내년 초에 오면 야당은 지방선거 정치공작을 위한 답방이라 할 것이고, 지방선거 직후에 오면 월드컵에 파묻혀 답방했는지도 모를 것이고, 월드컵대회 뒤에 오면 야당은 또 대선 정지작업용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실례를 들었지만, 이같은 보도를 통해 미국대사관은 민주당 대선주자 대부분이 반미 성향이 짙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미대사관이 한국의 차기 대선과 관련해서 대선 주자들을 관찰하는 틀은 ‘친미’인가 ‘반미’인가다. 현재까지 진행된 분석 가운데 중요한 것은 이들이 여권 대선 주자들에 대해서 상당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미국대사관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보수적인 대북관은 상당부분 미 공화당의 한반도 정책과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미대사관이 이회창 총재를 접촉하는 채널은 한나라당 정재문 의원과 조웅규 의원이다. 두 의원은 지난 5월 세계보수정당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해 공화당 의원을 중심으로 친분을 쌓았다.
정재문 의원은 미국대사관이 주최하는 어지간한 모임에는 꼬박꼬박 참석하고 있다. 조웅규 의원도 마찬가지다. 최근 조의원은 미8군사령관, 에번스 리비어 대사대리, 한나라당 의원간의 친선 골프를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제안은 미대사관측에서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국내 정치권의 동향과 관련해 현재 미대사관 정치과가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오는 10월에 실시될 재보선 선거다.
시민단체도 조사
미대사관의 최근 활동 가운데 또 눈에 띄는 점은 시민단체를 면밀히 주시하는 것이다. 미대사관은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언론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시민단체와 한국노총, 민주노총 등 각 국내 노동단체의 구성과 활동을 조사하고, 정부의 재정 지원 여부를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식통에 따르면 미대사관은 조사 결과 “시민단체의 57%가 회원수 500명 이하 소규모 단체다. 김대중 정부가 시민단체에 적극 의존하고 있는 것에 견주면 의외로 규모가 적다. 따라서 NGO가 국민 여론을 대변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결론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미대사관은 국내 NGO의 정책과 활동을 공식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성공회대 NGO대학원과 공동으로 시민단체 대표들을 초청해 심포지엄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시민단체측의 불가 통보로 무산되었다.
미대사관 정치과는 한국의 인권, 노동 상황도 분석하고 있다. 이 결과를 내년 2월 미 국무부가 발표할 ‘2001 세계 인권보고서’에 반영할 계획이다.
미 국무부가 매년 2월 말 발표하는 세계인권보고서는 재외공관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토대로 만들어진다. 지난해까지는 전 재외공관의 인권보고서 마감 시한이 10월 말이었으나 올해는 10월1일로 당겨졌다. ‘2001 세계 인권보고서’와 관련해서 미대사관이 주목하고 있는 아이템은 ▲공무원노조 결성 추진에 대한 한국정부의 대응 ▲탈북 귀순자 인권 관리 실태 ▲황장엽 문제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내 노동계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미국은 워싱턴의 관리를 직접 한국으로 파견해서 조사 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8월22일 방한하는 미국 노동부 통계국의 엘리자베드 테일러 국제협력관과 9월1∼8일 사이에 방한하는 미 노동부 국제노동국 타냐 라사 노동담당관의 임무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한국 노동부와 통계청 등을 방문해서 한국의 노동 현실, 노사관계, 노동통계 등을 파악할 계획이다.
탈북자 인권 실태는 한국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현지에서도 조사되고 있다. 지난 4월 초 미대사관 정치과의 아무개 북한 담당 1등서기관은 중국 내 탈북자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중국을 다녀왔다. 탈북자의 인권 문제를 미국이 북미 대화나 DJ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해 주요한 카드로 활용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황장엽씨 문제는 어떤 형태로든 ‘2001 세계 인권보고서’에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미 국무부의 시각은 내년도 보고서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현재로서는 정부의 황장엽씨 방미 불허를 ‘주거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주한미대사관의 한국 내 인권 관련 조사는 실제로 최근까지 한·미 양국간의 첨예한 외교 문제가 되고 있다. 지난 7월12일 미 국무부는 세계 82개국을 대상으로 인신매매 실태를 조사해서 한국을 최하등급인 인신매매 3등급 국가로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서 한국은 ‘미국 법규가 규정한 인신매매 근절 규정을 준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인신매매 퇴치를 위해 납득할 만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3등급 국가군’으로 분류되었다. 보고서가 밝힌 인신매매 3등국은 한국, 알바니아, 바레인, 벨로루시, 미얀마, 콩고민주공화국, 가봉, 그리스, 인도네시아 등이다. 보고서는 “한국은 인신매매의 주요 거래국이자 통과국”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인신매매 방지와 피해자들에 대한 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는 국가들에 대해 2003년부터 경제 제재를 부과할 방침이다.
인신매매 보고서가 나온 뒤 한국 외교 당국은 발칵 뒤집혔다. 외교통상부는 이 보고서는 사실무근이라고 미국 당국에 시정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7월19일 에번스 리비어 주한 미 대사대리는 “한국 정부가 미 국무부의 인신매매 보고서에서 지적한 잘못된 점을 수정하기 위해 조치를 취하고 미국과도 협의할 의향이 있음을 최근 알려왔다”고 말했다. 우리 외교통상부와 주한 미국대사관의 발표가 서로 다른데, 사실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미 국무부가 발표한 이 보고서는 바로 주한 미국대사관이 자체적으로 조사해 워싱턴에 올린 보고서를 기초로 만든 것이다. 주한 미국대사관 정치과는 이 보고서작성을 위해서 올해 초부터 국내의 매매춘 관련 단체들을 접촉했다. 이런 접촉을 통해 필리핀 여성들이 한국에 윤락녀로 팔려오는 현황과 러시아 여성들의 인신매매 실태를 조사했다.
‘신동아’는 미국대사관이 접촉한 국내 관련 단체 가운데 매매춘 여성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단체인 ‘한소리회’에 이 사실을 확인했다. 이 단체의 사무국장은 “지난 5월 말 미국대사관 직원에게서 두 차례 전화를 받았다. 그는 한국 내 외국인 인신매매 실태에 관한 자료를 오후 5시까지 달라고 요구했다. 당시에 나는 군산 출장중이어서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미대사관 직원은 서울 사무실에 직원이 없느냐고 물었다. 당시 상근 직원도 사무실에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인신매매 보고서는 내년 2월에 발표될 ‘2001 세계인권보고서’에도 첨가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힘은 정보경쟁력
미국은 서울 세종로의 대사관뿐만 아니라, 워싱턴 현지의 비공식 조직을 통해서도 한국 국내 정세를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 소식통에 따르면 최근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워싱턴의 한 연구기관이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후에 한국에서 벌어진 몇 가지 중요한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비밀리에 조사하고 있다고 한다.
이 연구기관의 조사요원 수명이 민간인 신분으로 지난 봄부터 한국에 체류중이며, 미국에 있는 요원들도 코메리칸 소사이어티(한국계 미국인 사회)에서 한반도 사태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캐려고 한국계 시민들을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연구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1월부터 7월까지 시민단체들이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모두 30여 차례 반미 시위를 벌였는데, 시위대의 사진을 분석한 결과 반미 시민단체의 이름만 다를 뿐, 시위대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겹치는 사례가 많았다는 것 등이다.
이처럼 미대사관의 한국 내 정세판단과 정보활동은 광범위하고 철두철미하다. 미국이 전세계를 경영하는 지도국가로 행세할 수 있는 것은 이런 활동 덕택이다. 과거 미국이 핵우산으로 세계를 지배했다면 앞으로는 정보우산으로 세계를 지배한다고 볼 수 있다. 활동도 집요하고 철두철미하지만, 웬만한 정보는 대사부터 하급직원까지 철저히 공유하는 것이 한국과는 다른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미대사관은 한 직책을 끝내고 다른 자리로 이임하면 재임 시기 활동에 대한 기록(Institutional Memory)을 후임자에게 고스란히 전한다. 이렇게 하면 새로 부임하는 직원도 별 어려움 없이 업무에 전념할 수 있는 것이다.
미대사관은 워싱턴에서 주요 인사가 방한하면 청와대에 해당 인사를 데리고 가서 배석한다. 눈여겨볼 점은 해당 인사가 한국의 정부 인사를 만나기 전에 대사가 직접 철저하게 한미관계와 한국의 정치·경제 현안에 대해 브리핑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한국 정부에 해달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이런 브리핑 덕택에 미국은 한국에 한목소리를 낼 수 있다.
이것이 세계를 경영하는 미국의 경쟁력이다. 워싱턴의 메사추세츠가 2450번지에 있는 주미 한국대사관이 주한 미국대사관만큼 활동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현재 한·미관계는 대북정책 때문에 삐걱거리고 있다. 우리 정부가 대응책을 세우려면 무엇보다 미국의 활동을 알아야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