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한약은 달이는 정성이 담겨야 약효가 좋다고 했다. 우리 땅에서 나는 약재도 아닌 중국산을 몇 t씩 함께 달이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사진은 특정 제품과 관계없음)
8월 초 우연한 기회에 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의수협)에서 나온 ‘2011년 원료의약품 수입현황’자료를 접하게 됐다. 의수협은 완제의약품, 원료의약품, 한약재, 의약외품 등의 수출입 업체로 구성된 사단법인이다. 원료의약품은 국내에서 제조되는 의약품의 원료가 되는 물질을 가리키는데, 이를 수입하려는 업체는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요구하는 자격요건을 갖춰야 한다.
원료의약품 수입현황을 보면 국내에서 시판되는 의약품에 어떤 재료가 얼마나 쓰이는지 훤히 알 수 있다. 수입현황 서류를 살피다 생약추출물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생약추출물이란 감초, 당귀, 쑥 등과 같은 약초(한약재, 원생약)를 달이고 졸여낸 정수나 이를 말려 수분을 뺀 건조물, 그것을 다시 빻은 가루 등 원생약을 1차 가공을 거쳐 농축한 것들을 가리킨다.
거의 완제품 상태로 수입
각 제약사는 이들 생약추출물을 들여와 일부 성분을 더 섞거나 희석하는 방법으로 드링크, 정제, 과립을 만들어 약국에 공급한다. 1t의 약초를 추출물 상태로 만들면 전체 부피와 무게가 최대 500분의 1로 줄기 때문에 제약사는 추출물을 주로 사용한다. 특히 관세와 물류비용 등을 크게 줄일 수 있어 제약사에서 쓰는 한약제제의 원료 수입품은 100% 추출물밖에 없다.
제약사가 만들어 약국에 제공하는 한약제제에는 생약제제와 천연물신약이 포함된다. 약사법은 한약을 한방 원리에 따라 배합해 제조한 의약품을 한약제제라고 하고, 생약을 서양의학의 원리에 따라 배합해 제조한 의약품은 생약제제로 구분한다. 이는 약품 허가상 분류기준이며 한약과 생약의 구분이 애매해 약국에서 판매될 때는 통칭 ‘약국용 한약’으로 불린다.
천연물신약은 천연물신약연구개발촉진법상의 개념으로 천연물 성분을 이용해 연구개발한 의약품 중 조성 성분, 효능 등이 새로운 의약품으로 규정돼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허가가 난 천연물신약의 원재료는 대부분 한약재이고 조성 성분과 효능도 한의학 처방을 차용한 것이 많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한방의 주인인 한의사에겐 처방권이 없고 양의사들만 이들 약을 처방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의사들은 양의사의 처방권을 없애고 자신들만이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즘 병의원에서 받은 처방을 보면 이들 천연물신약이 끼워 넣기 식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소비자인 환자 입장에서 단순하게 분류하면 약국에서 파는 한약 성분의 일반의약품은 한약제제고, 의사 처방을 받아야 하는 한약 성분의 전문의약품은 천연물신약이다.
의수협 생약추출물 수입현황 자료에는 우리가 평소 즐겨 먹거나 취재를 통해 알게 된 유명 한약제제가 즐비했다. 서양 생약인 허브로 분류되는 몇 개 품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중국산이었다. 감기약으로 유명한 갈근탕부터 마시는 소화제인 가스명수(까스명수), 살 빼는 약으로 유명해진 방풍통선산(살사라진 등)까지 있었다. 우리가 약국에서 사 먹는 약국 한방제제 원재료의 대부분이 수입현황 목록에 들어 있었다.
한의학 의서(醫書)에 나오는 주요 처방명만 열거해보면 사물탕(월경불순, 불임증 치료), 십전대보탕(건강증진), 반하사심탕(소화불량, 구역, 구토), 가미소요산(갱년기, 스트레스), 보중익기탕(건강증진), 가미귀비탕(빈혈, 불면증), 반하백출천마탕(어지러움, 두통), 반하후박탕(두통, 변비, 비만), 당귀작약산(월경불순, 월경통, 갱년기장애) 등 수십 종에 달한다. 이들은 아예 중국 공장에서 여러 한약재를 구입해 섞은 후 추출물을 만든 경우다. 사실상 의약품을 만들어 들여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나머지는 인삼, 쑥, 당귀, 길경, 반하 등 단일품목을 추출물 상태로 들여오는 경우다. 이들 추출물은 약국에서 한방제제 포장단위 그대로 팔리거나 과립제의 경우 약사가 한 포 단위로 포장해 파는 경우도 있다.
5100만 달러어치 수입
‘신동아’가 입수한 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의 2011년 생약추출물 수입 현황 자료.
2011년까지 시판허가가 난 천연물신약은 모두 7종으로 이 중 이탈리아산 봉독을 수입해 쓰는 아피톡신 주사를 제외하고 먹는 천연물신약은 모두 6종. 골관절염 치료제인 N제약의 S제품은 전량 중국산을 쓰고 있으며, 위염과 기능성 소화불량증 치료에 각각 쓰이는 D제약의 S제품, M제품의 경우, 주재료는 중국산을 수입해 쓰고 일부만 국내산 한약재를 첨가하고 있다. 나머지 3개 제품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각 제약업체가 수입하는 생약추출물의 양은 엄청나다. 지난 한 해 678t을 수입했다. 금액으로는 5100만 달러. 이는 2010년 약용한약재 총수입 금액인 8100만 달러의 60%를 이상을 차지한다. 전체 약용한약재 총 수입량은 1만7569t에 달하지만 이 중에는 무게가 많이 나가는 식물 상태의 원생약이 많아 수입 생약추출물과는 산술적인 비교가 어렵다. 한 한약재 수입상은 “10t 분량의 원생약을 엑기스로 만들면 20kg 들이 드럼통 절반이 조금 넘게 찬다. 생약추출물은 어떤 형태로 가공했느냐에 따라 무게와 부피가 현격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원생약과는 사실상 비교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한약제제 제조사 측은 “중국산 추출물 원액을 중국 공장에서 수입해 쓰는 건 맞다. 하지만 중국 한약재 추출물의 경우 계약재배에서 추출물을 만드는 공정에 이르기까지 식약청의 허가하에 우수의약품 품질관리기준(GMP)에 따라 제약사가 직접 관리하고 있어 품질과 안전성에는 문제가 전혀 없다. 오히려 국내산보다 더 우수하다”고 해명한다. 오히려 천연물신약 제조회사인 N제약측은 “현재 각 약재 추출물을 따로 수입하고 있지만 매출이 확대되면 중국에 GMP 관리 기준에 맞는 계약재배지와 추출물 공장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동안 이들 한약(생약)제제의 주원료가 중국산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채소나 과일, 쇠고기, 돼지고기 심지어는 건강기능식품(건기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식품에 대해서는 원산지표시제가 실시되고 있지만 의약품에는 원료의 수입지를 밝혀야 하는 의무조항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같은 중국산 원료로 만들었지만 포함된 추출물의 용량에 따라 건기식과 한약제제로 출시되는 제품의 경우 건기식에는 원산지표시를 한 반면, 의약품에는 하지 않은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대한약사회 관계자는 “제약사가 공급하는 한약제제에 원산지가 쓰여 있지 않기 때문에 약사들은 약의 원료로 어느 나라 것이 쓰였는지 실제 알 수가 없다. 한약제제의 원료 대부분이 중국산이라는 것은 약사들도 잘 모르던 사실이다. 충격적이다”고 말했다. 반면, 한의원과 한방병원에 공급되는 중국산 한약재는 공급업자가 포장지에 원산지를 표시해 납품하고 있다. 수입산을 쓰고 안 쓰고는 한의사의 양심에 달려 있는 셈이다. 한의원 중에는 음식점처럼 자신들이 쓰는 주요 한약재의 원산지를 표시해둔 곳도 있다.
수입금지 한약재도 수입
각 제약사의 중국산 한약재 사용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곳은 국산약초 재배 농가다. 중국산 한약재의 범람으로 가뜩이나 설자리를 잃은 마당에 각 제약사가 한약제제(천연물신약 포함)의 원료 구입처를 중국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생약 생산자 연합단체인 한국생약협회 남기철 회장은 “제약사가 만드는 한약제제에 중국산이 많이 들어간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지는 몰랐다”며 “제약회사의 중국산 한약재 수입 현황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한 후 적극적으로 대응해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한의원과 한방병원에 공급되는 한약재의 경우 중국산의 무차별 수입을 막기 위해 제도적으로 수급조절품목이라도 두고 있지만 제약사의 수입 한약재에는 이런 제한조치도 없어 속수무책인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수급조절품목이란 정부가 국산 한약재를 보호하기 위해 수입금지 품목을 지정하는 제도로, 1989년부터 실시해오고 있지만 해마다 그 수가 줄어 1993년 70개 품목이던 것이 2006년부터는 14개 품목으로 줄었다.
시호, 맥문동, 황금, 백수오, 구기자, 당귀, 산수유, 오미자, 작약, 지황(생건), 천궁, 천마, 택사, 황기 등이 그것이다. 정부는 약초 재배 농가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내 생산량이 줄었다는 이유로 올해 백수오와 시호를 수급조절품목에서 제외하고, 2013년에는 택사와 황금을, 2014년에는 맥문동, 지황, 천마를 제외키로 했다. 2014년이 되면 수급조절품목이 7개로 줄어들게 되는 셈이다.
문제는 제약사가 수입하는 한약재에는 법적으로 이런 제한규정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의수협의 생약추출물 수입현황 자료에 따르면 각 제약회사는 2011년 1년 동안 한약재 수급조절품목에 해당하는 14개 한약재를 총 14t(약 26만 달러, 단일 약재 추출물 기준)가량 수입했다. 만약 여러 한약재가 한데 섞인 탕약추출물에 들어간 것까지 합치면 수입물량은 엄청나게 늘어난다.
생약추출물 수입 허가를 담당하는 식약청 관계자는 “한약제제의 시판 허가 당시 현지 원생약 재배농가, 가공 수입업체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거쳤기 때문에 중국산이라고 해도 안전성과 유효성엔 별문제가 없다. 제약사로 들어가는 원료의약품에 대한 품목 수입 제한과 원산지표시 문제는 정책적 판단의 부분이라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다”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