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세태, ‘지정학’ 개념 오·남용 만연
‘지리 시대’ 가고 ‘시장 시대’ 오다
오늘날 세계 갈등 대부분은 시장·경제 문제
국경선 지역에만 간간이 남아 있는 ‘제국의 유산’
대한민국, 지정학 시각 넘어 미래 시장 주인공 돼야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각종 가치사슬로 연결된 ‘시장’에 의해 움직인다. [Gettyimage]
요즘에는 지정학이라는 말이 그저 갈등이 잠재하는 지역과 분야의 국제정치 정도로 쓰이는 등 오·남용 될 때가 많다. 대표적 오류가 국가관계에 지리가 중심에 있지 않은데도 지정학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것이다. 예컨대 1980년대 미국과 일본의 무역분쟁을 지정학 리스크로 해석, 곧 미일 간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예측한 사람들이 있었다. 시장에서의 갈등·분쟁을 지리적 갈등·분쟁으로 치환하는 지정학적 논리가 당시엔 꽤 유행한 까닭이다.
현재 진행되는 미·중 갈등도 지정학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올해 출간된 세계경제포럼(Davos Forum)의 ‘지정학적 경쟁과 비즈니스 백서(Geopolitical Rivalry and Business, White Paper)’를 보면 기업들이 지정학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분류가 나와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것들이 ‘지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 및 국제정치’인지 의아하게 생각할 만한 것이 많다. 예컨대 중국이 외국 기업을 대하는 태도, 국제법을 위반한 국가에 대한 제재, 유럽에서의 포퓰리즘·민족주의, 세계경제의 분절화, 코로나 팬데믹 이후 공급망 문제, 희토류 등 주요 자원 확보의 문제, 공장의 리쇼어링(reshoring), 경쟁 국가의 산업정책, 주요 전략 기술의 수출 규제, 보호무역, 시장 접근의 문제 등이다.
물론 이 가운데 많은 것이 미·중 갈등에서 파생한 건 맞지만 그와 상관없는, 예를 들자면 유럽의 포퓰리즘·민족주의,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공급망 문제 등도 지정학의 문제로 거론하고 있다. 이들은 일견 지리가 핵심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면 그 근원엔 지리가 아닌, 시장과 경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지리가 문제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 아니라, 시장·경제와 같은 좀 더 근본적 원인 때문에 지리 문제가 부각되는 것이다. 이처럼 원인과 결과, 혹은 논리상 선후 문제가 뒤바뀌는 경우가 많다.
지리 문제? 시장·경제 문제!
2019년 10월 19일 영국 런던 의사당 인근에서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제2의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시위를 열고 있다. [AP 뉴시스]
미국이 상하이(上海)와 선전(深圳)을 식민지로 만들고 신장·위구르를 점령해 중국을 군사적으로 포위, 중국을 먹는 전략을 짜고 있는 게 아니다. 거꾸로 중국이 미국을 캘리포니아부터 점령, 동진하는 계획을 짜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이러한 전략이 실제로 수립되고 양국의 영토를 둘러싼 미·중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면, 문자 그대로 ‘지정학적’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의 포퓰리즘, 민족주의 역시 그러하다. 유럽에서 발생하는 극우적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의 근원은 역시 시장·경제에 있다. 이는 민족주의적 이유가 결합해 유럽연합을 탈퇴한 영국의 ‘브렉시트’도 해당한다.
세계화로 인해 각국 경제가 국제경제에 노출되면서 경쟁력 없는 부분은 구조조정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경쟁력 있는 몇 개 분야와 도시만 부유해지면서 생겨나는 문제를 포퓰리즘과 민족주의로 치환해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최근 유럽, 심지어 미국에서도 보인다.
또 19세기, 20세기 초 유럽 제국주의의 산물인 식민지가 독립한 후 이들 국가에 대한 포용 정책, 자국의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고 추진된 개방적 이민정책에 대한 극우적 반감도 결국은 시장과 경제의 문제였다. 과거엔 다른 국가의 영토, 즉 지리를 빼앗는 제국주의 세력이 극우 세력이었다면, 지금은 이런 지리적 욕심은 사라지고 오히려 자국의 문을 걸어 잠그는 세력이 극우 세력이 됐다. 지리가 아닌, 자국의 시장과 사회를 지키려는 움직임인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공급망 문제 역시 일차적으로 시장과 경제의 문제고, 지리적 문제는 부차적 변수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재앙으로 시장과 공급망이 닫히면, 당장 자국의 영토가 아니라 시장과 경제가 타격을 입는다. 단순히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국가 간 지리를 둘러싼 분쟁과 갈등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전쟁이 멈춘다. 다만 공급망을 재구축하기 위해서는 지리적 장애를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있는데, 이는 지리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일 뿐 지리를 차지하기 위해 국가 간 욕망이 부딪치는 지점이 아니다.
국가의 산업정책, 전략기술 수출 규제, 보호무역 등도 지리를 둘러싼 욕망의 충돌이 아니라 시장·경제 문제다. 자국 시장을 보호하고, 경쟁력을 제고하는 정책이 어떻게 지리를 둘러싼 분쟁이고 갈등인가. 국가가 지구상의 특정 지리를 차지하고 있는 단위라는 이유로 국가 간 갈등과 충돌을 모두 지리적 충돌로 본다면 이는 표피만 보는, 본질을 보지 못하는 분석이다.
탈냉전 이후 국제정치의 주요 무대는 지리라는 공간 위에 인간이 만든 새로운 플랫폼, 즉 ‘시장’이 됐다. 국가가 더 유리한 지리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다툼에 몰두하기보다는 시장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기업과 더불어 경쟁하는 것이 현 국제정치의 진면목이다. 그래서 지리적으로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대한민국, 싱가포르, 대만이 부강해질 수 있게 된 것이고, 지리적으로 풍요로운 브라질·멕시코·튀르키예, 심지어 이탈리아도 어느 순간 쇠퇴할 수 있는 국제정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지정학 논리 매몰, 당연할 수도 있으나…
그렇다면 지정학은 이제 인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유물이 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지정학은 20세기 전반까지도 국제정치의 본류로서 지속했다. 즉 20세기 후반부터의 최근 몇십 년을 제외한 국제정치 역사 대부분이 ‘지정학의 역사’인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 역사의 대부분이 ‘지리’라는 플랫폼을 중심으로 경제활동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18세기 산업혁명이 본격화하기 전까지 인간은 비옥한 땅을 중심으로 농경 생활을 하면서 생존했다.
광대한 영토를 개척한 국가들을 우리는 고대문명의 발상지, 대륙의 ‘제국’이라고 부른다. 이집트제국, 페르시아제국, 중화제국, 인도제국, 로마제국 등이다. 반면 기후와 지리적 조건이 열악한 곳에 살던 유목 부족들은 호시탐탐 저 제국들을 노리고 침략, 이주를 감행했다. 훈족, 몽골족, 게르만족, 거란족, 투르크족 등이다.
연속되는 혹한 등의 기후변화가 생기면 유목민의 대이동이 생기고, 그에 따른 거대한 전쟁이 잇따르게 됐다. 그 이유 역시 지리적 조건에서 찾을 수 있다. 열악한 지리에서 풍요로운 지리로 이동하기 위해 유목민 세력이 제국을 침략하고, 제국은 그에 대한 방어와 토벌을 했다, 이것이 당시의 국제정치이자 지정학, ‘지리의 국제정치’였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기후변화는 지리적 이동을 유발했지만, 지금의 기후변화는 시장 조정을 유발한다는 사실이다. 현 시대와 옛 시대를 구별하는 단적인 예다.
중원의 유목민이 서쪽으로 이동해 로마제국 등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제국을 세우고, 또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중화제국을 차지한 역사를 보면서, 영국의 지정학자 매킨더(Mackinder·1861~1947)는 1904년 ‘역사의 지리축(The Geographical Pivot of History)’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심장지대 이론(Heartland Theory)’의 시조이자 지정학의 시조로 간주되곤 한다.
매킨더의 심장지대 이론은 “동유럽을 지배하는 자가 심장지대를 지배하고, 심장지대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섬(world island = 유라시아 대륙에 해당)’을 지배하고, 세계섬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설파한다. 그런데 이 이론의 근거는 유목민들의 지리적 활동 역사다. 산업화된 20세기에 전근대 유목민의 역사를 중심으로 지정학 이론을 만들었다는 것이 황당할 뿐이다. 게다가 ‘세계 지배’라는 원대한 목표를 거론하고 있다는 것 역시 당시의 상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오늘날 지정학 리스크 = 제국의 유산
매킨더의 심장지대 이론 이후 스파이크만의 림랜드 이론, 하우스호퍼의 생활공간 이론(lebensraum) 등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지정학 이론이 계속 나왔는데, 이 이론들은 모두 특정 지리를 손에 넣어야 한다는 목표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19세기에 횡행한 제국주의 역시 지정학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지정학이라기보다는 지경학(地經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그러나 제국들이 자국 시장의 확대를 위해 다른 지역의 영토를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지리를 둘러싼 국제정치였음은 분명하다. 이 제국주의 역사는 과거의 해양제국, 즉 대륙의 제국으로부터 차단된 지역의 해양국가들이 바닷길을 개척해 부를 축적한, 또 다른 지정학의 역사와도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지정학의 전통을 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8세기 산업혁명과 그 이후의 자본주의 근대화는 ‘지리의 역사’를 ‘시장의 역사’로 급격하게 바꿨다. 이 시장이 국가 간 다자주의 협약을 중심으로, 전 지구적으로 확산한 것이 바로 20세기 후반 탈냉전 이후 ‘자유주의 국제질서’다. 즉 지정학을 벗어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역사는 아직 100년도 안 된 역사이며, 인류 역사에서 차지하는 시간이 극히 짧다. 인간의 사고가 아직 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관성적으로 지정학의 논리에 매몰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시대, 즉 지리가 아니라 시장의 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지정학의 논리·리스크가 남아 있는 지역 혹은 이슈가 있다. 이는 모두 19세기·20세기의 제국주의가 남긴 유산이다. 모두 국경선과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9월 18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환경보건시민센터, 서울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한 환경단체 활동가들이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하고 있다. [뉴스1]
대한민국 주무대는 ‘세계시장’
지금의 국경선 문제는 제국의 영토 확장이라는 과거의 지정학과는 다른 논리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어디까지가 우리의 땅이고 역사인지를 획정하는 지리적 범위의 문제이기에 지리를 둘러싼 분쟁임은 틀림없다.
국경선 지역을 제외하고는, 현대 국제정치를 구성하는 주요 국가들은 지리가 아닌 시장이라는 플랫폼 위에서 매일같이 본게임을 하고 있다. 또 이를 위해 주권의 일부를 희생하는 다양한 통상조약과 지역 협력 기구를 만들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아예 국경선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시장 중심의 ‘유럽연합’이라는 거대한 실험까지 하고 있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유럽 통합이라는 탈(脫)주권 실험을 비정상적 현상으로 여겼는데, 불과 20~30년 만에 주권을 주장하면서 유럽연합을 탈퇴한 영국의 민족주의를 ‘비정상’이라고 말하는 시대가 됐다. 세상은 이렇게 빨리 변한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지정학을 국제정치를 의미하는 용어로 좀 쓰는 게 뭐가 문제냐”고. 하지만 말이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다. 지정학이 국제정치로 이해되면 우리는 아직도 한 국가가 타국의 주권을 뺏고, 식민지로 만들려 계획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투키디데스의 함정’ 개념을 만든 고대 그리스 사상가 투키디데스. [동아DB]
하지만 수많은 식민지가 독립해서 주권국가로 재탄생했듯이, 냉전에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방이 동유럽으로 진군하지 않았듯이, 유럽의 극우가 오히려 영토의 문을 걸어 잠그듯이, 현시대는 지리를 두고 국가 간 제로섬게임을 벌이는 ‘국제정치 시대’가 아니다. 시장을 놓고 더 큰 공동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시장 시대’다. 게다가 그 시장은 ‘사이버 공간’이라는 영역으로 진화하면서 지리라는 공간을 또 한번 뛰어넘고 있다.
대한민국에 북한의 위협은 아직 지정학적 예외지만, 이제 우리나라의 주무대는 한반도라는 제한된 지리가 아니라 전 지구와 사이버 공간에 존재하는 세계시장이다. 과거의 지정학과 제국주의의 시각에서 해방돼 이제는 미래 시장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
이근
● 1963년 출생
●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정치학 박사
● 외교안보연구원(국립외교원) 교수
●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한국위원회 의장
● 한국국제교류재단(KF) 이사장
● 現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저서: ‘도발하라’ ‘대한민국 넥스트 레벨’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