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호

[3D] 해녀도, 스님도, 학생도 ‘독립’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광복 80년 : 항일의 기억] 제주시 제주항일기념관

  • 이진수 기자 h2o@donga.com

    입력2025-08-15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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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년 법정사 무장 저항이 제주 항일운동 효시

    • 3·1운동 직후 3월 21일부터 나흘 동안 이어진 ‘조천만세운동’

    • 해녀들이 벌인 항일 시위, 규모와 조직력에서 가장 강력

    올해는 대한민국이 일제강점에서 벗어나 빛을 되찾은 지 꼭 80년이 되는 해다. ‘신동아’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전국 항일 관련 현충 시설을 찾아 소개하는 ‘광복 80년 : 항일의 기억’ 시리즈를 연재한다. 이와 함께 각 현충 시설에 대한 디지털 트윈(리얼 3D VR 디지털 미디어)을 제작해 공개한다. <편집자 주>

    제주항일기념관 1층 중앙에 놓인 ‘5인의 군상 상징 조형물’이다. 홍중식 기자

    제주항일기념관 1층 중앙에 놓인 ‘5인의 군상 상징 조형물’이다. 홍중식 기자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제주항일기념관] 바로가기

    아기를 품에 안고 정면을 응시하는 여인, 깃발을 들고 힘차게 외치는 사람들….

    제주 조천읍에 자리한 제주항일기념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5인의 군상 상징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조형물의 팔각형 밑면은 제주 지형을 본떴고, 거친 암석과 파도 형상은 섬의 척박한 환경과 일제 침탈을 상징한다. 왼쪽 모자상을 중심으로 한 군상은 제주인의 항일 정신과 후손에게 자주독립의 뜻을 전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항일의 함성, 서귀포에서 조천으로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항거해 독립선언서를 발표했고,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보다 앞서 한반도 남단의 제주에서도 항일의 움직임이 있었다. 경북 경주의 기림사에서 수행하던 승려 김연일은 “제주는 우리나라의 닻”이라며 독립운동의 불씨를 제주에서 지펴야 전국으로 번질 수 있다고 믿었고, 서귀포 법정사로 내려와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제주의 항일운동은 수도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조명됐지만, 법정사 항일운동부터 조천 만세운동, 해녀 항일운동으로 이어지는 ‘제주의 3대 항일운동’은 그 정신의 깊이도, 규모의 크기도 결코 작지 않다.

    제주 항일운동의 시작은 서귀포에서 먼저 불붙었다. 1918년 10월 법정사에서 무장 저항이 일어났다. 주지 김연일은 선도교 신도, 불교계, 주민 700여 명과 함께 일제의 경제 침탈에 맞섰고, 중문주재소를 습격해 주재소장 요시하라(吉原)를 포박하고 건물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은 3·1운동보다 앞선 단일 투쟁 가운데 최대 규모로, 제주인의 항거 의지를 또렷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당시 미밋동산이라고 불린 조천만세동산 성역화 공원에는 3·1 독립운동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홍중식 기자

    당시 미밋동산이라고 불린 조천만세동산 성역화 공원에는 3·1 독립운동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홍중식 기자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뒤 제주의 항일운동은 조천에서 다시 타올랐다. 3월 21일부터 나흘 동안 이어진 ‘조천만세운동’은 독립 선언 이후 제주에서 가장 먼저 벌어진 만세운동이었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휘문고 학생 김장환은 독립선언서를 품고 제주로 피신했고, 그의 숙부 김시범과 당숙 김시은은 함께 거사를 준비했다.

    이들은 23명의 동지를 모아 김시범의 큰형이자 당시 제주도민에게 존경받던 유림 김시우의 기일인 3월 21일에 ‘조천만세동산 성역화 공원(미밋동산)’에서 첫 시위를 벌였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조천 시내를 행진한 이들의 외침은 조천 오일장에서 열린 4차 시위까지 이어졌고, 1500여 명의 군중이 함께했다. 현경숙 제주항일기념관 문화해설사는 “주동자들이 체포되면서 운동은 마무리됐지만 조천에서 시작된 항거의 불씨는 제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고 전했다.

    제주항일기념관은 이 모든 항일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공간이다. 1997년 광복 52주년을 맞아 문을 연 이곳은 조천만세동산 성역화 추진위원회와 재일제주인들의 기부로 만들었다. 추진위는 조천만세운동 이후 항일운동의 민족정기를 이어가자는 염원을 담아 1988년에 결성했다. 현경숙 문화해설사는 “김성칠·김대칠 형제가 부지를 무상으로 내놓았고, 거액을 쾌척한 김봉각 씨 같은 재일교포들의 손길 덕분에 지금의 기념관이 완성될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기념관은 현재 제주 전역의 독립운동 기록을 모아 전시하고 있으며, 올바른 역사 인식과 애국정신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교육의 장으로 쓰이고 있다.

    제주항일기념관 외관. 홍중식 기자

    제주항일기념관 외관. 홍중식 기자

    해녀들의 가장 강력한 저항

    조천만세운동 이후에도 제주의 항일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했고, 청년들은 단체를 꾸려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그 가운데 1930년대 해녀들이 벌인 항일 시위는 규모와 조직력 면에서 가장 강력한 저항이었다.

    1932년 1월 7일 구좌읍 세화리 장날. 해녀들은 일제 어업조합의 횡포에 맞서 집단 시위에 나섰다. 당시 제주 해산물은 일본 본토에서도 인기를 끌었고, 해녀들은 조합비와 헐값 수매에 시달려야 했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1920년 4월에 만든 ‘제주해녀어업조합’마저 일본 상인과 객주 중심의 어용 조직으로 변했고, 성산포·하도리 일대에서는 지정가보다 낮은 가격에 해산물을 강제로 넘겨야 했다.

    현경숙 문화해설사는 “일제가 해산물을 싹쓸이한 탓에 제주 바다에 해물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해녀들은 ‘질병이나 다른 이유로 입어를 못하는 자에게는 조합비 면제’ ‘(제주)도사(島司)의 어업조합장 겸직 반대’ 등 요구 조건을 내걸고 시위에 나섰다. 1932년 1월 12일 이들은 제주도사 다쿠치 데이키가 관할 지역을 처음 시찰한다는 소식을 듣고 종달리, 세화리, 하도리에서 일제히 모여 항의했다.

    일제는 이 운동의 배후를 의심하며 청년단체 ‘혁우동맹’ 관계자들을 잇달아 체포했다. 해녀들은 청년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연일 시위를 이어갔지만 1월 27일 종달리 해녀 시위를 마지막으로 운동은 무력 진압됐다. 이 항쟁에는 연인원 1만7000여 명이 참여했고, 국내 최대 규모의 어민 항일운동으로 남았다.

    이들은 단지 생계를 지키기 위해 싸운 것이 아니었다. 해녀들의 연대는 야학과 계몽운동으로 이어졌고, 그 배움은 항일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제주 청년단체들은 하도리에서 야학을 열어 해녀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며 민족 교육을 했고, 바다 일을 마친 해녀들은 모여 배움을 통해 항일 의식을 키워갔다.

    제주항일기념관 외부에 있는 ‘애국선열추모탑’.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추모하는 탑이다. 홍중식 기자

    제주항일기념관 외부에 있는 ‘애국선열추모탑’.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추모하는 탑이다. 홍중식 기자

    제주 땅을 울린 항일운동 주역들

     제주항일기념관에 전시된 제주 3대 항일운동의 주요 인물 4명. 홍중식 기자

     제주항일기념관에 전시된 제주 3대 항일운동의 주요 인물 4명. 홍중식 기자

    제주항일기념관 전시관의 마지막은 ‘제주 독립 유공 서훈자들’로 채워져 있다. 현경숙 문화해설사는 “2025년 3월 기준 독립 유공 서훈을 받은 제주 지역 인물은 총 222명으로, 살아 있는 강태선 지사를 제외한 221명의 위패를 기념관 내 창열사에서 모시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 가운데 제주 3대 항일운동인 ‘법정사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에서 중심 역할을 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 김연일(1871~1940·건국훈장 애족장): 경북 경주 기림사 승려 출신으로 1914년 제주 법정사에 들어와 항일 의식을 퍼뜨렸다. “제주는 우리나라의 닻”이라며 지역 주민 700여 명의 참여를 이끌어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을 주도했고,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1993년 애족장을 받았다.

    ■ 김시범(1890~1948·건국훈장 애족장): 1919년 3월 21일 조천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최고형인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으며, 광복 후 초대 조천면장을 지내며 계몽 활동을 이어갔다. 1948년 11월 부인과 함께 붙잡혀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 부춘화(1908~1995·건국포장)·김옥련(1907~2005·건국포장): 제주 구좌 하도리 출신의 부춘화는 1928년 구좌 해녀조합 대표·하도리 청년회 부녀부장, 김옥련은 하도리 소녀회 회장으로 해녀 항일 시위를 이끌었다. 일제의 착취에 맞서 집회를 주도했으며, 1932년 체포돼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은 제주 여성 항일운동의 상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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