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호

조국 몸값 ‘김 빼기’일까, 정청래 신당권파 향한 ‘경고’일까

[Special Report | 여권 ‘블랙홀’, 조국이 온다] 李 특별사면으로 본 ‘사면의 정치학’

  • 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시사평론가

    입력2025-08-22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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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력자는 채찍과 당근 교대로 사용해 공동체 지배

    • 사면권은 현존 권력의 배타적·독점적 최고 권능

    • 경색된 남북 관계 돌파구, 이인모 등 비전향장기수 사면

    • 전두환·노태우, 1987 양김(YS-DJ) 특사로 대선 승리

    • YS·DJ, 1997 전·노 특사 마지막 정치적 합의

    • “운동장 넓게 쓰겠다”는 李, 조용한 정계 개편 나설까

    1987년 7월 11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이 사면 복권 후 처음으로 공식 회동, 5개 항의 합의사항을 발표하고 있다. 동아DB

    1987년 7월 11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이 사면 복권 후 처음으로 공식 회동, 5개 항의 합의사항을 발표하고 있다. 동아DB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을 검색하면 “대통령의 사면권은 고도의 정치적 결단에 의해 발동되는 통치행위에 속한다”고 나온다. 사전적 개념에 입각하자면 사면(赦免)은 “죄를 용서하여 형벌을 면제함”을, 복권(復權)은 “일정한 자격이나 권리를 한 번 상실한 사람이 이를 다시 찾음”을 각각 의미한다. 이왕이면 용어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이현곤 변호사에게 일반사면과 특별사면의 차이를 물어봤다. 그는 음주운전 같은 특정한 행위를 기준으로 하는 사면 복권은 일반사면이고, 대통령이 각별하게 챙겨주고 싶은 특정한 인물을 기준으로 하는 사면 복권은 특별사면이라고 설명했다. 이 변호사의 해설을 듣고 보니 이 대통령이 단행한 이번 광복절 특사의 전모가 단번에 파악됐다.

    ‘관계 부처 합동’ 명의 보도자료가 강조한 것

    2025년 8월 11일, ‘관계 부처 합동’ 명의로 배포된 정부 보도자료는 이재명 정부의 첫 광복절 특사의 목적이 분열과 반복의 정치를 끝내고, 국민 대화합을 도모하는 두 가지에 맞춰져 있음을 서두에서부터 애써 강조했다. 

    그러나 특별사면의 기준이 특정한 사법적 행위가 아닌 특정한 인물의 거취에 있음을 고려하면, 올해 광복절 특사는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와 윤미향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구하기에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조 전 대표와 윤 전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2186명의 특별사면 대상자는 특별사면을 일반사면처럼 보이게끔 꾸며주는 데 필요한 물타기 내지 끼워팔기 용도의 사면 복권 성격이 짙어 보였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거의 모든 권력자는 채찍과 당근을 교대로 사용하며 공동체를 지배해 왔다. 고대 로마제국의 저 유명한 빵과 서커스는 당근의 핵심적 구성물이었다. ‘죄와 벌’은 채찍을 이루는 양대 요소였다.

    권력은 한 사회에서 무엇이 죄인지, 그리고 죄를 어떻게 처벌할지 독점적으로 정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권력은 죄를 지은 자들에게 언제 용서와 관용을 베풀지 배타적으로 결정할 수도 있다. 대한민국 헌법 79조 ①항은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사면·감형 또는 복권을 명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곧이어 ②항에서는 ‘일반사면을 명하려면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써놓았다. 특별사면은 대통령 고유의 권한임을 확실하게 못 박아둔 셈이다. 한국뿐만이 아니다. 제럴드 포드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리처드 닉슨을 사면한 일이 말해주듯이 미국을 포함한 세계 많은 나라에서도 특별사면은 최고통치권자의 고유 권한에 속했다.



    사면권은 현존하는 권력의 최고 권능

    사면권, 즉 ‘용서할 수 있는 힘’이야말로 현존하는 권력의 배타적이고 독점적 권능이다. 이 용서할 수 있는 힘은 때로는 국경선 밖으로 향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경색된 남북 관계의 돌파구를 비전향장기수의 무조건 북한 송환을 발판 삼아 마련하려 시도할 경우다.

    김영삼(YS) 정부가 출범한 지 보름가량이 경과한 1993년 3월 11일, 정부는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노인을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발표했다. 이인모는 1988년에 출소하기까지 34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그는 출소한 다음에도 전향을 한사코 거부했다. 법적 잣대로만 따지면 여전히 범법 상태에 있었다. 김영삼 정부는 이러한 사실에 개의치 않고 같은 해 3월 19일 그를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돌려보냈다. 사실상의 특별사면이었다.

    그로부터 7년 6개월 후인 2000년 9월 2일에는 비전향장기수 63명이 한꺼번에 북한으로 송환됐다. 김대중(DJ)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6·15 남북 정상회담의 후속 조치 격이었다. 최근에는 6·25전쟁 당시의 북한 인민군 포로 출신인 96세의 안학섭 노인의 대북 송환이 진보진영 일각에서 추진되고 있다. 안 노인의 송환이 이재명 정부가 목표하는 북한과의 대화 창구 복원에 마중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작용한 탓이다.

    안 노인은 현재까지도 보호관찰법 대상으로 분류돼 아직도 정기적으로 경찰의 방문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 역시 김영삼 정부 초기의 이인모 노인같이 한국 대통령의 ‘용서할 수 있는 힘’이 발휘돼야만 꿈속에서도 그려왔을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처지다.

    김영삼 정부가 이인모 노인 송환 방침을 밝힌 이튿날, 북한은 ‘핵확산방지조약(NPT)’을 탈퇴하겠다고 전격적으로 선언했다. 벌써 30년 넘게 한반도 상공 위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워온 북핵 위기의 본격적 출발점이었다. 남한에서 비전향장기수 인도적 송환 움직임이 다시금 활발하게 일고 있는 즈음,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우리는 국경선(휴전선) 확성기를 철거한 적도, 그럴 계획도 없다”는 담화문을 내놓으며 남측의 일방적 구애에 찬물을 끼얹었다. 안학섭의 송환이 이인모의 송환처럼 찬 바다에 뿌리는 한 잔의 따뜻한 커피가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는 상황이라 하겠다.

    남북 관계라는 ‘빅리그’와는 다르게 ‘여의도 정치’로 흔히 불려온, 상대적으로 작은 무대에서 사면의 정치학은 주최 측 입장에서 나중에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연례행사가 돼버린 특별사면

    1987년 6월,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의 길거리는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대통령직선제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대 열기로 뜨거웠다. 6·10민주항쟁이었다.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에 뒤이어 한국 군부마저 반대 의사를 표명함으로써 계엄령 선포는 불가능했다. 그러자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은 최후의 승부수로 6·29선언을 발표했다. 직선제 수용과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 사면 복권이 선언 내용의 골자였다.

    노태우의 6·29선언을 수용하는 형식으로 전두환은 김 의장을 위시한 양심수 다수를 사면 복권했다. 김영삼과 김대중 중 누가 야권의 대표선수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할지는 당연히 미지수였다. 야당과 재야 세력은 김대중에 대한 사면 복권을 줄기차게 촉구해 왔다. 문제는 김대중의 공민권 회복과 대통령직선제가 동시에 관철된다면 이후에 펼쳐질 정국의 긴박한 흐름에 어떻게 대처할지 구체적 청사진이 준비돼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선(先) 구호-후(後) 대응’의 부실한 설계도는 그해 겨울에 치러진 13대 대선에서 양김 후보단일화 실패와 노태우의 어부지리 당선으로 귀착됐다.

    서울대생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에서 시작해 노태우의 대통령직 ‘득템’으로 마무리된 1987년은 격동과 파란의 한 해였다. 근 40년 동안 대한민국 헌정 체제의 골간을 굳건히 지켜온 87년 체제는 바로 그해 완성됐다.

    고대 그리스의 유물주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유전(流傳)한다”는 불후의 명제를 남겼다. 이 세상에 고정되고 불변하는 것은 없음을 역설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만물이 아무리 유전한다고 한들 1987년 무렵 한국에서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들 가운데 양김과 전·노, 즉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면 복권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리라 상상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을 성싶다.

    일제가 패망하고 80년의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역대 정부마다 떠들썩하게 특별사면을 실행했다. 횟수를 기억하기도, 수혜자 숫자를 계산하기도 곤란할 정도로 이제 특별사면은 으레 때 되면 하는 연례행사처럼 돼버렸다.

    그래도 두 개의 특별사면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실이었던 특별사면과 1997년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의 결과물이었던 특별사면이다. 이 두 개의 특별사면에는 공교롭게도 네 사람의 이름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앞서 거명한 바대로 김영삼과 김대중, 전두환과 노태우가 그들이다.

    6월 항쟁 결실과 최초 정권교체의 결과물

    김영삼과 김대중은 경쟁자였다. 김대중과 전두환의 관계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였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인연은 독특하다. 쿠데타의 공모자이면서 틀어진 밀실 거래의 양쪽 당사자였다.

    1997년의 제15대 대통령선거는 대권의 꿈을 현실화하고자 김종필(JP)과의 선거 연합조차 불사한 김대중의 극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IMF외환위기 사태가 초래한 연쇄 부도와 대량 실직으로 인해 연말 분위기가 완전히 실종된 그해 12월 20일,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당선인은 청와대에서 오찬 회동을 하고 전두환과 노태우 등의 12·12군사반란 가담자들과 5·18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책임자들에 대한 사면 복권에 합의했다. 이날의 합의는 양김이 마지막으로 뜻을 같이한 정치적 결단이기도 했다.

    전·노의 김대중 사면 복권과 양김의 전·노 사면 복권 전부 고도의 정치 행위였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리에 성공했다. 반면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면 복권은 감옥에서 나온 전두환이 보여준 반성 없는 행각과 한 대기업 총수의 이혼소송 과정에서 실체를 드러낸 노태우 비자금의 존재로 말미암아 이미 오래전에 빛이 바래고 말았다. 일각에서는 신군부 인사들에 대한 성급하고 무원칙한 사면 복권의 강행이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비상계엄을 부추기는 빌미가 됐다고 주장하고 나설 지경이다.

    양김이 분열하지 않았다면, 감옥에서 풀려난 전두환이 개과천선해 착한 인간으로 거듭났다면, 노태우 비자금이 5·18 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완벽하게 국고에 환수됐다면, 양김의 전·노 사면 복권은 지금과는 크게 다른 역사적 고평가를 받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양김의 갈등을 조장하려 사면권을 행사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양김은 김대중 정부가 소수파 정부의 한계에서 벗어나도록 돕고자 전두환과 노태우를 교도소에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동기의 순수성 측면에서는 1997년의 특사가 물론 선의로 가득했으나, 전략적 실속의 견지에서는 1987년의 사면이 톡톡히 재미를 본 형국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의 8·15 특사는 1987년 특사와 1997년 특사 가운데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이 대통령의 특별사면은 외연 확장보다는 내부 결속의 의도가 뚜렷이 감지된다. 조국 전 대표와 윤미향 전 의원의 사면 복권이 열혈 지지층의 지지를 주로 받는 까닭에서다.

    중도층의 반응은 반대로 싸늘하다. 한국갤럽이 8월 12일에서 14일에 걸쳐 전국 만 18세 이상 1007명에게 이재명 대통령이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지 물어본 결과 60%를 상회한 이전 조사와 비교해 59%의 유권자들이 이 대통령의 직무 수행을 긍정 평가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재명 대통령이 지지율은 50%대로 내려앉게 됐다(여론조사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이 대통령이 이런 민심의 추이를 예상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그는 무엇보다 조 전 대표에 대한 특별사면을 결행했다.

    모든 현직 대통령은 대통령에 취임하는 순간 정권 재창출의 무거운 족쇄를 숙명적으로 짊어지기 마련이다. 이 대통령 또한 예외가 아닐 테다. 지금은 여당도 야당도, 진보도 보수도 팬덤 정치가 정치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유력한 대권주자의 유무가 국회 의석의 많고 적음보다 중요한 시대다.

    조국이 건재한 조국혁신당과 조국이 부재한 조국혁신당은 전혀 다른 정당이다. 유력 대선후보 조국의 명분과 위력은 그가 교도소에 갇혀 있는 날과 정비례해 축적·증대해 왔다. 몇몇 정치 전문가들이 조국이 차기 대선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소하는 게 유리하다고 지적한 이유이다. 

    운동장 개수를 늘리려는 사면 복권이라면…

    이재명 대통령은 조국의 몸값을 속절없이 계속 올려주느니 이쯤에서 사면 복권을 해 미리 김을 빼놓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더욱이 정청래 대표 체제가 들어서면서 집권당인 민주당에선 대통령실과 정책과 이념에서 따로 가려는 원심력이 부쩍 강해지는 기류다. ‘용산 대통령실로부터의 자강’ 노선을 공공연히 모색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운동장을 넓게 쓰겠다”는 의지를 자주 피력했다. 대통령의 발언은 ‘경기장의 면적’뿐만 아니라 ‘경기장의 개수’에도 해당하는 언급일 수가 있다. 이 대통령이 민주당의 경계를 뛰어넘어 조국혁신당까지 경기장으로 염두에 뒀다면, 운동장을 넓게 쓰겠다는 이야기는 그 정점에 위치한 정 대표의 신당권파를 겨냥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로 해석돼야 마땅하다. 이 대통령의 광복절 특별 사면 복권은 범여권 전체를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조용하면서도 거대한 정계 개편을 향해 쏘아 올린 작은 공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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