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MT-2000에 이어 위성방송사업권까지 ‘싹쓸이’한 거대 공기업.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인 구조조정·민영화의 길은 멀기만 한데…. 4대 재벌 넘보는 한국 통신업계 맏형, 한국통신을 해부한다.
“됐구나!”
“야, 정말 됐네, 됐어!”
한통이 주축이 된 한국디지털위성방송(KDB)이 국내 유일의 위성방송사업자로 선정된 순간이었다. 그 4일 전인 12월15일, 한통은 SK텔레콤과 함께 꿈의 이동통신이라 불리는 IMT-2000 사업권을 획득했다. 불과 닷새 만에 2000년대 최대 이권사업 두 가지를 ‘싹쓸이’한 것이다. 공기업인 한통이 두 거대 이권을 한손에 거머쥔 이면에는 “2002년 6월까지 민영화를 완료한다”는 약조가 전제조건인양 붙어 있었다.
같은 시간, 명동성당. 두툼한 방한복으로 중무장한 한통 정규직 노조원 1만여 명이 대규모 집회를 열고 있었다. 구내를 메운 비닐천막과 트럭 5대분의 각종 농성 장비들. ‘슈퍼 공룡’ 회사의 ‘슈퍼 노조’ 다운 모습이었다. 노조는 정부의 한통 민영화 방침과 일방적 구조조정을 격렬히 규탄했다.
22일 오전, 노사합의 타결과 더불어 노조원들이 빠져나간 명동성당은 볼썽 사나웠다. 성당측은 이례적으로 “노조가 기물 파손은 물론 신도들의 새벽 미사 참석을 방해하고 구내를 쓰레기장으로 만들었다”면서 “앞으로 이익집단의 성당 내 점거 집회나 장기 천막 농성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한통 노조가 몇몇 신문에 사과문을 게재했지만 노조원과 신도 간의 감정 싸움은 인터넷 상에서 2주 가까이 계속됐다.
12월19일을 전후해 펼쳐진 이 두 가지 광경은 거대 공기업 한국통신이 처한 오늘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디지털 혁명을 이끌어갈 ‘사이버월드 리더’, 한국 경제의 미래를 짊어질 ‘정보통신업계의 맏형’.
그러나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인 구조조정과 민영화는 노조 설득 실패, 집단 간의 견해 차이로 성사 여부조차 의심스럽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는 기본통화료 인상을 계기로 한통과의 일대 격전을 준비중이다.
뿐인가. 우리 나라 통신 발전을 이끌어온 유무형의 수많은 공로에도 불구하고, 한통에 대한 국민과 업계의 시각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자기 잇속만 챙긴다’ ‘방만하다’ ‘독점의 횡포를 휘두른다’ ‘문어발식 확장으로 업계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등 부정적인 쪽에 가깝다.
취재중 만난 한통의 현직 임직원들은 이러한 외부 평가에 대해 “뭘 모르고 하는 소리”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통신업계에 떠도는 말 그대로, 이들은 스스로를 ‘영원한 甲’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그런데도 한통의 오늘과 내일에 관심의 끈을 늦출 수 없는 건, 그만큼 우리 경제와 국민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특히 민영화 시한을 1년 앞둔 가운데 IMT-2000, 위성방송사업의 기초를 다져야 할 2001년은 한통은 물론 한국 IT(정보통신)산업의 향배를 결정할 중요한 한해가 될 것이다.
마침 한통은 개혁 성향의 젊고 의욕적인 인물을 전문경영인으로 맞이했다. 한통 프리텔 사장을 지낸 이상철(李相哲·53) 사장이다. 한통 20년 역사상 최초의 엔지니어 출신 경영인이기도 하다.
과연 한통은 ‘젊은 피’의 수혈에 힘입어 세간의 우려를 씻고 ‘IT 코리아’의 리더이자 세계적 통신업체로, 또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범적 민간 기간통신사업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4대 그룹 넘보는 거대통신제국
한국통신이 설립된 것은 1981년 12월10일. 정부는 대규모 통신시설 확충 및 관리를 위해 체신부 업무 영역 중 전기통신 관련 부문을 따로 떼어내 한국전기통신공사를 출범시켰다. 한통은 발족 5년 만에 전국 시외전자교환망을 완성하고 전국 전화 광역자동화를 이뤄내는 등 발빠른 성장을 보였다. 1986년에는 세계 열 번째로 대용량 전전자교환기 개발에 성공해 전화 대중화의 물꼬를 텄다.
오랜 기간 국민들은 한통을 ‘전화국’과 동일시했다. 그러나 IT혁명과 함께 기간통신망이 지닌 부가가치가 급등하면서, 이제 한통은 일개 공기업의 영역을 넘어 9개 자회사를 거느린 통신전문그룹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해저 광케이블부터 인공위성까지, 말 그대로 ‘육·해·공’을 아우르는 거대통신제국의 탄생이다.
자본금 12조5610억 원에 총자산 23조 9533억 원. 2000년 추정 매출액만 10조2800억 원, 순이익은 1조2000억 원에 이른다. 이변이 없는 한 올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하는 30대 기업집단 중 7~8위권 그룹에 진입할 전망이다. 민영화만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재계 순위 1~2위를 다투게 되리라는 분석도 있다.
한국통신 파워의 핵심은 각 가정까지 파고들어 있는 시내전화망(유선가입자망)과 막강한 자금력이다. 대부분의 유·무선 전화와 초고속인터넷망은 한통 시내망을 타지 않고서는 연결이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데이콤·온세통신 등 시외·국제전화 사업자, 하나로통신 등 시내전화사업자나 초고속망사업자, SK텔레콤·LG텔레콤 등 무선전화사업자들은 1999년에만 한통측에 총 1조4500억여 원의 접속료를 지불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한통의 주요한 ‘고객’인 이 통신사업자들은 한편으로는 한정된 국내 통신시장을 놓고 한통과 치열한 다툼을 벌이는 경쟁자이기도 하다. 한통은 시내·시외·국제 전화 서비스는 물론 무선전화(한통프리텔·한통엠닷컴), PC통신(하이텔), 초고속망(메가패스), 인터넷데이터센터, 전자상거래(바이앤조이) 등 ‘돈 된다 싶은’ 정보통신사업에는 죄다 진출해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통은 각종 통신요금 책정과 통신 인프라 구축에 결정적 역할을 함으로써 국민생활과 국가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정부의 정보통신 관련 정책을 시장에서 실제 ‘구현’하는 태스크 포스이기도 하다. 수많은 정보통신 장비·설비 및 콘텐츠 업체들엔 매년 3~4조 원의 매출을 보장하는 최대 고객이다. IMT-2000과 위성방송 사업 진출이 확정된 지금에 와서는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거대하고 독점적이며 막강한 힘을 지닌 공기업이 국민, 정부, 경쟁사업체는 물론 4만5000여 명의 직원들마저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통 간부 출신인 한 벤처기업인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회사 안팎 사정을 두고 “공무원 조직과 재벌 그룹의 나쁜 점만 모아놓았다”고 혹평했다.
한통이 내부적으로 직면해 있는 최대 현안은 인사 개혁이다.
흔히 ‘철밥통’에 비유되는 관료적 연공서열 인사가 핵심. 능력보다 재직 기간을 중시하다 보니 과장이 말단사원보다 4배 더 많은 기형적 구조를 갖게 됐다. 실장·본부장 급이 37명, 1급 국장이 241명, 2급 부장이 1007명, 3급 과장이 4104명, 4급 대리가 1만1148명, 5급 사원이 1만5843명, 6급 사원이 8706명, 7급 사원이 1141명 등이다(2000년 기준).
구조조정에 대한 부담으로 최근 3년간 신입사원을 거의 채용하지 않은데다 이직률은 낮아 중간층의 이상비대현상이 고착됐다. 이로 인해 97년 37.9세였던 직원 평균 연령은 38.2세로 높아졌고 인사 적체도 심각한 수준이다.
한통은 1998~2000년 구조조정 차원에서 1만5000여 명을 감원해 6만여 명에 달하던 정규직원 수를 4만5000여 명 선으로 줄였다. 그러나 “직급 구조 자체의 모순은 내버려둔 채 건물 관리, 설비, 경비 등 외곽 하위직 위주의 인력 감축에 그친 ‘반쪽 구조조정’일 뿐”이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고 있다.
복잡다단한 직급·직군 구조는 업무 스피드를 떨어뜨린다. 권한도 상층부에 집중돼 있어 수적으로 월등한 과장·대리 급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 기업체라면 대리가 할 일을 과장이, 과장이 할 일을 부장이 하는 식이다.
대리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지난해 한통을 출입하던 몇몇 기자들은 한 ‘과장’으로부터 “이번에 과장 승진했다”는 자랑을 듣게 됐다. 이미 과장인 사람이 다시 과장으로 ‘승진’하다니. 알고 보니 그는 고참 대리였다. ‘연배도 그렇고, 업무상 효율을 높이기 위해’ 대외적으로만 과장 행세를 해 온 것. 이러한 직급 높여 부르기는 한때 공무원 사회에 만연했던 행태다. 한통의 관료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통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은 뿌리깊은 파벌주의가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1980년대, 한통의 ‘실세’는 옛 체신부 관료와 전자통신연구소 출신이었다. 그 중에서도 ‘성골’은 체신고 출신. 체신고는 1953년 피난지 부산에서 1기를 모집한 이래 1964년 9기 졸업을 끝으로 폐교한 국립 각종학교다. 총 졸업생 수는 2196명. 상당수가 대학에서 정보통신 분야를 전공한 후 체신부와 관련업계로 진출, 막강한 인맥을 형성했다. 한통 역시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사장직을 제외하고는 자회사 사장·부사장급을 포함해 체신고 출신이 거치지 않은 요직이 거의 없을 정도다.
1990년대 들어서는 기술고등고시 출신의 부상이 두드러졌다. 핵심 인사로는 우승술 전 전략사업본부장, 안승춘 정보시스템본부장, 성인수 네트워크본부장 등을 들 수 있다. 체신고를 졸업한 이정욱 전 부사장과 조완행 부산본부장도 기술고시 출신이다.
이렇게 체신고-기술고시 출신이 양대 산맥으로 자리잡아 오던 구도에 현정권이 들어서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82년 입사한 4급 공채 1기 출신들이 급부상한 것. 리더 격이 최안용 기획조정실장(전무이사)이다.
이들의 세 확장은 한통 내 호남인맥 부상과도 관련이 있다. 한통은 공기업답게 정치적 외풍을 많이 타는 조직.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업의 얼굴 격인 사장에서부터 주요 임원진이 물갈이되곤 했다. 하지만 영남지역 출신 일색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완전히 뒤집혔다. 핵심 요직을 호남 출신 아니면 ‘중립지역’인 서울 출신들이 장악하게 된 것. 신호탄은 최근 물러난 성영소 전 부사장의 취임이었다. 성 전부사장은 전주고 38회 출신으로 진념 경제부총리의 3년 후배. 최안용 전무는 1998년 성 전부사장이 진두지휘를 맡았던 경영합리화추진단장을 맡으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최전무는 3년 만에 국장에서 이사, 상무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올 1월, 마침내 전무이사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지난 1월 1일, 이상철 사장 취임과 더불어 단행된 임원진 인사의 면면을 살펴보면 ‘체신고 약화-호남 인맥 부상’의 흐름이 한눈에 잡힌다. 전무 이상 임원 중 체신고 출신은 박학성 부사장뿐이다. 그러나 37명에 달하는 임원진 전체를 두고 보면 체신고 출신이 6명으로 여전히 수적으로는 가장 많다.
지역본부장을 제외한 사장, 부사장, 감사, 5실5본부장(IMT사업추진본부장은 공석) 중 호남 출신은 4명. 그외 서울 출신이 7명, 충청지역 출신이 2명이다. 영남 출신은 한 명도 없다. 임원 평균 연령이 전임 이계철 사장 시절 55.3세에서 50.8세로 낮아졌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철밥통’ 인사, 몸에 밴 관료주의
대규모 인사가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몸에 밴 인맥제일주의가 단시일내 사라지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10여년 전 한통에 스카우트된 공학박사 B씨. 얼마 전 그는 “인맥을 타지 않으면 이도 저도 되지 않는 분위기”가 싫어 사표를 던졌다.
B씨가 지적하는 또 하나의 병폐는 조직의 배타성과 경직성이다.
“중간에 끼여 들어온 이들을 못마땅해한다. 스카우트해 온 인력의 경우,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승진은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다. 해외공채를 실시한 적이 있는데 그렇게 뽑은 우수인력 중 많은 수가 일선 전화국에서 수납 담당으로 일했다더라. 그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특정 요건을 갖춘 이들을 특수한 목적으로 뽑았으면 적재적소에 배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기술직 종사자들도 인력 배치에 불만이 많다.
“한통 직군은 크게 일반직과 연구직으로 나뉜다. 일반직 안에 서무·행정·기술 분야가 있다. 같은 대학을 나왔어도 기술직이 부장 이상으로 승진할 기회는 거의 없다. 서무·행정 쪽에서 독점하기 때문이다. 한통은 기술 기반 회사다. 최근 들어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어림없다. 근본적으로 기술직도 경영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서울의 한 전화국에 근무하는 C씨의 말이다.
그렇더라도 한통 직원들의 애사심이 유별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대표적인 예가 지난해 국정감사 당시 한통에 이런저런 문제제기를 한 정보통신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몇몇 한통 직원들이 전화폭력과 사이버테러를 가한 것. 그 중 특히 모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한통 분할론’을 언급한 민주당 곽치영 의원은 경쟁사인 데이콤 사장 출신이라는 이유로 더욱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기자들 사이에서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통 관련 기사를 쓸 때는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오갈 정도다.
‘빽’과 인맥이 필요한 건 한통과 거래하는 장비업체들도 마찬가지다. 한 전직 경영진의 설명을 들어보자.
“한통이 구입하는 장비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교환기, 광케이블 등 반복·장기·대규모로 구입하는 ‘규격품’들이다. 15년 이상 사후관리가 가능하고 기술력도 뛰어나야 하므로 대개 대형전자회사 제품을 쓴다. 업체로서는 한번 ‘간택’되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한마디로 미래가 보장되는 장사기 때문이다. 한통 ‘족보’에 올라가면 주가가 뛰는 등 반사이익도 적지 않다.
또 한 가지는 서버처럼 단발·일시·소규모로 구입하는 제품들이다. 주로 입찰을 하는데, 사전에 ‘한통이 원하는 건 이런저런 제품이다’는 정보를 모르고 들어갔다간 백전백패다. 입찰 전에 어떻게든 정보를 빼내야 하므로 업체로서는 담당자에게 먹힐 만한 ‘빽’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한통 출신 재계 인사 E씨의 증언.
“한통 구매 업무를 총괄하는 건 조달본부다. 일부는 네트워크본부 시설사업단에서 담당한다. 그러나 사실상의 결정권은 각 부서 실무자들에게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납품부서와 구축부서가 다른 것도 한 원인이다. 대부분 공개 혹은 비공개 입찰과정을 거치는데 그 병폐가 건설 현장이나 다를 바 없다. 업자들이 담합, 담당 직원의 묵인 하에 100원짜리를 200원에 팔기도 한다. 물론 리베이트가 없을 수 없다. 금전적 부정행위가 아니더라도 뒷 배경을 이용한 거래들이 종종 발생한다. 예를 들어 특정인이 ‘힘있는 자리’에 앉으면 그 사람을 ‘형님’으로 모시는 중심 인물 하나가 나서 업자 간 교통정리를 하는 식이다.”
사실 장비 구입 관련 비리 의혹이 제기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998년 한통은 2단계 경쟁입찰을 통해 자네트시스템, 두진전자, 아비브정보통신, 아륙전자 등의 업체로부터 여섯 종류의 중·소형 광단국장치를 구매했다. 그런데 이 중 5개사의 제품이 1차 ‘기술심사’에서 적격판정을 받은 제품 중 최하위점수를 받았음에도 2차 ‘최저가입찰’에서 예정가 47.97%의 덤핑 가격으로 낙찰받은 것. 아니나 다를까, 장비들은 Y2K 문제 발생, 낙뢰 정전시 자동복구 불량 등 각종 문제를 일으켜 도리어 예산을 낭비하게 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된 모 업체는 반복적 덤핑 입찰을 할 뿐 아니라 회사명만 바꿔 자사 제품을 응찰, 낙찰되는 등 업계로부터 “뭔가 냄새가 난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김희선 의원은 “고낙찰률 계약 건이 일부 업체에 편중돼 있다. 12건 낙찰에 모두 99% 이상의 실적을 기록한 업체도 있을 정도”라며 “예정가 유출 등 입찰 비리를 철저히 점검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문어발식 확장, 자회사와도 경쟁
뚜렷한 인사 원칙, 투명한 경영 평가 기준이 부재한 상황은 한통에 ‘방만 경영의 표본’이라는 불명예를 안겨 주었다. 이와 관련해 자주 언급되는 것이 ‘눈가리고 아웅’식 구조조정과 중복 투자, 문어발 확장이다.
한통은 1998~1999년 인력을 감축하면서 45개월치 기본급 기준 최고 1억7000만 원의 명예퇴직금을 지급하는 퇴직금 누진제를 적용했다. 이로 인해 1999년 인건비 총액이 1997년보다 13.5% 늘어난 2조6234억 원에 이르렀다.
1999~2004년에는 법정한도인 세전이익의 5%(한통의 경우 한 해 223억 원)를 어기면서까지 매년 500억 원씩 총 3000억 원의 사내복지기금을 출연키로 했다. 여기에 더해 기본급 대비 연 100%이던 효도 휴가비도 200%로 늘렸다. 1999년에는 임원 40%, 일반 직원 5.5% 등 임금을 평균 15.6% 인상하기도 했다. 일반 직원들의 임금은 업계 평균 수준(11.5%)을 크게 밑도는 반면 임원 연봉 상승폭은 지나치게 커 빈축을 샀다.
한편, 앞에서도 말했듯이 한통은 ‘통신 사업의 A to Z’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많은 분야에 진출해 있다. 욕심이 과하다 보니 자회사 업무 영역이나 벤처기업 몫으로 남겨두어야 할 부분까지 잠식해 들어가는 형국이다.
한통은 최근 5개 한계사업에서 철수했다. 투자비 및 손실액은 시티폰 사업 1985억 원, 국가지도 통신 사업 412억 원, 여의도 멀티미디어 사업 212억 원, 전화비디오 사업 232억 원, 케이블TV사업 3130억 원 등이다. 물론 이 대부분은 정부의 ‘지시’에 의해 시작된 사업이다. 처음부터 사업성보다 정책적 고려가 우선했던 것. 어쨌거나 이로 인해 한통측이 회수했거나 회수 가능하다고 한 1788억 원을 제외하고라도, 4183억 원이라는 거액이 공중으로 고스란히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정부건 한통 경영진이건 앞장서 책임지는 이는 없는 상태. 도리어 한 사업의 경우에는 주무부서 장이었던 사람이 사업 철수 후 승진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1996년부터 의욕적으로 추진한 통합고객정보시스템(ICIS) 사업도 부실 설계로 인해 가동이 중단되는 등 잦은 문제가 발생했다. 할수없이 당초 1999년이었던 목표 시기를 2001년 초로 대폭 미루고 400억 원의 비용을 추가하게 됐다. 1999년 이 문제가 공론화되자 한통은 기자회견을 자청했고 감사원도 사태를 면밀히 분석, 엄중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한통 자체 징계위원회에서 관련자 4명 중 3명은 불문(경고), 1명은 견책에 처하고 담당 본부장은 연수원장으로 발령 내는 선에서 마무리되고 말았다. 민간기업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공기업식 ‘솜방망이 징계’다.
이 외에도 1999년 감사원 자료에 따르면 한통은 투자비 2094억 원을 들여 총 16개 해외사업에 투자했으나, 폴란드 무선호출사업 등 6개 사업(투자비 648억 원)이 사업 개시 후 8개월~2년 8개월 만에 파산하고 대만 시티폰 사업 등 7개 사업(투자비 924억 원)도 계속적인 적자를 내는 등 큰 손실을 보았다.
사업 확장에 연연한 탓일까. 한통은 자회사와 경쟁하거나 경쟁 통신업체가 진출한 분야라면 무조건 발을 들여놓고 보는 식의 투자도 서슴지 않는다.
한통은 1999년 6월 구내통신시설사업을 자회사인 한국통신진흥에 이관했다. 그러나 “구내통신시장이 전체 전화시장의 23.5%를 차지하고 있으며 음성뿐 아니라 데이터통신 기반 시장으로 미래의 중요 수입원”이라는 명분으로 ‘통신진흥은 대형건물, 한국통신은 소형건물’ 식의 역할 분담을 추진했다. 이로 인해 한통은 “정부 구조조정 계획에 의해 막상 떼주고 보니 이익이 많이 남는 거라 아까워 그러는 것 아니냐”는 비난을 받았다.
자회사건 기타 사업자건, 통신망을 장악하고 있는데다 자금력까지 막강한 한통과 경쟁해 이길 수 있는 업체는 거의 없다. 통신사업의 특성상 1+1은 2가 아닌 5가 된다는 것이 상식. 선점 효과를 누릴 수 있고 자금력 뛰어난 업체가 사실상 시장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통신사업자들이 “한통은 기간통신망 확충이라는 본래 업무에 충실해야 한다. 인터넷 쇼핑몰, 금융, 게임, 음성포털, 인터넷 방송 등 부가통신사업까지 마구잡이로 진출하는 것은 중복 투자 우려가 높을 뿐 아니라 통신 시장 자체를 죽이는 일”이라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점적 지위를 이용한 한통의 견제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업체들은 시외·국제전화 사업자인 데이콤과 온세통신, 시내전화 및 초고속망 사업을 펼치고 있는 하나로통신이다.
정부는 한통의 독점력 남용을 우려해 1991년 이후 각 유선사업 분야 별로 경쟁체제를 도입했다. 이에 힘입어 한통의 국내통신서비스 시장 점유율은 1994년 80.78%에서 1999년 51.2%까지 꾸준히 하락해 왔다(정통부).
그러나 경쟁업체들의 주장은 다르다. 한통의 ‘약탈적 요금책정’과 무리한 접속료 부과, 유·무형의 각종 견제와 불공정경쟁으로 인해 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데이콤과 온세통신은 한통이 경쟁 부문인 시외·국제전화 요금은 꾸준히 내리면서 사실상 독점 상태인 시내전화요금은 인상하는 수법으로 경쟁업체를 죽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한국통신은 1994년 이후 시외전화요금은 60%, 국제전화 요금은 25% 인하한 반면, 시내부문 전화요금은 50%를 인상했다. 시외·국제 부문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요금을 내리되 여기서 생긴 손실액을 시내전화 쪽에서 메우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한통의 요금산정 방식을 지칭하는 ‘약탈적 요금책정’이라는 용어는 통신업계에서 고유명사화한 지 오래다.
또한 데이콤은 한통이 시내 부문인 현업전화국에 시외·국제전화 등 경쟁 부문의 영업목표를 부과, 관리함으로써 시내망 설비의 설치·운영·유지·보수 인력까지 경쟁부문에 도입하는 불공정 경쟁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데이콤과 온세통신 시외전화를 사용할 경우 한통 시외전화를 사용할 때보다 다이얼 후 대기 시간(PDD)이 4~8초 더 걸린다. 전화 사용자들로서는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데이콤측은 이에 대해서도 “한통이 타 사업자의 경쟁력을 낮추기 위해 PDD 문제 해결을 위한 선진기술(NO.7) 도입을 미루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하나로통신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시내전화 시장에서 하나로통신의 점유율은 겨우 1.51%(2000년 11월30일 기준, 정통부). 광통신망 2㎞를 설치하는 데 2억 원 이상이 드는 현실에서 ‘100년 동안 땅을 파 온’ 한통과 경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작전’에 가깝다. 하나로통신측은 “독점 방지를 위한 경쟁 도입이란 처음 취지를 살리기 위해선 하나로통신이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조성해주어야 한다”며 정통부에 “한통 가입자 선로를 분리 제공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를 줄기차게 해왔다.
이에 정통부는 지난 1월8일 전기통신사업법을 개정해 이르면 올 상반기부터 가입자선로 공동활용제를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업계에선 이 제도가 시행되기까지는 상당한 난관이 있을 것으로 본다. 제도 도입을 반대해 왔던 한통은 정책 결정 후에도 제공절차 논의 및 관련정보제공 등에 소극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특히 선로 제공 대가로 상당한 이용료를 요구하고 있어 난항이 예상된다.
이외에도 하나로통신은 신규 고객이 한통 가입 시절 사용했던 전화번호를 그대로 쓸 수 있도록 하는 전화번호 이전 제도 도입을 주장, 관철시켰다. 그러나 역시 정통부와 한통측의 미온적인 태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나로통신은 원 사업 분야인 시내전화 사업만으로는 회사를 지탱할 수 없게 되자 인터넷초고속망 사업에 사운을 걸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역부족. 이미 건축된 건물들은 차치하고라도 신축건물조차 한통 전화선은 ‘기본’으로 들어가는 반면 하나로통신, 두루넷 등 경쟁업체들은 관리사무소나 부녀회 등에 각종 ‘옵션’을 제공해야만 겨우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업계에선 “아파트 한 채가 있다 치자. 한통은 정문으로, 하나로통신은 옆문으로, 기타 사업자는 뒷문으로나 겨우 얼굴을 내밀 수 있는 형편”이라고 이야기한다.
전화요금 원가 자료 투명성 의문
이러한 경쟁업체의 주장에 대해 한통 경영진 중 한 명은 “사업 능력이 없어 그런 걸 어떻게 하느냐”고 일축했다. “민영화를 앞둔 마당에 우리로서도 수익 중심경영을 할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남 좋은 일만 해야 하느냐”는 반박이다. “자신이 없으면 사업 자체를 시작하지 말았어야 한다. 뻔히 그럴 줄 알았으면서 이제 와 엄살을 부리는 건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자신 한통 재직 당시 경쟁업체를 ‘죽이는 데’ 앞장섰다고 밝힌 재계 인사 E씨는 “경쟁은 경쟁이니만큼 최상의 수익을 올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가 된다. 통신산업의 특성상 윈-윈 전략을 구사해야만 시장이 활성화되고 경쟁력도 높아진다. 한통의 경우 실제로 모든 경쟁사업자로부터 접속료라는 이름으로 꼬박꼬박 빳빳한 현금을 받아 챙기고 잊지 않느냐”고 말했다.
유선사업자뿐 아니라 SK텔레콤, LG텔레콤 등 무선사업자들마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접속료다. 접속료란 기타 통신사업자들이 한통 통신망을 사용한 대가로 지불하는 돈을 말한다. 휴대폰이건, 데이콤 시외전화나 하나로통신 시내전화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한통의 시내망을 타지 않고는 통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접속료가 과다하게 책정돼 있다는 것이 업체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데이콤의 경우 2000년 상반기 전체 시외전화 매출액의 약 53%를 한통측에 접속료로 지불했다. 이는 영국 17~25%, 미국 27~40%, 일본 38%, 호주 35%에 비해 상당히 높다.
이에 대해 한통측은 “우리나라 통신 요금은 외국에 비해 지나치게 저렴하다. 이로 인해 회사 경영에 큰 압박을 받고 있는 만큼 현행 접속료 책정은 타당하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그렇다면 접속료 책정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질까. 한통과 경쟁업체가 자율 책정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견이 좁혀지지 않을 경우 정통부의 중재를 받는다. 정통부는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적정하다고 생각되는 금액을 제시해서 타결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경쟁업체들은 “요금 책정의 기준이 되는 한통 회계자료가 투명하게 공개돼 있지 않아 산출 결과를 100% 신뢰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요금 규제 절차의 투명성 확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통 원가자료는 한통에 심각한 손해를 끼칠 만한 것이 아니라면 모두 공개해 이해관계자에 의한 공개 검증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를 통해서 원가자료의 투명성을 높이고 내부보조에 대한 논란을 불식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 지난 1월10일 수원지방법원은 주목할 만한 판결을 내렸다. 참여연대가 청구한 한국통신의 시내전화서비스 원가내역 등에 대한 비공개결정취소청구소송에서 “한국통신 시내전화요금(기본료, 통화료)의 산정 방식 및 원가 내역에 대한 정보공개거부처분을 취소한다”는 요지의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것이다.
참여연대는 한통이 주요 도시 기준 시내전화 기본요금을 2000원 인상하고 통화료는 3분당 45원에서 36원으로 9원 인하한다는 방침을 발표하자, 이것이 전화가입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 가정에 불리하며, 유선전화 이용률 감소로 인한 손실액을 편법 보상받으려는 의도라 보고 반대 운동을 펼쳐 왔다. 이와 관련, 한통과 정통부에 시내통화요금분포도 등 기초 자료 공개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지난 1999년 11월18일, 우선 한통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안팎에서 쏟아져나오고 있는 비난에 직면해 한통은 지금 대변신을 서두르고 있다. 민영화가 그것이다. 학자들은 물론 정부, 통신업계에서도 한통이 처한 저효율 고비용 구조를 혁파하고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통신업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민영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제시한 한통 민영화 시한은 2002년 6월.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노조의 반대, 재벌에 매각시 특혜 시비, 해외 주주 참여시 국부 유출 논란 등이 그것이다. 한편에선 2002년이 김대중 정부 5년차에 들어서는 시기임을 들어, 레임덕 현상을 보이는 정부의 말발이 얼마나 먹혀들어갈까 의구심을 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민영화 형태에 대한 업계와 국민, 한통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이다. 이상철 사장은 이미 기자회견을 통해 “분할 매각은 고려치 않고 있다. 오히려 그룹화로 시너지효과를 낼 것”이라는 뜻을 분명히 한 바 있다.
그러나 학계와 통신업계, 시민단체의 견해는 다르다. 한 통신전문가는 “일본 NTT는 정치적 결단에 의해, 미국 AT&T는 법원 판결을 통해 각기 분할-매각의 과정을 거쳤다. 거대 민간기업의 통신망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국민 세금으로, 100여 년에 걸쳐 구축된 기간망을 특정 업체들의 영향력 하에 귀속시키는 것은 불가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통신업체들의 입장도 다르지 않다. 민영화 자체보다 어떻게 시내망의 중립성을 확보할 것이냐에 더 신경을 곧추세우고 있는 상태. 자칫하면 민영화가 한통의 독점적 지위를 강화하는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 공통된 견해다. 일각에선 외국의 사례를 들어 시내망 부문은 공기업 형태로 존속시키고 기타 사업만 분할 매각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정통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시내망 없는 한통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한통의 성공적 민영화를 위해서는 기업 가치가 지금보다 더 높아져야 한다. 통신망 중립성 확보를 위해 꼭 회사를 분할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는 견해를 밝혔다.
한통 민영화는 우리 IT산업, 나아가 국가 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중대 사안이다. 한통이 기침 한 번 잘못하면 업계 전체가 독감에 걸린다는 속설은 과장이 아니다. 그런 만큼 한통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와 요구는 그 어느 때보다 크다 하겠다.
‘너무 먹고 너무 느리다’는 혹평에 시달려 온 ‘슈퍼 공룡’ 한국통신. 그러나 한통이야말로 우리 경제의 미래를 이끌어 갈 핵심 축이며 기대주다. 무거운 몸을 주체 못해 빙하기의 두꺼운 얼음 속으로 화석이 되어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뼈 깍는 구조조정으로 진화를 거듭해 세계시장이라는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당당히 자리잡을 것인가. 선택은 그들 자신의 손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