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철수연구소와 하우리. 한국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업계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 두 회사를 이끄는 안철수와 권석철은 여러 모로 대조적인 인물.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안철수는 경영 스타일도 신중하고 빈틈없고 학구적이다. 반면 ‘비주류’의 길을 걸어온 권석철은 사뭇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경영으로 1위 자리를 넘본다.
안철수연구소 안철수 사장
재수 끝에 2002년 1월 코스닥에 입성, 창업한지 불과 4년 만에 첫 꿈을 이뤘지만, 그는 이 시간이 오기까지 참으로 힘든 기간을 홀로 견뎌내야 했다. 권사장은 코스닥 등록이 한 차례 무산되자 그를 바라보는 직원 70여 명(지금은 120명으로 불어났다)의 눈빛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꼭 등록시키겠다’고 약속한 것이 그만 공약(空約)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무겁게 그의 가슴을 짓누른 것은 안철수연구소보다 코스닥 등록이 늦어졌다는 점이다. 하우리는 안연구소보다 4개월 늦게 코스닥에 등록됐지만, 코스닥 등록을 위해 심사를 청구한 것은 오히려 몇 달 더 빨랐다. 하지만 안연구소가 먼저 코스닥에 등록되면서 국내 백신업체 코스닥 등록 1호의 영예는 안연구소에 돌아갔다.
안연구소가 하우리보다 먼저 사업을 시작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과정일 수도 있지만, 권사장에겐 더없이 괴로운 일이었다. 그는 “사업 착수도 늦었고 인지도도 안연구소보다 뒤지지만, 코스닥 등록만큼은 1등을 하고 싶었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나이는 안철수(安哲秀·41) 사장보다 적지만, 그는 안사장을 뛰어넘으려는 욕망으로 가득찬 사람이다.
‘큰 산’ 앞에서 칼을 뽑다
하우리 권석철 사장
그런 안사장에 비하면 권사장은 가진 것이 많지 않다. 안사장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그리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기술경영학(Techno MBA) 석사학위를 받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하지만 권사장은 인하공업전문대(공학계통의 전문대학으로는 명문이지만)를 나온 것이 학력의 전부다.
지난 10여 년 동안의 인생 궤적을 살펴봐도 권사장은 안사장을 뒤따라가고 있는 형국이다. 안사장이 대학원 재학시절 컴퓨터 바이러스 전문가로 이름을 떨칠 때 권사장은 대학을 졸업한 뒤 엉뚱하게도 SBS 개그맨 시험에 도전했다 낙방했다. 안연구소가 코스닥에 등록해 주식이 1주당 6만원을 호가할 때 하우리는 8000원 안팎을 맴돌았다. 요즘은 백신 시장의 침체로 두 기업 모두 등록 당시보다 주가가 많이 떨어졌지만, 하우리의 주가는 여전히 안연구소 주가의 6분의 1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요즘 권석철 사장은 의미 있는 데이터를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우선 하우리의 백신 프로그램 ‘바이로봇 엑스퍼트’가 지난 6월초 국내 백신업체로는 처음으로 세계적인 인증인 ‘VB100%’를 받았다. 안연구소는 두 차례 시도했으나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VB100% 인증은 국제컴퓨터보안협회 인증, 영국 백신 인증업체인 웨스트코스트랩의 ‘체크마크’ 인증, 그리고 안티바이러스-테스트 인증과 함께 4대 국제 인증으로 꼽힌다. VB100%는 세계 각지에서 신고된 모든 바이러스 샘플을 단 1개도 놓치지 않고 100% 진단하고 치료해야 받을 수 있다.
이어 6월 말에 하우리는 체크마크에서도 안연구소보다 2단계 높은 등급을 받아냈다. 바이러스 진단 분야에선 안연구소도 체크마크 인증을 받았지만, 하우리는 바이러스의 진단 및 치료와 ‘트로이 목마(해킹 툴로 이용되는 악성 프로그램)’의 진단 치료 등 총 3가지 분야에서 인증을 받았다. 백신업체로서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인증을 받은 것이다. 이 인증은 전세계에서 9개 백신업체만 받은 것이다.
인터넷과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국내 최고 수준의 분석가로 알려져 있는 삼성증권 박재석 애널리스트는 “연구인력 규모에서 안연구소보다 열세에 있는 하우리가 이를 극복하고 VB100%와 체크마크 인증을 따낸 것은 기술력에서 앞서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기본에 충실’ vs ‘행동이 먼저’
증권시장의 평가에서도 하우리는 안연구소와의 격차를 줄여가고 있다. 하우리의 매출은 안연구소의 4분의 1 수준이지만, 주식 시가총액은 3분의 1 수준이다. 안연구소의 시가총액이 1594억원(7월4일 기준 1주당 2만1200원)이고, 하우리의 시가총액은 538억원(1주당 3570원)이다. 주식시장의 투자자들은 하우리에 대해 미래 가치의 프리미엄을 조금 더 얹어주고 있는 셈이다.
안사장에 비해 여러 모로 열세인 권사장이 선전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안철수연구소라는 ‘절대 강자’가 존재하는 시장에서도 그가 기술력을 인정받으며 회사의 인지도를 높여온 방법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권사장은 안사장을 따라가려 하기보다 그와는 다른 길을 가려고 노력했고, 결과적으로 이것이 유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마케팅 불변의 법칙’을 쓴 알 리스와 잭 트라우트는 “강함 속에는 약함이 숨어 있다”며 “선도자가 강세를 보여도 2인자가 형세를 역전시킬 기회는 꼭 있는 법”이라고 했다. 씨름선수가 자신보다 덩치가 큰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논리다. 권사장은 안사장보다 더 뛰어난 경영자가 되려고 시도하기보다는 안사장과는 다른 경영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안사장은 기본을 충실하게 갖춘 뒤 행동하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권사장은 행동이 앞선다.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도 두 경영자는 확연하게 다른 스타일을 보여준다. 안사장은 IT 기술의 메카인 미국 시장에 곧바로 진출하기보다 우선 일본 시장에서 인정받는 것을 해외 진출의 1차 목표로 세웠다. 그는 자서전 ‘CEO 안철수, 영혼이 있는 승부’에서 “외국 시장에서는 어느 정도 검증된 업체들끼리 경쟁하기 때문에 내부 역량이 갖춰지기 전까지는 외국에 나가봐야 성공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2000년, 회사 설립 후 5년 만에 일본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남들은 늦었다고 했지만, 안사장은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안연구소는 지난해 일본에서 11억원의 매출을 기록했으며, 올해는 일본과 중국 시장에서 80억원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권사장은 회사 설립 3년 뒤부터 해외 시장으로 뛰었다. 그는 안연구소가 일본 시장의 문을 두드린 직후인 2001년부터 싱가포르, 미국, 일본, 중국 등에 지사를 세우며 맹렬하게 잠재 고객들과 접촉했다. 인지도 부족과 해외 진출 경험 부족으로 지난해 1억5000만원의 해외 매출을 올리는 데 그쳤지만, 올해는 40억원의 해외 매출을 기대할 정도로 기반을 닦아놓았다. 그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외국의 유수한 인력을 스카우트해 해외에 연구소를 세울 계획도 갖고 있다.
안사장이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스타일이라면, 권사장은 돌다리를 놔서라도 건너가려는 스타일인 것이다.
‘교과서대로 살기’ vs ‘재미있게 살기’
안사장이 매사에 철저한 준비를 하고 나서 행동하는 것은 그만의 ‘전매특허’다. 그가 50여 권의 바둑 책을 독파한 뒤에야 비로소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대개 바둑은 잘 두는 사람의 어깨 너머로 배운다고 하지만, 그는 이론을 먼저 터득하고 실전에 들어갔다.
물론 수십 권의 책을 읽었다고 처음부터 바둑을 잘 두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한 번, 두 번 바둑을 두면서 그는 책에서 배운 지식을 응용할 수 있었고, 결국 남들보다 빠르게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 안사장은 자신의 인생 노하우를 ‘교과서대로 하기’라고 요약한 바 있다. 기본을 충실하게 하자는 것인데, 그는 앞서 소개한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안철수 사장이 직원들과 제품 개발에 관해 협의하고 있다.
책을 가까이 하는 그에게선 마치 구도자 같은 모습이 발견된다. 1등을 하는 기업에겐 그저 따라하기만 하면 될 모델이 없기 때문일까. 안사장은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렇듯 그가 ‘교과서’를 애지중지하고 공부를 자신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로 여기는 것은 그의 인생 자체가 이런 과정을 밟아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털어놓는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반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때 이후 성적이 떨어진 적 없이 계속 올라갔다는 점이다.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3학년에 올라가기 전까지 반에서 1등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더니 3학년 때 처음으로 1등이란 걸 해보았다. 대학에 갔을 때도 입학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으나 조금씩 성적이 좋아지더니 졸업할 무렵에는 최상위 그룹에 들 수 있었다.”
안사장은 언론사 기자들이나 직원들에게 “난 아직 모자란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다. 만족은 곧 정체를 뜻하고 정체되면 뒤처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반면 권석철 사장은 주변 사람들에게 늘 “재미있지 않아요?”라고 되묻는 습관이 있다. 새로 고안한 전략을 설명한 뒤에도, 외국에서 하우리 제품에 대해 좋은 반응을 보일 때도, 바이러스를 퇴치할 때도 그는 늘 주위 사람들에게 “재미있다”고 말한다. 권사장은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하우리의 실력을 인정해줄 때, 새로운 해외 시장을 뚫을 때, 바이러스 퇴치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뭔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때 나는 재미있어한다”고 말한다. 그가 개그맨 시험에 도전한 것도 이처럼 재미를 인생의 소중한 가치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언젠가 필자에게 “어린 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항상 밝게 웃는 얼굴로 생활의 고통을 참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선택과 집중 vs 동시다발
권사장은 자신이 남들보다 먼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 때만 재미있어한다. 뒤지면 재미가 없다. 그래서인지 그는 빠르게 행동한다. 이런 그의 모습은 때로 공격적으로 비쳐진다. 권사장이 한 달이면 보름을 해외에서 보내는 것도 해외 시장만큼은 안연구소에 내주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뒤지는 인지도를 극복하려면 역으로 해외 시장에서 성공해 국내로 치고들어와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이 배경에 깔려 있다.
그가 지난 5월말 멕시코에 지사를 둔 다국적 기업 S사에 하우리 제품을 납품할 때의 일이다. 다국적 기업이든 중소 규모 기업이든 해외에선 한국에서 온 기업인들을 웬만해선 잘 만나주지 않는다. 국내 1위의 안철수연구소도 그렇지만 하우리 역시 외국인들에겐 생소한 기업일 뿐이다.
우리 기업이 해외에서 냉대받는다는 것을 잘 아는 권사장은 S사를 공략하기 위해 다분히 공격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우선 현지에 하우리 제품을 판매하겠다는 판매채널을 한 사람 두고, 그에게 S사 제품을 구입하도록 지시했다. 현지 판매상은 S사에 전화를 걸어 “당신네 회사의 영업사원이 시스템 분야에서 근무하는 엔지니어와 함께 내 사무실로 찾아오면 제품을 구입하겠다”고 말했다.
S사는 영문도 모르고 제품을 팔 생각에 판매상이 시키는 대로 사무실을 찾았다. 그곳에는 권사장과 스페인어에 능통한 하우리 직원이 컴퓨터를 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우리 직원은 S사 제품 구입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S사 엔지니어들 앞에서 컴퓨터에 바이러스를 침투시킨 뒤 그 자리에서 치료해 보였다. 세계적으로 괴멸시키지 못해 잊어버릴 만하면 다시 출현하는 ‘님다’ ‘펀 러브’ ‘클레즈’ 등의 바이러스 치료 과정도 보여줬다.
그러자 S사 엔지니어의 눈이 휘둥그래졌고, “우리 회사로 와서 이 과정을 다시 시연해달라”는 부탁을 이끌어냈다. 권사장이 의도한 대로 된 것이다. 결국 하우리는 S사에 제품을 공급하는 데 성공했다. 권사장은 “해외 영업에서는 보고 베낄 사례가 없다”며 “심사숙고한 끝에 덤벼볼 만한 시장이라고 판단되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공격적으로 치고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에선 하우리라는 브랜드로 제품을 팔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권사장처럼 저돌적으로 문을 두드리면서 직접 바이러스를 잡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는 데모 장면을 시연할 때 늘 이렇게 말한다.
“우린 시체를 잡는 회사가 아닙니다. 펄펄 살아 있는 흡혈귀를 잡습니다.”
이렇듯 하우리만 할 수 있는 작업을 능동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권사장의 해외 진출 노하우다. 증권업계의 한 애널리스트는 “해외 영업에는 정도가 없다. 뚫릴 때까지 계속 시도하는 수밖에 없다. 만약 하우리가 대형 해외 판매 계약에 성공한다면 국내 증자에도 성공할 것이고, 연구인력을 확충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는 것은 물론 회사 인지도까지 올라가 안연구소를 앞지를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두 경영자의 해외시장 개척 방법이 사뭇 다른 데 대해 연합뉴스 김범수 기자는 이런 해석을 내놓았다.
“서울대를 나온 의사 출신에 벤처업계의 신사로 알려진 안사장의 고품격 스타일과 전문대 출신으로 방송국 개그맨 시험을 치르는 등 다소 도전적인 인생을 살아온 권사장의 성향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다. 안사장이 중국과 일본 시장을 주요 판매 목표로 정해 공략하는 ‘선택과 집중’ 방식을 구사하는 데 비해 권사장은 미국 일본 중국 싱가포르 4개국에 잇달아 법인을 설립하는 등 동시다발적인 공략에 나서는 전략을 구사한다.”
가지 치기 vs 외길 고수
국내 사업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서도 두 사람은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안사장은 바이러스 백신, PC 보안 솔루션, 보안 컨설팅, 보안 서비스, 인터넷을 통한 제품 임대사업(ASP) 등을 아우르는 종합보안회사를 추구한다. 하지만 권사장은 오로지 바이러스 백신업체 외길을 꿈꾼다.
권사장은 “트렌드마이크로와 시만텍 등 세계적인 백신업체들은 한 길을 걸은 끝에 세계적인 기업의 대열에 끼게 됐다”며 “하우리 역시 이들이 걸은 길을 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안사장이 종합보안회사로 방향을 잡은 것은 급변하는 시장 환경 때문이다. 그는 “기업이 한 제품만을 고집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말한다. 제품도 인간처럼 수명이 있기 때문에 한 제품만 고집하는 회사는 그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이 끝나면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다. 안사장은 “백신이라는 핵심역량을 지키되, ‘인접 영역’과 ‘유관 영역’으로 활발하게 진출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안사장은 2001년 PC 보안 솔루션 사업을 시작하면서 인접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앤디’라는 제품을 내놓으며 PC 보안 시장에 진출한 안사장은 최근 앤디와 V3, 그리고 개인 방화벽 영역까지 아우르는 ‘통합 클라이언트 보안 솔루션’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인접 영역 진출 방식은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과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인접 영역 진출은 회사의 핵심역량에 시너지 효과를 직접적으로 주는 방법이라는 것.
한편 유관 영역은 안연구소가 당장 진출할 수 있는 핵심역량도 없고 비즈니스 모델도 다른 영역이지만, 그대로 방치할 경우 회사 존립에 심각한 장애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게 안사장의 설명이다. 그는 “유관 영역은 바둑의 포석과 같은 맥락이다. 바둑에서 어떤 지점은 지금 당장 누구와도 관계없지만, 미리 그곳에 돌을 놓아두면 판이 전개되면서 판세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안사장은 이를 위해 보안 컨설팅 분야에도 진출했다. 아직도 안사장을 회사의 대표이사가 아니라 교수나 연구소장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안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주위에선 내가 사업하는 사람이 아니고 마치 대학 교수처럼 자기 이론을 만들어 실험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즈니스 모델은 오랜 고민 끝에 만들어진 것이며, 늘 그러했듯이 회사 생존을 위한 절박한 선택이지 느긋한 이론 실험이 아니다.”
연구소를 주식회사 형태로 만들 때부터 안사장은 ‘이 일을 하면 우리가 좀더 잘되겠지’라는 판단기준을 적용하지 않았다. 그는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머지 않은 장래에 생존을 위협받을 것’이란 절박한 기준을 적용했다. 패키지 소프트웨어, 인터넷, 보안의 3가지 분야를 수평적 네트워크 형태로 묶어 종합 보안회사로 탈바꿈시킬 때 역시 그는 이런 기준에서 전략을 세웠다.
권석철 사장은 지금도 엔지니어들과 함께 밤을 새며 제품 개발에 매달린다.
이를 위해 하우리는 우선 외국 제품이 장악한 서버용 백신 시장부터 뚫으려 했다. 그리고 이 분야의 백신 개발을 위해 연구개발(R&D)을 집중한 결과 국내 관공서와 대기업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서버용 제품을 공급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권사장은 관공서와 기업의 시스템 담당 엔지니어들을 설득해 클라이언트 백신까지 공급할 수 있도록 길을 트는 데 주력했다. 그래서 대검찰청, 법무부, 노동부, 국방부 등 대규모 관공서와 포스코, 현대건설, 국민은행 등 대기업들이 하우리 제품을 사용하게 됐다. 이같은 실적을 바탕으로 하우리는 2001년 16%였던 시장점유율을 25%까지 끌어올렸다.
260명의 직원을 거느린 안철수 사장은 이제 제품 개발이나 영업에서 손을 뗐다. 그는 회사의 중·장기 전략을 세우는 전략가로 남고, 여타 운영에 관한 부분은 김철수 부사장에게 권한을 위임했다. 기술개발 부문 권한은 CTO(기술개발본부장)들에게 넘겼고, 그는 엔지니어들이 스스로 알아서 연구하도록 말없이 배려한다. 실수가 있어도 좀체 질책하지 않는다.
반면 권석철 사장은 일부이긴 해도 여전히 제품 개발에 관여하며, 실수가 발견되면 바로 지적한다. 새로운 바이러스가 출몰할 때면 회사 엔지니어들과 함께 밤을 샌다. 그와 함께 회사를 창업한 백동연 실장, 최원혁 실장, 주영흠 팀장 등은 며칠 밤을 새서라도 백신을 개발하는 저력을 갖고 있다. 권사장은 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어떻게 해서든 백신을 개발해낸다는 것을 잘 안다. 질책도 하지만 그 자리에서 칭찬도 아끼지 않는다.
권사장의 무서운 점 가운데 하나는 그가 안철수 사장의 일거수 일투족을 샅샅이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토커라는 말이 아니다. 그는 “안박사님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전기를 쓸 수 있다”고 말할 정도다. 그는 안사장이 걸어온 지난 10년 동안의 족적을 훤히 외우다시피 한다. 안사장이 언제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지도 안다. 그만큼 안사장에 대해 관심이 많다.
1위를 쫓는 2위 기업의 경영자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마케팅 불변의 법칙’의 저자 잭 트라우트는 “2인자가 1위를 노리는 일을 포기하면 곧 선도자뿐만 아니라 나머지 동업자들의 공격을 받게 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렇듯 1위로 뛰어오르려는 권사장의 노력엔 다른 경쟁자들을 멀찌감치 3위로 떨쳐내려는 목적도 있다.
권사장은 안사장뿐 아니라 트렌드마이크로 창업자 스티브 창에 대해서도 잘 안다. 그는 스티브 창의 성공 스토리를 다룬 ‘아시아 1위 소프트기업의 비밀’이라는 책을 책장이 닳도록 읽고 또 읽었다. 그는 스티브 창이 네트워크에도 바이러스가 출현할 것을 예측, 이에 미리 대비했고, 이같은 노력으로 전세계 네트워크 보안 시장의 최고 강자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았다. 권사장은 스티브 창을 더 연구하기 위해 트렌드마이크로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엔지니어나 영업사원들을 해외 지사 직원으로 채용하기도 했다. 적을 알아야 냉혹한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안사장과 경쟁하면서 깨달았다.
안사장과 권사장에게선 닮은 점도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꾸준하게 발전을 거듭해가는 성실성은 두 경영자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안사장은 워낙 유명한 ‘공부벌레’며, 촌음도 쉬지 않고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한계와 단점을 보완하고 극복해가는 사람이다. 권사장 역시 독서광이다. 해외 출장을 가면 비행기 안에서나 차 안에서나 늘 책을 본다. 그의 사무실에는 국내외에서 발행되는 주간지와 월간지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영어 실력을 기르기 위해 고등학교 영어교과서를 손에 들고 틈날 때마다 문장을 외우기도 한다.
주어진 시간 안에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가짐도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그래서 이들의 입에서는 남을 탓하는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안사장은 의대 대학원 시절, 의학 공부와 컴퓨터 바이러스 연구를 병행하기 위해 새벽 3시면 자리에서 일어나 6시까지 꼬박 세 시간 동안 바이러스 백신 개발에 몰두했다. 미국에서 테크노 MBA 과정을 공부할 때는 이틀 걸러 하루씩 밤을 새워 공부하면서도 한국의 사업을 챙겼다. 안사장은 이 때문에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권사장은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끝장을 본다”고 바꿔 말한다. 2001년 코드레드 바이러스가 출몰했을 때 권사장은 “코드레드가 다시는 못 들어오도록 뿌리를 뽑자”며 엔지니어들을 독려했다. 코드레드는 평소 윈도2000을 쓰는 인터넷 서버에 숨어 있다가 정해진 시간이 되면 공격대상 웹사이트로 쓰레기 정보를 대량으로 보내 해당 사이트를 마비시키고 홈페이지 내용을 바꾸는 웜바이러스의 일종. 하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코드레드는 해킹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지 바이러스는 아니다.
그러나 권사장은 피해가 있는 만큼 다시는 코드레드로부터 피해를 받지 않도록 끝장을 보자고 엔지니어들을 독려했다. 덕분에 하우리는 코드레드를 퇴치할 수 있는 백신을 개발했고, 덤으로 네트워크 바이러스의 또 다른 변종인 님다 바이러스의 백신까지 개발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도 두 CEO의 닮은 점이다. 안사장은 “문제를 해결할 때 순간적인 영감이 해결의 단서가 되는 경우가 있지만, 가장 지혜로운 해결책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차근차근 찾아가는 가운데 도출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눈앞의 순간적인 이익에 연연하면 더 큰 성공의 기회를 놓친다”고 조언한다.
권사장은 “내가 일하는 분야의 역사를 꿰뚫고 있어야 장기적 안목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바이러스 서식지의 변천사를 ‘도스→윈도→서버→모바일→네트워크→바이러스와 해킹이 접목되는 새로운 곳’이라고 그려 보인다. 그는 “이런 흐름이 머리 속에 정리되지 않았다면 네트워크 바이러스 님다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막강한 1위 안사장에게서도 배울 것이 많지만, 그에 맞서는 권사장에게서도 배울 점이 많다.
‘평생 공부’로 자만 떨쳐낸다
권사장은 대학원 등에서 강의할 때 종종 “어떻게 안철수 사장과 경쟁할 생각을 다 했느냐”는 질문을 듣는다.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멀리 떨어진 2등이라 오히려 쉬웠다. 주위에서는 ‘안철수와 대결하는 것을 보니 권석철에게 뭔가 있는 모양이다’며 좋은 쪽으로 봐줬다. 여기에 운까지 좋았다. CIH 바이러스나 님다 바이러스 등이 출몰했을 때 하우리가 실력 발휘를 했기 때문이다. 안박사는 워낙 유명해서 외부 일(한국정보보호산업협회 회장직)을 맡는 등 바쁘지만 나는 2위라서 내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안박사가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니 내겐 해외 사업에 진력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1등에게는 1등의 면모가 있다.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안사장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회사를 경영할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몇 가지 방법 중에서 ‘평생 공부’를 가장 먼저 꼽는다. 자만은 실패의 지름길이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경계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늘 공부하다 보면 겸손해져서 자만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그가 펜실베이니아대 대학원 시절 가장 감명 깊게 읽었다는 책 ‘Built to Last’의 저자 짐 콜린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내게 자주 묻는다. ‘어떤 동기에서 이 거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착수하게 됐죠?’라고. 내 대답은 ‘호기심’이다. 답을 모르는 의문을 부여안고 답을 찾아 배에 오르는 일보다 흥미로운 일은 없다. 마치 미국 서부 개척기 시대 탐험가인 루이스와 클라크처럼 배에 올라 서쪽으로 가자며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만족스런 일이다. 거기에 도달해서 무엇을 발견할지 우린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돌아올 때는 당신에게 확실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