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호

디지털 포렌식의 세계

디지털 흔적 남기지 않고 범죄 저지르는 방법은?

  • 송홍근│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1-01-20 16:2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아뿔싸! 내가 한 일이 시간대별로
    • 일목요연하게 뜬다. 개중엔 민망한 것도 있다.
    • “지니가 뭡니까?” “동아일보 인트라넷인데….”
    • “구글에서 저를 검색했네요.
    • ○○을 취재하고 있군요. 이건 도대체 뭐예요.
    • 하루에도 몇 번씩.”
    • 머리칼이 서는 느낌이다.
    디지털 포렌식의 세계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 2만달러 등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박진 의원(한나라당)이 지난해 8월12일 항소심에서 벌금 80만원을 선고받았다. 법원이 2만달러 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면서 박 의원은 수렁에서 벗어났다. 정치자금법상 벌금 100만원 넘는 형이 확정되면 의원직을 잃는다.

    검찰은 태광산업 측이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 만찬장 사진 다수(多數)를 증거로 제출했다. 박연차 전 회장 진술 외엔 증거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 사진을 놓고 검찰과 변호인이 공방을 벌였다. 재판부는 박 전 회장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으며 만찬장 사진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박 전 회장의 양복에서 (안주머니에 돈 봉투가 들어 있는 것 같은) 윤곽이 드러나긴 하지만 2만달러가 든 봉투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이 대목까진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건을 재론한 까닭은 공개되지 않은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데다,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s)과 관련해 흥미로운 시사점을 줘서다.

    디지털 증거로 장난친 검찰



    디지털 포렌식이란 디지털카메라, PC, 휴대전화,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CCTV 같은 디지털 기기의 정보를 수집·복구·분석·보존해 법적 증거로 활용하는 학문 혹은 기술을 가리킨다.

    디지털 파일 복원술은 황우석 논문 조작, 삼성 비자금 특검 등 굵직한 사건 때마다 맹활약했다. 신정아 스캔들 때 검찰은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와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e메일로 주고받은 연서(戀書)를 복구하면서 진실에 다가섰다.

    박진 의원 사건으로 되돌아가보자.

    박연차 전 회장은 2008년 4월20일 베트남 국회의장 초청 만찬이 열린 신라호텔 3층 화장실 앞에서 2만달러를 건넸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태광산업 측이 촬영한 만찬장 사진을 확보했다. 사진 파일엔 촬영 시각과 박 전 회장 동선이 담겨 있었다. 검찰은 외부기관에 이 파일들의 분석을 의뢰했다.

    박 전 회장 진술대로 안주머니에 돈 봉투가 들어 있는지를 분석하는 데는 과학과 수학이 동원됐다. 검찰의 의뢰를 받은 기관은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안주머니에 돈 봉투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진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검찰은 전문가들의 분석 결과를 임의로 사용했다. 돈이 들어 있는 것 같다고 분석된 사진만 법정에 증거로 제출한 것이다. 법원은 이 같은 사실을 몰랐으나 “2만달러가 든 봉투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올바르게 판단했다.

    디지털 증거는 ‘아’ 다르고 ‘어’ 다를 때가 많다. 조작하기도 쉽다. 디지털 포렌식 기술이 발달할수록 디지털 증거를 둘러싼 다툼도 는다. 미국, 유럽에선 이 분야 능력을 갖춘 변호사가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호기심에 동해서 전문가를 수소문했다.

    이상진(46) 고려대 정보경영공학전문대학원 교수가 권위자로 손꼽혔다. 지난해 11월17일 경찰청이 주관한 대한민국 사이버치안대상 시상식에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동안 다수 사건 해결에 도움을 준 걸 경찰청이 치하한 것이다.

    또 다른 전문가는 한봉조(60) 변호사. 이 교수의 반대편에 서 있다. 디지털 증거를 분석해 의뢰인을 변호한다.

    자, 지금부터 이상진 교수와 한봉조 변호사를 강사 삼아 디지털 포렌식의 세계로 떠나보자.

    시간차 있는 빅 브러더

    디지털 포렌식의 세계
    이상진 교수 연구실을 보곤 실망했다. 미국 과학수사 드라마에 나오는 환경을 기대했는데, 어럽쇼, 국문과 교수 연구실이랑 다를 게 없다. 그와 마주 앉고 나선 찾아오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영화, 만화에 나오는 과학자를 닮았다. 흔치 않은 두꺼운 볼록렌즈 안경이 사람을 똑똑해 보이게 한다. 그는 대검찰청 프로젝트를 화제로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 대검 사건을 맡았나 봅니다.

    “사건은 아니고요. 기업이 데이터베이스로 자료를 축적하잖아요. 수사당국이 데이터를 압수하려면 데이터베이스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알아야 하겠죠. 파일도 데이터베이스랑 연동해서 가져와야 하고요. 그 작업을 돕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구동 중에 오류가 생겨서 통화했습니다.”

    만나기 전 동아일보 인물정보에서 그를 검색했다. 태어난 해 외엔 쓸 만한 정보가 담겨있지 않았다.

    “하하. 원래,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는 암호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 들어가 암호 해독 일을 했다. 그가 일한 파트는 ETRI에서 분가해 국가보안기술연구소로 독립했다.

    “기밀 정보를 이미지 파일에 숨기는 심층암호 기술이 있어요. 스테가노그래피라고 부르는데, 스파이들이 쓰죠. 그걸 해독하는 방법을 연구했죠. 기밀자료를 빼내는 쪽을 연구하다 범죄수사 쪽으로 넘어온 겁니다.”

    ▼ 북한 암호도 해독했습니까.

    “실제로는 국정원, 기무사가 하는 건데, 하긴 했죠. 구체적인 내용은 얘길 못 하고요. 공안 범죄자도 북한 암호를 써요. 그 사람들이 쓰는 문서암호 푸는 일도 좀 했고요.”

    ▼ 디지털 포렌식이 뭡니까.

    “수사하는 데 도움을 주는 과학을 포렌식이라고 합니다. 디지털 포렌식은 디지털 정보를 복원하거나 분석해 범죄 수사를 돕는 학문이죠. 디지털 기기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 순 없죠. 예컨대 교통카드, CCTV를 활용하면 범인 동선이 고스란히 드러나죠. 신용카드도 마찬가지고요. 휴대전화는 수사당국 처지에선 위치 추적기죠. 차량용 내비게이션에도 동선이 그대로 드러나고요.”

    ▼ 소설 ‘1984년’ 같은 ‘감시 사회’가 도래한 셈이군요.

    “조지 오웰이 묘사한 실시간 빅 브러더는 아직 불가능하지만, 시간차 있는 빅 브러더는 가능해요. 일산 어린이 상습 성(性)추행범을 어떻게 검거했는지 알죠. 아파트 CCTV에 잡힌 범인이 대화역 CCTV에 나타났습니다. 같은 시간대 교통카드 일련번호를 확인하면 용의자가 하차한 역을 알아낼 수 있고, 그 역에도 CCTV가 있습니다. 버스도 마찬가지고요. 동선, 행적을 감시할 수 있습니다. 예전 CCTV는 녹화만 했는데 지금은 원격에서 관제를 합니다. 실시간 빅 브러더에 근접한 나라가 영국이에요. 사무실에서 특정인의 동선을 따라가면서 관찰하는 그런 시대가 영국에선 조만간 올 겁니다.”

    ▼ 무서운 일이네요.

    “그래서 저는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내가 지난 여름에 한 일

    그가 대학원생을 연구실로 불렀다. 학생이 USB를 기자의 노트북에 장착하고 웹브라우저분석기(WEFA)를 실행했다.

    아뿔싸! 내가 최근 한 일이 시간대별로 일목요연하게 뜬다. 개중엔 민망한 것도 있다.

    “지니가 뭡니까?”

    ▼ 동아일보 인트라넷인데….

    “구글에서 저를 검색했네요. ○○을 취재하고 있군요. 이건 도대체 뭐예요. 하루에도 몇 번씩.”

    작업한 문서, 읽은 파일 제목이 드러난다. 머리칼이 서는 느낌이다.

    “○○의원실에서 자료를 받았네요. 어젯밤 휴대전화를 왜 컴퓨터에 연결했어요. 영화를 다운받았고, 테니스 좋아하죠? 메신저로는…. 블로깅했다, 메신저했다, 검색했다, 순서대로 다 나오죠.”

    이번엔 파일시스템분석기(FISA)를 가동했다. 하드디스크에서 삭제한 파일이 복원된다. 내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하드디스크를 포맷해도 이 프로그램으로 파일 복원이 가능한가요?

    “부숴도 복원되는 예가 많아요. 전문가에게 영구삭제를 맡겨야 합니다. PC와 연결된 프린터의 저장장치도 영구삭제해야 하고요.”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민간인 불법사찰 사실을 은폐하고자 서울 청계천에 위치한 업체에서 하드디스크 영구삭제를 해 지탄받은 일이 떠올랐다.

    ▼ 전문가에게 맡기면 싹 지워지는군요.

    “싹 지울 수 있죠. 인터넷에도 영구삭제 프로그램이 있어요. 좋은 걸로 해야 해요. 허접한 프로그램으로 하면 경찰, 검찰이 복구합니다.”

    ▼ 어떤 프로그램이 제일 좋습니까.

    “○○○. 이 프로그램이 가장 좋아요. 복구가 안 됩니다.”

    ▼ 국가나 회사가 마음만 먹으면 개인을 뒷조사할 수 있겠군요.

    “뭘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알 수 있죠. 회사에서 지급한 PC는 업무용 자산이니 회사가 들여다볼 수 있죠. 그래서 저는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이번엔 삼성SDI가 노조 설립을 추진하는 직원들의 휴대전화를 무단복제한 후 위치추적을 해 구설에 오른 사건이 떠올랐다.

    ▼ 개인이 개인을 뒷조사하는 일도 쉽겠습니다.

    “그러면 곤란하겠죠. 하지만 악용될 소지가 있어요. 우리 집 아이가 포르노사이트를 들락거리다 저한테 혼났죠.”

    ▼ 스마트폰도 똑같은 기술로 조사가 가능합니까?

    “휴대전화는 되고요. 스마트폰은 개발 중이에요. 곧 상용화할 겁니다.”

    ▼ 디지털 기기마다 암호를 걸어놔야겠군요.

    “암호를 없애고 들어가면 되죠. 하드디스크 빼서 다른 PC에 붙여도 되고요.”

    ▼ MS워드, 글 문서에 암호 설정 기능이 있습니다. 그건 안전합니까.

    “숫자만 조합한 비밀번호는 금방 풀리죠. 문자와 숫자를 결합하면 풀기 어렵습니다. PC로는 100년 넘게 걸려요. 국가의 영역에선 다르죠. 국가기관은 슈퍼컴퓨터를 쓰니까, 그것도 풀 수 있습니다.”

    ▼ 한 남북경협 브로커는 북한에 문서를 보낼 때 PC방에서 작업하고, 구글 G메일 계정만 사용하더군요. 문서 저장도 개인용 USB에 하고요.

    “공안사건 범죄자들이 그런 수법을 씁니다. G메일 계정 60개를 번갈아가면서 PC방에서만 사용한 사람도 있어요. G메일은 가입할 때 개인정보를 묻지 않는데다, 서버가 미국에 있어 압수수색을 못하죠. G메일도 e메일을 보낸 계정을 그때그때 삭제해야 안전합니다. G메일 사용 흔적이 PC에 남거든요. 잘 뒤져보면 다른 사이트에 접속한 흔적에서 아이디, 패스워드를 찾을 수도 있고요. 또 메일이라는 게 상대가 있지 않습니까. 그 상대와 여러 번 같은 계정으로 주고받으면 흔적이 남죠. 압수수색 들어가면 그런 걸 샅샅이 뒤집니다. e메일은 삭제해도 복구가 돼요. 삭제했다고 표시된 걸 삭제 안 했다는 표시로 바꾸면 그걸로 끝이죠.”

    ▼ 디지털 흔적을 남기지 않는 범죄를 저지르는 건 어렵겠군요.

    “범죄자 처지에선 G메일 계정을 수시로 바꾸면서 대포폰, 대포전화, 대포통장을 쓰는 게 유리하죠. 민간인 사찰 사건 때도 대포폰을 썼죠. 신용카드, 교통카드 말고 현금을 쓰는 게 좋겠죠. 내비게이션 대신 지도를 보고요.”

    포렌식 챌린지 2년 연속 1등

    이상진 교수팀은 미국 국방부 산하 사이버크라임센터(DC3)가 주최한 ‘디지털 포렌식 챌린지’에서 2년 연속 1등을 차지했다. 2등부터 9등까지는 미국 팀이었다. 탁자 위의 휴대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 디지털 전문가가 스마트폰도 쓰지 않네요.

    “그게 필요가 있나요? 대단한 기술 혁명인 양 소개되지만 별거 없어요. 게임이나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 거 안 해요. 컴퓨터도 잘 모르고요. 검색이나 좀 하고, 포르노사이트나 기웃거리지. 인터넷 정보가 허황된 것 같지 않습니까. 휴대전화로는 통화하고, 문자 보내고, 일정관리 하는 게 전부예요. 카카오톡이라고 스마트폰으로 메신저 하는 게 있던데, 그건 유용하겠더군요. 말보다 글이 편할 때가 있으니까.”

    ▼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것도 안 합니까?

    “하하, 그런 걸 왜 합니까? 흔적이 남아요. 신상 털기라고 알죠? 페이스북, 트위터는 흔적을 지우기도 어려워요. 취직하거나 이직할 때 디지털 흔적 때문에 낭패를 볼 수도 있죠. 페이스북, 트위터를 들여다보면 인격, 적어도 인터넷 인격을 파악할 수 있죠.”

    일부 국가에선 새로 채용하는 사람의 디지털 인격을 뒷조사해주는 업체가 활황이라고 한다. 하긴, 한국에서도 연애를 새로 시작한 남녀가 오랫동안 관리해온 블로그, 미니홈피를 닫는 예가 허다하다. 채용에 앞서 디지털 뒷조사를 하는 한국기업도 적지 않다.

    그는 “범죄자들은 범죄를 모의하면서 인터넷으로 수법을 검색하고, 범죄를 저지른 후엔 인터넷으로 수사과정을 지켜보는 게 통례”라고 했다.

    “재미난, 아니 이상한 사람이 많아요. 혈흔을 지우는 방법, 시신을 유기하는 방법 같은 걸 일반인은 검색하지 않죠. 청부살인을 의뢰한 사람은 청부살인을 검색하곤 합니다. 강력사건의 경우 용의자가 쓰던 컴퓨터를 가져와서 조금 전의 그 프로그램을 돌리면 심증에서 물증으로 넘어가는 증거를 찾을 수 있죠. 10대들이 여중생을 죽이고 한강에 유기한 사건 때도 인터넷으로 유기 방법을 검색했죠.”

    ▼ 그 사건 수사기록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는데, 한강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곳도 검색했더군요.

    “디지털 포렌식으로 확보한 자료를 용의자에게 보여주면 자백하는 경우도 있죠. 디지털 기록엔 시간정보가 담겨요. 알리바이를 검증하거나 진술의 진위를 가릴 수 있죠. 성범죄자 휴대전화에서 피해자 나체사진이 나온 적도 있고요.”

    ▼ 디지털 기기가 저장하는 정보량이 엄청납니다. 그 많은 정보 중 유용한 걸 어떻게 찾아냅니까.

    “그게 기술이죠. 디지털 포렌식은 감정, 감식보다는 수사의 영역입니다. 뭘 볼 거냐, 어떻게 들여다볼 거냐가 중요합니다.”

    ▼ 디지털 정보는 조작하기도 쉽지 않습니까.

    “조작 흔적을 찾아내는 것도 디지털 포렌식의 영역입니다. 글 파일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문서의 작성 및 변경시간 정보는 쉽게 바꿀 수 있어요. 안 보이는 곳에 잘 안 바뀌는 정보가 담겨 있죠.”

    ▼ 조금 전에 왔다 간 학생에게 부탁하면 디지털 기록을 바꿔 알리바이를 조작할 수도 있겠군요.

    “그렇죠. 조작할 수 있어요.”

    ▼ 고발인이나 수사기관이 증거를 조작해 부당하게 용의자로 몰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디지털 포렌식에 밝은 변호사를 찾아 가야죠.”

    ▼ 그런 변호사가 많습니까.

    “별로 없는 걸로 알아요. 김앤장에 팀이 있는데, 기업 고객을 상대로 기술 유출 사건 같은 것을 주로 다루는 모양이에요. 한 건에 수억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 그렇군요.

    “주변에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 있으면 저한테 보내세요. 돈이 없으면 무료로 해주고, 돈이 많다 싶으면 조금 받을게요.”

    ▼ 회계법인도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를 채용한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에선 만들었다가 다 망했죠. 딜로이트안진이 크게 하려다가 축소했죠. 미국에선 회계법인 시장이 커요. 회계장부니, 결재니 하는 것도 다 디지털로 이뤄지지 않습니까. 자회사를 감사하거나 부정을 파헤치려면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가 필요하겠죠. 회계법인에 그 일을 의뢰하는 겁니다. 한국은 기업문화가 미국과 다른 것 같아요. 기업 내부 일이 밖으로 드러나는 걸 꺼립니다. 쉬쉬하면서 처리하는 걸 좋아하죠. 한국에선 로펌 쪽 시장은 늘 것 같고, 회계법인은 그렇지 않을 것 같아요.”

    그는 대기업 관련 수사도 디지털 포렌식이 중심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예전엔 비밀장부를 찾는 게 일이었는데, 요즘은 누구 컴퓨터를 압수하느냐, 그 컴퓨터를 어떻게 분석하느냐에 수사 성패가 걸려 있죠. 장부가 파일로 바뀐 겁니다. 기업 서버의 데이터베이스엔 엄청나게 많은 정보가 있습니다. 그중 수사에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는 게 기술이죠. 경영지원실장과 여비서 PC는 반드시 압수해야겠죠.”

    ▼ 한국 경찰의 디지털 포렌식 역량은 어떻습니까.

    “역량은 충분하다고 봐야죠. 사건이 워낙 많아서 잘 못하는 거죠.”

    디지털 포렌식 1호 검사

    디지털 포렌식의 세계
    지금껏 수사기관을 돕는 이상진 교수의 설명으로 디지털 포렌식의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이 분야 전문가로 손꼽히는 한봉조 변호사의 설명을 들을 차례다.

    한봉조 변호사는 디지털 포렌식 1세대다. 서울지검 컴퓨터수사부(현 첨단범죄수사부) 부장검사를 지냈다.

    “1985년부터 컴퓨터를 썼어요. 법조계에 PC 쓰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죠. 검사 업무를 어떻게 하면 편하게 할까 하는 생각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공부했죠. 1998년께 판례를 개인적으로 전산화했죠.”

    ▼ 과외일로 시작해 전문가가 됐군요.

    “그렇죠. 대검에서 일하다 1995년께 서울지검으로 내려오면서 컴퓨터수사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디지털 포렌식이란 개념조차 없을 때죠. 처음에 검사는 나를 포함해 2명이 전부였어요. 검찰 직원들도 이쪽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해커를 강사로 불러와 직원들을 가르쳤죠. 지금의 첨단범죄수사부 시스템은 내가 만든 그대로예요.”

    ▼ 디지털 포렌식은 수사인가요? 감식인가요?

    “엄밀히 말하면 컴퓨터 증거 분석이죠. 디지털 포렌식을 활용한 첫 사건이 뭔 줄 압니까?”

    ▼ 모릅니다.

    “1995년 권노갑씨가 외무부 공문이 위조됐다고 주장해 정치적으로 파문이 인 적이 있습니다. 외국공관에 있는 동일한 컴퓨터를 다 수거해서 하드디스크를 분석했죠. 이 사건이 디지털 포렌식을 도입한 첫 사례예요.”

    ▼ 디지털 포렌식과 관련해 기억에 남는 사건으론 뭐가 있습니까.

    “2003년 SK 수사할 때 압수수색을 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아마도 대기업 최초의 압수수색이었을 겁니다. 조사는 특수부에서 했고 압수수색 계획을 우리가 짰죠. 기업수사는 PC와 데이터베이스를 압수하는 게 중요합니다. 세부 계획을 짜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죠. 성과도 좋았고요.”

    그는 디지털 포렌식을 활용한 검찰수사의 문제점을 지목했다.

    “검찰이 문제가 많아요. 산업스파이 사건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기술, 영업비밀이 유출돼 피해를 보는 회사가 있을 겁니다. 피해가 있었다면 철저히 수사해야겠죠. 그런데 그게 연구원들의 퇴직을 막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어요. 회사 자료를 아무것도 갖고 나오면 안 된다는 식으로 수사가 이뤄집니다. 현실적으로 연구원들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죠. 유출했다는 비밀이 다 알고 있는 기술이거나 실제로 카피할 수 없는 기술인 경우도 적지 않고요.”

    국정원과 검찰이 수조원대 산업 스파이를 적발했다고 발표했으나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한 판결이 떠올랐다.

    “압수수색을 하면 컴퓨터, 서버를 통째로 다 가져옵니다. 수사하는 쪽에선 어떤 게 영업비밀인지 모르잖아요. 혐의를 입증하는 데 필요하다면서 고소인한테 압수한 내용을 보여줍니다. 그 안에 피고소인의 기술, 영업비밀이 있을 것 아닙니까? 거꾸로 비밀이 새나가는 거죠. 수사기관이 객관적으로 판단할 능력을 갖춰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그런 식으로 일하는 거죠.”

    막노동 같은 일

    ▼ 칼이 발달하면 방패도 진화하는 게 이치니 변호사 시장에서도 이 분야가 중요해지겠군요.

    “확대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증거가 디지털로 남는 시대니까요. 기업은 언제든 압수수색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요.”

    ▼ 수사결과를 뒤집는 증거를 찾는 일이 고되지 않습니까.

    “다시는 안 맡겠다고 결심하는데 그게 잘 안 돼요. 막노동 같은 일입니다. 검찰에서 계좌추적을 할 때 잘 찾는 직원이 있고, 못 찾는 직원이 있습니다. 디지털 증거도 눈이 밝아야 문제점이 보입니다.”

    ▼ 디지털 증거는 조작하기 쉽죠.

    “모든 걸 조작할 수 있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누명을 쓸 수 있죠. 원래 상태대로 감정기관에 도착했느냐가 중요해요. 조금이라도 상태가 바뀌었다면 증거로서의 가치는 무(無)인 겁니다.”

    ▼ 박진 의원 뇌물수수 혐의 사건 때 검찰이 외부기관에 디지털 사진 분석을 의뢰했습니다. 연구한 쪽은 증거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는데, 검찰은 박진 의원에게 불리한 사진만 발췌해 증거로 냈더군요.

    “그런 게 잘못이죠. 최근에 무죄를 받아낸 사건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의뢰인이 굴지의 회사와 다툰 사건입니다. 고소인 측에선 계약서가 위조됐다고 주장했습니다. 디지털로 남은 문서의 생성일자 같은 걸 보면 고소인 쪽 주장이 아귀가 맞아요. 원칙대로라면 수사하는 쪽에서 디지털 증거가 위조됐을 소지를 살펴봐야죠. 겉으로 드러나는 날짜는 쉽게 바꿀 수 있거든요. 밤새도록 시스템 파일을 뒤졌습니다. 결정적인 파일 딱 1개를 찾았어요. 고소인들이 시스템을 관리하던 시간에 나타난 파일이었죠. 그 파일 하나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유리한 증거만 채택하고 불리한 증거는 찾았더라도 배제하는 건 객관적이지 못한 일입니다. 법 체제도 잘못돼 있어요. 컴퓨터를 압수당한 사람은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안을 들여다봐야 항변을 할 텐데, 복사해서 달라고 해도 잘 안 줍니다. 일반 증거물은 되지만 영업비밀이 담겨 있어 안 된다는 이상한 논리도 내세웁니다. 검찰이 정정당당하지 못한 거죠. 검사실에서 모니터로 봐라, 그게 말이 됩니까.”

    ▼ 그렇군요.

    “압수수색 방식도 바뀌어야 해요. 하드디스크만 복사해 가거나 서버에서 필요한 것만 가져가야죠.”

    ▼ 디지털 증거 분석에 밝은 변호사도 별로 없다면서요.

    “김앤장 소속의 구태연 변호사가 활동을 가장 많이 하죠. 실무 변호사들은 대부분 첨단범죄수사부 출신이에요.”

    ▼ 사회가 바뀐 만큼 이쪽을 공부하는 변호사가 많아져야겠군요.

    “맞아요. 수사를 해본 사람이 유리한데, 검사들이 이쪽을 잘 안하려고 하죠. 고생은 엄청 하는데 영광은 특수부 같은 데로 돌아가니까. 도와준 것밖에 안 되니까. 과학자가 분석한 걸 판사가 이해를 잘 못하는 경우도 많아요. 법적인 용어로 변호사가 ‘번역’해줘야 하는데 그럴 만한 인력이 부족합니다. 미국, 유럽에선 회계법인도 이쪽 분야를 열심히 합니다. 디지털 포렌식을 모르면 기업이 장난친 걸 잡아낼 수 없죠.”

    감시 사회

    디지털 포렌식 기술은 앞으로도 진화할 것이다. 감시 기술의 발달은 축복일까, 재앙일까. 디지털 흔적을 남기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는 방법은, 없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