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호

우리 음식문화는 사람을 대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황해도 빈대떡

  • 최영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11-06 14: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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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엽 시인의 서사시 ‘금강’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 굶주려본 사람은 알리라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해 두해도 아니고 철들면서부터

    그 지루한 30년 50년을

    굶주려본 사람은 알리라 -



    이처럼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은 굶주림을 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니 요리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요리는 극소수 상류층에나 어울리는 말이었다. 이 말이 우리 생활에 와닿기 시작한 것은 경제 사정이 나아진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과거에도 서민들이 영양 보충을 할 수 있는 먹을거리는 있었다. 그 첫째가 녹두 빈대떡, 둘째는 두부, 셋째가 개고기였다.

    통일문제연구소장 백기완씨(68)는 요즘 위장병과 당뇨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다. 그래서 아무 음식이나 먹지 못하고 점심도 집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해결한다. 그런 와중에도 즐기는 음식이 있으니 바로 서민의 영양 보충식 녹두 빈대떡이다. 그가 좋아하는 빈대떡은 서울 빈대떡과 조금 다른 황해도 빈대떡이다. 황해도에서는 이 빈대떡을 ‘부치기’라고 부른다.

    우리 음식문화는 사람을 대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
    부치기는 ‘부침’과 ‘부치개’를 일컫는 황해도 사투리인데, 그에게는 이 음식에 얽힌 눈물 겨운 사연이 있다. 지금이야 대폿집에서 흔하게 먹는 것이 빈대떡이지만 그의 유년 시절인 일제시대, 서민들은 이조차 자주 먹지 못했다. 기껏해야 설날과 8월 한가위 정도에 빈대떡을 맛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집 살림은 당시 서민 가운데서도 유난히 가난했다. 독립군 집안으로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다 고문받고 세상을 떴기 때문에 저녁도 못 끓이는 때가 많았다. 그가 부치기를 처음 맛본 것은 소학교 3학년 때, 새 집으로 이사갔을 무렵이다. 새 집이래야 다 쓰러져가는 초가였지만, 이사 기념으로 그의 어머니는 이 부치기를 처음으로 부쳤다. 처음 맛본 부치기 맛은 그의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어릴 때 먹은 음식맛은 평생을 간다는 말은 이래서 나왔다. 위장병을 앓는 지금도 그는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이 황해도 부치기는 백기완씨의 집안 음식이다. 고향 황해도 은율에서 이 음식을 맛본 그는 월남한 뒤 서울에서 부인 김정숙 여사(68)와 함께 이를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해마다 설날이 되면 서울 은평구 기자촌 대지 59평짜리 그의 낡은 집에는 세배꾼들이 몰려든다. 이때 내놓는 음식이 바로 황해도 부치기와 동치미, 그리고 소주다.

    그는 현재 부인 김정숙 여사, 막내딸 현담씨와 함께 살고 있다. 3월7일 꽃샘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며느리와 손자들을 집에 불러 황해도 부치기를 선보였다.

    “한국 음식 문화의 기본은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정성이야. 우리나라 사람들은 손님을 공손하게 대접하는 마음과 자세로 음식을 만들었어. 이런 마음과 자세로 만들기 때문에 특정인의 비위에만 맞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 입맛에 맞는 보편적인 맛을 내는 거야. 오늘 내가 이 대접하는 마음과 정성으로 가족들에게 부치기를 맛보이지.”

    황해도 부치기의 재료는 녹두, 숙주나물, 신김치, 돼지고기와 돼지기름이다. 그는 직접 연신내 미도파 백화점으로 나가 숙주나물과 돼지고기를 샀다. 이전부터 그는 부인 김정숙 여사가 콩나물 심부름을 시키면 여기서 콩나물을 샀다고 한다. 독재 정권과 싸우던 범 같은 기개도 아내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숙주 나물은 원래 황해도 부치기에는 쓰이지 않던 재료인데 끈기가 없어 잘 부스러지는 이 음식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부인 김정숙 여사가 새로 보탠 것이다.

    우리 음식문화는 사람을 대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
    이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녹두다. 지금이야 녹두가 흔히 볼 수 없는 귀한 곡식이지만 과거에는 그야말로 서민들이 먹던 음식이었다. 일제시대 아무리 가난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처마 밑에는 녹두 두어 됫박은 매달려 있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이 가운데 한 됫박은 8월 한가위에, 나머지 한 됫박은 설날에 빈대떡을 부치는 데 썼다는 것이다. 이날 요리를 위해 김정숙 여사는 하루 전에 국산 녹두 1kg을 사서 미리 물에 불려 놓았다. 원래는 이 녹두를 맷돌에 갈아야 하지만 맷돌이 없는 터라, 동네 방앗간에서 갈기로 했다. 집에서 50m 정도 떨어진 방앗간에서 그는 부인과 함께 하룻밤 정도 물에 불린 녹두를 기계에 넣고 갈았다.

    녹두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김치. 황해도 부치기에는 신김치를 쓴다. 부치기를 한 젓가락 입에 넣었을 때 시큼한 김치가 어금니에 아삭아삭 씹혀야 제격이다. 그의 집은 김장 김칫독을 마당에 묻어두고 있었다. 이런 김칫독이 모두 다섯 개. 그는 3월 초순의 찬 땅에 묻혀 있는 김장독 뚜껑을 열고 맛이 든 김장김치를 한 포기 꺼냈다. 이 김치는 잘게 썰어야 한다. 백기완씨는 왼손잡이다. 왼손으로 김치를 써는 할아버지 옆에서 손자 백쳐라군(9)이 마냥 신기한 듯이 보고 있다. 김치를 써는 할아버지와 지켜보는 손자. 손자의 빛나는 눈길을 보건대 아마도 장성해서 할아버지의 김치 썰던 손길을 잊지 못하리라.

    그 다음에는 끓는 물에 살짝 데친 숙주나물을 잘게 썬 김치와 섞어 버무릴 차례. 여기에 곱게 다진 돼지고기를 넣는다. 주재료인 녹두 반죽은 맨 나중에 붓는다. 미리 부으면 물이 생기고 삭기 때문에 모든 재료를 버무린 뒤 넣어야 한다. 반죽이 되면 적당한 크기로 떠서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지지면 된다. 여기까지는 서울 빈대떡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황해도 빈대떡은 식용유를 쓰는 여느 빈대떡과 달리 돼지 기름을 쓴다. 돼지 기름 내는 법은 간단하다. 정육점에서 돼지 뱃살의 기름덩어리만 사서 칼로 곱게 다진 후에 뜨겁게 달군 프라이팬에 올리기만 하면 된다.

    부치기를 지지던 백기완씨는 특유의 건 입담으로 한국 음식의 세계적인 특징을 설명했다. 그는 맛과 색깔, 냄새를 들었다. “고추장, 간장, 된장에서 우러나는 짙은 맛은 세계 어느 곳에도 없어. 배추김치, 동치미, 깍두기, 겉절이를 봐. 그 감칠맛을 세계 어느 음식이 따라올 수 있어. 둘째는 색깔이지. 새하얀 달래에 빨간 고춧가루가 점점이 흩어진 달래무침 색깔을 생각해봐. 떠올리기만 해도 침이 넘어가지. 냄새는 어떻고. 더운 여름 한적한 초가에서 옥수수를 찌는 냄새, 이 구수한 냄새는 재를 넘어 길 가는 나그네 회를 동하게 하지. 정월 대보름 광에서 꽝꽝 얼어 있는 찰떡을 꺼내 화로에 구울 때 나는 냄새, 이 또한 세계 최고야.”

    옆에서 거들던 부인 김정숙씨가 “나는 손으로 음식을 만들지만 저 양반은 원래 입으로 음식을 만들어요” 하고 귀엣말을 한다. 김정숙씨는 평생을 서울 시내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한 사람이다. 남편 백기완씨가 평생을 집에 돈 한 푼 가져다 준 적이 없으니, 혼자서 가계를 책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여사는 만 42년 6개월을 봉직하고 1995년 9월, 명예 퇴직했다.

    우리 음식문화는 사람을 대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
    음식 강의를 하며 지지다 보니 어느새 모인 가족들이 먹을 만큼 부치기가 완성되었다. ‘요리사’ 백기완은 안방에 둘러앉은 가족들에게 부치기를 한 접시씩 대접했다. 이제는 먹을 차례. 가족들과 둘러앉아 부치기를 한 젓가락 집던 그는 웬일인지 눈시울을 적셨다. ‘옛살라비(고향의 옛말)’ 생각이 나서 그렇다는 것이다. 두고 온 고향 땅과, 어릴 적 부치기를 부쳐 주던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가오는 설에는 꼭 가고 싶어. 이 부치기를 처음 맛본 내 고향에.”

    황해도 부치기는 백기완씨에게 고향 같은 존재였다. 위장병을 앓는 지금도 어릴 때 먹어본 그 맛을 잊지 못하니 말이다. 더구나 그 음식이 북녘에 두고 온 어머니와 겹쳐지니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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