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어떤 벽은 새벽 같습니다
바위 너머로 누군가 오는데바다 너머로는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내게 오는 길 잊었는지 파도도 오지 않습니다사실 내게 오는 길이란 없습니다그저 바다의 많은 부분을 걸러내고 도려내면작은 부분이 남게 되는데그 공간이 나일 뿐이지애초에 내게 …
이원하2020년 11월 09일계피와 붉음
가을은 시작이니,이제 끝내는 걸로 하십시다새들이 빠져나가는 소리와그 틈에 바람이 흥흥대는 장면 앞에가을이 왔으니,이제는 모르는 게 낫지 싶습니다오 님이시여,님뿐인가 합니다만,얼룩덜룩한 손이 건네주는모서리 깨진 버터 쿠키와봉지째 휘휘…
심민아2020년 10월 05일재활
강은 죽은 자들의 영혼으로 흐르고 있다. 끝없이 꽃으로 뒤덮인 들판을 걸으며. 너는 이곳이 천국 길이라고 말했지. 강물의 속도로 우리라는 인간이 떠내려간다. 가라앉는 꽃잎은 젖은 소매와 얼마나 닮았을까. 그렇다고 영혼을 비웃은 건 …
양안다2020년 09월 10일거울에게 전하는 말
너는 바보 아니었을까 함부로 영혼에 걸었으니까 누가 그런 것을 좋아한다고 비스킷을 먹으면 꼭 소파에 비스킷 가루를 흘려놓는 칠칠치 못한 사냥꾼처럼여기는 어디일까 너는 껍질을 뒤집어쓴 만큼만 존재했음에도 생물 사물이 허락하는 만큼만 …
유계영2020년 08월 11일뒤로 걷는 사람
그에게 세상은 한발자국씩 넓어지는 것이었다한발자국씩 멀어지는 것이었다이를테면 그가 걸을 때 옆에서 커다란 사과나무 한그루가 나타난다한발자국, 사과나무는 불타며두발자국, 사과나무는 검게 식으며세발자국, 사과나무는 썩은 사과 한 알이 …
박세미2020년 07월 11일밀랍 양초를 켜둔 청록색 식탁
계단이 쌓여가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싸움의 목적. 식탁에서 먼저 일어나는 당신의 의자가 바닥을 긋는 소리. 시간에 반듯하게 자르고 싶은 절취선이 생긴다. 가장 소중한 것을 꺼내오고 싶은 것. 그렇게 우리는 기울어져…
서윤후2020년 06월 14일누와 누
누와 누왈츠를 출 땐긴 방귀를 나눠 뀌는 법을 알던 누와 누누와 누기울어진 목과 달싹이는 얇은 귀서로의 장면 속으로 희망을 던지며누가 좀 도와줘누가 좀 도와줄게관광객이 가득한 광장에서 자는 낮잠누, 꿈을 꾸고 싶다관광객들이 꾸는 그…
배수연2020년 05월 15일우리말사전
누굴까요 맹물을 타지 않은 진한 국물을 꽃물이라고 처음 말한 사람은 며칠 굶어 데꾼한 얼굴의 사람들은 숨을 곳을 먼저 찾아야 했습니다 마을을 잃어버린 사람들 한데 모여 마을을 이뤘습니다 눈 내리면 눈밥을 먹으며 솔개그늘 아래 몸을 …
현택훈2020년 04월 14일블루투스 기기 1개가 연결되었습니다
영국은외로움을 관리할 전담 장관을 뽑았다고 한다파란빛이 도는블루투스 문양을 따라 그린다이런 무늬는 누가 만들었을까바쁘시죠,내가 먼저 묻는 건기꺼이 외로움을 선택하고 싶어서혼자 밥을 잘 먹고일기장을 버릴 수 있고책에서 가붓하다라는 단…
김은지2020년 03월 06일오는 봄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중력이었다사과한알이떨어졌다.지구는부서질정도로아팠다.최후.이미여하한정신도발아하지아니한다.*가도 가도 봄이 계속 돌아왔다* 이상의 시 ‘최후’에서
이은규2020년 02월 10일장작
장작을 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결 따라 패야 해아버지는 이른 가을부터 장작을 패며겨울을 준비했다처마 밑 켜켜이 쌓인 장작을 보면 든든했다펑펑 눈이 내리고 세상이 고요할 때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흰 눈 쌓인 집의 정적을 더했다나무들…
이희주2020년 01월 07일세 개의 돌
구르는 돌날아가는 돌경계의 돌사라지는 발밑에 나는 누구인가나는 어디 숨었나웃는 돌아픈 돌고통 받는 돌입술이 딱딱하게 굳어간다당신은 생생한 목소리로 말을 했는데뜨거운 돌미워하는 돌화난 돌지팡이에 싹이 나고 잎이 번성하고내일과 모레………
이근화2019년 12월 09일동굴
갑자기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얼마간은 그래도 비치던 희미한 빛깡그리 사라진 암흑복사꽃 피는 언덕에서 맞던 부드러운 바람황토에 뿌리박고 오른 소나무 향기계곡 웅덩이 피라미들의 완전한 자유로움아쉬운 모든 것 뒤에 두고 들어온 동…
신평2019년 11월 12일신앙
뾰족한 끝으로 누르면 터질 것 얇은 막으로 뒤덮여 부풀어 오르는 물집 같은 창빛을 따라가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뒤를 돌아보면 뿔처럼 단단한 손이등을 밀었다재촉하듯 구덩이로 밀어 넣듯청어 떼가 바다를 가르며 지나갔다진동여과장치숨반짝이는…
백은선 시인2019년 10월 13일무화과 숲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옛날 일이다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아침에는 아침을 먹고밤에는 눈을 감았다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황인찬 시인2019년 09월 16일노련한 강물과 오늘의 슬픔
마음이 아플 땐 돌멩이를 던진다광물에 남겨진 시간을 떠서허공의 정점에 풀어놓고 싶은 것이다서로 다른 지층에 묻힌 응어리가 옹기종기 조약돌로 평화로운 정오에도물수제비뜨는 연인의 돌멩이는수면 가장 높은 곳까지 떠오른다지상에서 처음 타인…
기혁 시인2019년 08월 13일시인의 선물
줄 게 이것밖에 없어요. 길거리에서 그는 빈손을 내민다. 나는 그의 빈손을 받아간다. 빈손을 파지처럼 구겨서 주머니에 넣는다. 주머니 속에 시인의 주먹이 공처럼 불룩하다. 그의 빈손은 곧 빈 코트에 내리꽂힐지도 모른다. 그의 빈손은…
김중일 시인2019년 07월 14일위주의 삶
나는 당신을 위주로 생각한다 목성을 위주로 도는 유로파는 목성을 위주로 생각한다 벗어나고 싶을 때 가장 늦게오는 것 위주로 도는 하루를 생각한다 부은 발을 주무른다발끝을 벽 앞까지 밀었다가 당겼다 하루를 유예하면서 하루를 돌았다 도…
문보영 시인2019년 06월 15일몸과 마음의 고도
사람이 달에 가고 13년 후화곡동의 병원인공 폭포 앞을 지날 때마다 엄만 저 근처에서내가 태어났다고 말했다나는 폭포 밑에서 났다고 여겨졌다비 오는 날 켜진 폭포장구벌레는 나와 동기흘러내린다사람이 중력을 뚫고 쏘아 올려지고그걸 당연하…
시인 권민경2019년 05월 11일사탕이 녹는 동안
[신동아=김선재] 사탕이 녹는 동안, 한세상이 지나간다. 오래된 표지를 넘기면 시작되는 결말. 너는 그것을 예정된 끝이라고 말하고 나는 여정의 시작이라고 옮긴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거야. 어디서든, 어떻게든. 등 뒤에서 작게 …
시인 김선재2019년 04월 0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