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에덴
아무도 닿은 적이 없어 늘 발가벗고 있는 깊은 산, 벌거벗은 아흔아홉 개의 계곡을 가진 깊은 산에 홀리고 싶어 아흔아홉 개의 빛을 가진 물소리를 붙잡고 싶어 산부전나비 쫓다가 무심하게 건드린 벌집, 나는 또 캄캄하게 절벽으로 밀리…
201608012016년 08월 05일倒着
구름이 해를 가리고 마침내 비가 내리는, 이야기라기엔 비좁고 사연이라기엔 주어가 없이 가로지른 목책 아래 울음을 씻느라 뒤도 돌아보지 못하는 개울은 마을까지 내려갔다가 잠시 사라진다 廢屋의 사람들은 그 물로 밥을 지어 일가를 이룬다…
201607012016년 07월 13일뱀의 입속을 걸었다
뱀이 쓸쓸히 기어간 산길 저녁을 혼자 걸었다 네가 구부러뜨리고 떠난 길 뱀 한 마리가 네 뒤를 따라간 길 뱀이 흘린 길 처음과 끝이 같은 길 입구만 있고 출구가 없는 길 ⁎시집 ‘딸꾹질의 사이학’(실천문학사, 2015) 중에서 고영…
201606012016년 05월 23일미안, 엄마
미안, 엄마엄마는 안경을 벗어 내 얼굴에 씌워주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엄마의 날씨는 어떤 것일까역광이죠 모르는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엄마는 내 손을잡고 멈추었다 까맣게 먼 숲의 입구였다모자를 벗고 아이들이 걸음을 늦춘다 엄숙함을…
201605012016년 04월 25일인연
친구가 사람을 죽였다고 고백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라면을 끓였다 달걀은 풀지 말아달라고, 친구는 내게 부탁한다 봉지 속에 면발을 사등분으로 부술 때마다 경미하게 눈가가 떨려왔다 그게 누구였냐고 왜 그랬느냐고 물…
201603012016년 03월 04일이동
이동 너는 여기가 좋다고 말한다 편해서 좋다고 말한다 나는 너를 잡아끈다 너는 불편하다고 말한다
201602012016년 02월 15일눈길
종일 눈보라가 쳤다. 누구였을까, 눈보라를 뚫고 왔다가 돌아간 사람, 어지러운 발자국, 그 옆에 족제비 발자국도 가지런하다. 언 내(川)를 건너는 눈보라, 눈 맞고 서 있는 자두나무야, 너는 외롭냐? 저문 뒤 귀가 큰 어둠과 귀신이…
201601012016년 01월 12일심문
늙는다는 것, 때리는 것도 힘에 부치지만사실 맷집도 달린다.권고사직을 제안받고 그는소진된 복서처럼 무엇이든 그러안고 싶었다.피와 땀으로 이룬 모든 것을세월은 거의 힘을 들이지 않고 빼앗아버린다.내버리다시피 판 주식을 사서 대박 난 …
201512012015년 11월 20일겨울 채비
바람은 차고 아침 서리 매서워져텃밭 무 걷이를 했습니다. 어떤 것은 아내의 매끈한 종아리 같고어떤 것은 큰아이 장딴지처럼 굵고옛적 나의 젊은 아버지가 하던 방식으로 무릎팍 길이만큼 땅을 파고 묻습니다그늘에 앉아 아내와 무청도 엮습니…
201511012015년 10월 21일하루하루, 하루
오늘도 새소리보다 먼저 깨어나비틀거린 마음보다 늦게 잠자리에 든다발가락에 쥐가 나고하루가 너무 길다남는 게 없는 생활도 하고남는 게 없는 생활 아닌 것도 한다보도블록만 보고 걷다가이파리만 보고 걷기도 한다해가 짧아지고 흐린 날이 많…
2015102015년 09월 22일오르간
바다 한복판에 오르간이 환하게 떠 있다누구의 익사체일까새들이 건반에 내려앉을 때마다밀물과 썰물이 반음 차로 울리고파도가 모래 해변으로 나와하얀 혓바닥으로사람 발자국을 지우는 시간게들이 하늘을 본다북극성 조등(弔燈)에 환하게 불이 켜…
2015092015년 08월 21일마흔아홉 살
나는 안개로 걸어 들어간다 나는 흩어지는구나 다른 곳으로 향하는구나 커튼이 모른 척 딴짓을 하고 있구나 뭉쳐 다니는 아이들에게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는구나 안개와 나는 자주 길을 잃는구나 커튼이 불빛을 삼켜도 불빛이 집 한 채를 삼…
2015082015년 07월 23일수평선
함께 가는 수평선에서바다와 하늘도 만나는데왜 긴 눈언저리 너머당신과 나는 둘이 될까요처음부터 알았던가요그대와 내게 남겨진 생은점점 멀리 두는 데 익숙해진그 바다를 안은 하늘처럼다시 만나게 될 인연이수평선으로 남겨지겠죠잠깐만 쉬고 갈…
2015072015년 06월 24일노래는 아무것도
폐품 리어카 위 바랜 통기타 한 채 실려간다한 시절 누군가의 노래심장 가장 가까운 곳을 맴돌던 말아랑곳없이 바퀴는 구른다길이 덜컹일 때마다 악보에 없는 엇박의 탄식이 새어나온다노래는 구원이 아니어라영원이 아니어라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2015062015년 05월 21일寧國寺
오래 자란 은행나무 국물을 마신다땅에서 올린 잎사귀 흔들리고 있다흙에서 박은 줄기 솟구쳐 몸 맺고다시 솟구쳐 절 낳고난간 치며 번져가는 소리를 풀었다밤과 새벽 걸어와 모두 면을 먹는다차지게 다진 강력분나물과 잘게 썰려 비벼진 양념작…
2015052015년 04월 21일찬란한 봄날
나무들이 물고기처럼 숨을 쉬었다비가 그치지 않았다색색의 아이들이 교문을 나섰다병아리 몸짓의 인사말조차들리지 않았다물살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문구점간판이 물풀처럼 흔들렸다자동차가 길게 줄을 서서수만 년 전 비단잉어의 이동로를 따라느릿느…
2015042015년 03월 19일골공(骨空) 경전
새는 오래전에 비행법을 잊어버렸다창살 밖 햇살은 얼마나 눈이 시릴까겨울나무 사이로 난 길은 또 얼마나 정다울까숨 막히는 일상의 아침은 언제나 더디게 오고퍽퍽해진 깃털을 만지며 출항을 준비하는 가장몰가치와 몰염치로 채워진 뼈 속날지 …
2015032015년 02월 23일이월의 날씨
이월의 날씨가 책장을 만지작거린다넘길까 말까 도로 덮어버리는 겨울 날씨막 물을 퍼 올리던 나무가 두레박을 놓았다영등바람이 귀뺨을 때린다 얼얼하다실컷 때리고 나면 저도 지치겠지한 발 한 발 다가오는 봄 아씨나갈까 말까따놓은 문이라 열…
2015022015년 01월 21일아리랑
익어가는 달빛이 아플까차마 못 밟아가던 길 멈춰 선한 그루 나무흐르는 달빛에 흐느적거려해묵은 심사를 파아랗게 젖힌한 포기 물초한 가닥 피리소리휘휘 저어서감아올린 옛 꿈은 언제면 저 달 속에하아얀 들국화로눈이 시게 피어볼까-시집 ‘달…
2015012014년 12월 19일마흔다섯 살의 가출
네 가슴에서 별로 뜨지 못하는 내 말이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다충혈된 눈으로 밤을 지키는 눈두레박을 내려 길어 올린 바람이죽은 이들의 뼈마디 속을 걸어간다수액을 짜면 그의 속살이 보이고전 우주를 움켜쥔 채풀섶에 매달려 있는 나…
2014122014년 11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