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경인년(庚寅年)은 6·25전쟁 60주년이고, 4·19혁명 50주년이자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이다. 더 멀게는 한일강제합방 100주년이기도 하다.
영국의 사학자 E. H 카의 말대로 역사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면 우리의 위정자들도 어느 행사에 비중을 두고 더 많은 예산을 집행할 것인지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과거와 진지한 대화부터 해보는 것이 옳은 자세일 터다. 역사에마저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 어떤 기념행사는 성대하게 하고, 어떤 기념행사에는 상징적인 노래(‘임을 위한 행진곡’)마저 금하게 한다면, 그 좀스러운 작태가 진정 역사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보수우파 정권이라면 좀 더 어른스러워야 한다. 역사는 단절되는 것이 아니다. 따로 떼어내어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제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기에 내일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19세기의 역사로부터 이번 글을 시작하는 것 도 그런 연유에서다.
1800년 6월, 정조가 승하(昇遐)하자 둘째아들 순조가 11세 어린 나이로 임금 자리에 올랐다.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1805년 정순왕후가 죽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실권을 잡았다. 안동 김씨, 외척세력의 세도정치는 그렇게 막을 열었다. 순조의 손자인 헌종은 1834년 11월, 8세에 즉위했다. 이번에는 순조의 비(妃)였던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1849년 6월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의 세도를 이어가는 방편으로 ‘강화도령’ 원범을 왕위에 올렸으니 그가 바로 철종이다. 원범은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로 아버지가 역모에 연루된 죄로 강화도로 유배됐던 젊은이다. 열아홉 살 농사꾼에서 졸지에 왕위에 오른 철종이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벽을 넘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조 사후(死後) 반세기 넘게 지속된 안동 김씨 일파의 세도정치는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민생을 도탄(塗炭)에 빠뜨렸다. 일문(一門)의 영달(榮達)에만 눈이 어두웠던 외척세력은 권력을 독점하고 백성을 수탈했다. 인재를 뽑던 과거제도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의 장터로 변질되었고, 돈으로 양반을 사는 세상이 되면서 신분질서가 크게 흔들렸다. 전국 곳곳에서 탐관오리들이 극성을 부렸고, 세수(稅收)가 줄면서 기층 민중인 농민에 대한 착취가 극심해졌다. 그 결과 제 땅에 농사짓던 이들은 소작인으로 전락하고, 소작인은 농사일을 버리고 떠도는 유민(流民)이 되었다. 그러나 유약했거나 무능했던 임금들은 세도정권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격이어서 나라의 근본이 무너지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하지 못했다.
1863년 12월, 12세의 고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함으로써 안동 김씨 세력의 세도정치는 막을 내렸다. 대원군은 내정에 대한 일대 개혁에 나서 기운 왕조를 바로 세우려 힘썼다. 그러나 그는 국제정세에 어두웠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나라 밖 흐름을 척화(斥和)의 쇄국(鎖國)으로 막으려 했다. 그의 완고한 쇄국정책은 성인이 된 고종이 친정(親政)에 나서는 1873년까지 지속됐다.
한편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黑船)의 위협에 굴복해 개항(開港)했다. 그 후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봉건막부체제를 타파한 뒤 서양 문물과 과학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여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기치를 세웠다. 일본은 불과 8년 후인 1876년 조선을 압박해 그들이 미국에 당한 것과 똑같은 불평등조약(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그렇게 조선 침략의 첫발을 뗀 일본은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1910년 마침내 조선을 병합했다. 결국 정조 사후 한 세기에 걸쳐 조선과 일본에 나타난 판이한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의 역사가 두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일제(日帝)의 식민통치와 남북분단, 전쟁으로 점철되는 20세기의 비극은 ‘통한(痛恨)의 19세기’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겠으나 100년 전 조선이 일제에 병합되지 않았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이 패전국 일본의 식민지인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 점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남북이 분단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참혹한 전쟁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 후 60년이 지나도록 정전(停戰)상태에서 적대와 갈등을 반복하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 되지도 않았을 터다. 정조 사후 100년을 ‘통한의 역사’라고 하는 이유다.
일제에 병합된 1910년 이후 100년은 이전 세기에 비한다면 ‘기적의 역사’일 수 있다. 비록 36년간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고 분단과 전쟁, 가난과 독재의 고통을 겪어야 했으나 대한민국은 이제 더는 약소국이나 개도국이 아니다. 선진국의 원조를 받던 나라 중 후진국에 원조를 하는 최초의 나라가 됐다. 세계 주요나라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중심 국가가 됐다. 100년 전의 눈으로 본다면 실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늘 대한민국 국민에게 ‘당신은 우리 역사가 자랑스럽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자신하기 어렵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일 국민이 과연 얼마일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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