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긴/ 한줄기 강이여/ 눈덮인 들판”(본초)
“유채꽃이여/ 달은 동녘에/ 해는 서녘에”(부손)
“백정의 마을도/ 밤에는 아름다운/ 다듬이 소리”(잇사)
“겨울바람이여/ 맨땅에서 날 저무는/ 거리의 광대”(잇사)
위와 같은 하이쿠를 보면 최소한의 점만 배치하고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이성복 시인은 하이쿠적 감동을 ‘일본도로 단칼에 내려쳤을 때, 일순 잘린 단면에 아무 것도 안 보이다가 잠시 후 피가 뚝뚝 흐르는 듯한 느낌’과 같은 것이라고 예리하게 표현한 적이 있다.
최근 우리말의 고유 리듬을 살려 시조의 활성화를 모색하고 있는 이종문 시인은 오늘날의 시는 지나치게 산문화해 시 본연의 운율이나 리듬을 상실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기에 극도로 축약된 하이쿠의 형식 자체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일본의 영문학자이면서 하이쿠적 표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도야마 시게헤코는 ‘생략의 문학’에서 “긴 시에서 짧은 시로 가는 데는 아무래도 인간, 문학이 함께 성숙해지는 것이 전제가 된다. 서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 내부에서는 장황한 서술이나 묘사를 요하지 않는다. 중요한 점을 지적하면 충분하다”고 했다.
국내에 나온 하이쿠선집에서는 하이쿠의 본래적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번역이 눈에 띈다. 가령 “오월장마여/ 큰강을 앞에 두고/ 집 두 채”(부손)란 하이쿠가 “오월 장마비 속에/ 집 두 채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와 같이 서술식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 시의 초장은 ‘오월 장마비 속에’라고 뒤와 연결시킬 것이 아니라 이 구절에서 한번 끊어야 한다. 이때 ‘-여(や)’라는 것이 끊는 말, 즉 기레지(切字: 한 하이쿠 안에서 문장을 끊어주는 조사나 조동사)가 되는데, 이 기레지는 짧은 시의 어느 한부분을 끊어줌으로써 시공간을 확대하는 구실을 한다.
‘--이여!’라는 영탄형 조사가 진부하다고 요즈음은 쓰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이러한 문말조사를 붙이든 안 붙이든 간에 이 작품의 경우 작가의 의도는 ‘오월장마’에서 한 번 의미를 단절시키고 있다. 이리하여 오월 장마비가 가득 내린 풍경을 눈앞에 먼저 그리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도 ‘마주보고 있다’라는 서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두막 두 채’라든가 하는 명사로 마쳐야 한다. 강한 여운을 남기기 위해서다.
찰나적 아름다움의 영원성
그리하여 이 시는 장마비로 잔뜩 불어난 강물의 ‘역동성’, 강물의 범람으로 금방이라도 집이 떠내려갈 것 같은 ‘긴박감’, 그리고 집이 한 채가 아니라 두 채인 것에서 안 떠내려 가려고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듯한 ‘안쓰러움’ 등으로, 단절된 공간을 메워 전체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다. 직선적인 서술을 했을 경우 의미전달은 확실하지만 문장의 단편처럼 인식되어 자칫 감동이 사라질 수 있다.
이리하여 하이쿠는 때로 그 짧음 속에 점을 배치하고 불연속적인 단절의 효과를 살려 “거친 바다여/ 사도섬에 가로 놓인/ 은하수”(바쇼)와 같이 광대무변한 우주를, “자세히 보면/ 냉이 꽃 피어 있는/ 울타리로다”(바쇼)와 같이 조화(造化)의 감동을, “가는 봄이여/ 묵직한 비파를/ 안은 이 기분”(부손)같이 낭만적 우수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하이쿠가 최근 인기를 끄는 또 하나의 이유로 우리가 잊고 있던 계절적 정서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는 것도 있을 것이다. 하이쿠는 발생 초기부터 앞서 든 키고(계절어)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키고는 계절적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동시에 변화하고 스러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수를 동반하며 찰나적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기호다. 화산 지진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이 잦고 비가 많이 오는, 날씨 변화가 심하여 모든 것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없던 자연환경에서 저절로 생겨난 일본인들의 미학일 것이다.
예컨대, “가는 봄이여/ 새 울고 물고기 눈에/ 어리는 눈물”이라는 바쇼의 하이쿠를 보자. ‘가는 봄’은 봄을 나타내는 키고이면서 봄을 아쉬워하는 석춘(惜春)의 정서에 여행길에 배웅나온 사람들과 나누는 석별의 정을 중첩시킨 것이다. ‘가는 봄’은 일본인들이 즐겨 쓰던 키고로, 가는 세월의 아쉬움과 영원한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는 감성적 시어로 자리잡고 있다. 때로 “이 쓸쓸함이/ 밑빠진 듯 내리는/ 진눈깨비여”(조소)와 같이 계절감각이 직설적으로 드러나는 경우 상징적인 맛은 다소 떨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절과 인간의 동일시
하이쿠의 계절감각은 다분히 불교를 감성적으로 받아들였던 문화적 전통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불교적 감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 일본의 중세 수필에 이와 같은 글귀가 있다.
‘아다시 들판 묘지의 이슬이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도리베산 화장터의 연기가 언제까지나 흩어져 없어지지 않은 채, 이 세상에 천년만년이고 산다면 얼마나 멋이 없겠는가? 이 세상은 덧없고 무상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 아니던가? 생명 있는 것을 보면 인간만큼 오래 사는 것도 없다. 하루살이가 저녁을 기다려 죽고, 여름 매미는 봄과 가을이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고스란히 1년을 사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여유로운 것이다. 아쉽고 섭섭하게 여기면 천년을 산들 하룻밤의 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어차피 영원히 살지는 못할진대 이 세상에 오래 살아 그 무슨 소용 있으리. 명이 길면 추해진다. 길어도 마흔을 못 넘겨 죽는 것이 아름다울 것 같다(쓰레즈레구사·徒然草).’
즉 인생은 유한하고 무상하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일본인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것이 결국 벚꽃의 미학과 할복자살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을 것이다. 바쇼는 ‘건곤(乾坤)의 변화는 문학의 씨앗’이라고도 하고 ‘사계절은 하이쿠의 친구’, ‘변화 속에 파고들어 정을 느낄 때 하이쿠는 저절로 된다’고 했다.
우리는 요즘 계절의 변화를 잊고 산다. 춥다 덥다 하며 난방과 에어컨이 잘 갖춰진 아파트에 틀어박혀서만 산다면 우리의 감성은 무뎌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풀꽃이나 야생화가 쉬 스러진다고 하여 사철 꽃을 피우는 장미나 사철 푸른 난초만 보고 있으면 계절 변화에 둔감해질 것이다. 인간은 어차피 스러져가는 존재이며, 같이 스러져가는 존재로서 자연과 동일시될 때 정서의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 있고 감성적 미학이 생겨난다. 하이쿠는 근본적으로 계절이라는 코드가 있기 때문에 ‘자연’ ‘환경’이라는 오늘날의 화두와도 부합한다.
하이쿠는 계절의 단면을 포착한다. 찰나적인 단면에서 계절의 아름다움이 감각적으로 스며나오는 것이다.
“모기소리 난다/ 인동덩굴 꽃잎이/ 떨어질 때마다”(부손)
“무지개를 토하고/ 막 피어나려는/ 모란이여”(부손)
“바위산의/ 바위보다 더 하얀/ 가을 바람”(바쇼)
“도미자반의/ 잇몸도 추워라/ 어물전 좌판”(바쇼)
“파를 하얗게/ 씻어서 쌓아놓은/ 매운 추위여”(바쇼)
철학적 성찰에서 하이쿠 연구를 시작한 우리나라 초기의 하이쿠 연구자 이영구씨는 부손의 “가오리연이여/ 어제 하늘이 있던/ 그 자리”가 불후의 명작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회갑이 지난 원로 교수의 이야기가 처음에는 얼른 와닿지 않았고 이유를 물어본 적도 없지만, 나이가 들고 세월을 절감할 때쯤 되니 그 의미가 다가왔다. 이 하이쿠는 노년에, 파란 초봄 하늘에 떠 있는 연을 시린 눈으로 바라보며 어릴 적 시간으로 타임슬립하여 동심의 세계를 회상한 것으로, 항상 어딘가로 돌아가고픈 인간의 근원적 향수를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한 찰나적인 단면에서 영원한 시간의 흐름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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