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회담 이후 순풍에 돛 단 듯 ‘잘 나가고 있는’ 남북관계 기류에 한 줄기 작은 와류(渦流)가 발생했다. 내용인즉, 한 대북사업가가 우리 법원에 북한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주인공은 남북 문화예술 교류사업을 추진해온 배경환씨(50·CNA Korea 대표).
저간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배경환 사장은 1998년 초 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부터 우리 연주자들이 평양에 가서 북한 국립교향악단과 함께 연주회를 갖고, 그 멤버가 다시 서울에서 연주회를 갖는다는 내용의 사업을 추진해왔다. 사업 외적 변수가 워낙 많은 대북사업이 으레 그렇듯, 이 사업안은 장기간 우여곡절을 겪다가 98년 11월29일 북한측 아태평화위원회와 합의서를 체결하는 데까지 진전됐다. 우리측 통일부로부터도 99년 4월16일 협력사업 승인을 받았다.
남북 양측 정부의 승인을 얻었으니 이제 큰 고비는 넘긴 듯했지만, 사업은 여전히 속시원히 진전되지 못했다. 지난 4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대형 사고’가 터지기도 했다. 1차 선발대가 평양에 먼저 들어가 북한 연주자들과 연습을 하고 있는데 2차 본진 관람단이 베이징에서 입북(入北)을 거부당하고 사흘 만에 서울로 되돌아오는 사태가 벌어진 것. 당시 관람단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사돈인 윤경빈 광복회장과 고려대 강만길 명예교수, 소프라노 조수미씨 등 저명인사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 6월13∼15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남북 화해의 새 전기를 연 정상회담은 언뜻 보면 배사장의 ‘음악회 사업’에 호재가 될 듯 싶었지만, 일은 엉뚱하게 꼬여만 갔다. 이번에는 우리 정부가 8월15일 북한 오케스트라의 서울 공연을 추진하겠다고 나선 것. 이 사안은 7월26일 김대통령이 언급했고, 8월1일 정식으로 발표됐다.
지난 2년간 이 사업에만 매달려온 배사장에게 이건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만약 정부 발표대로 8월15일 북한 오케스트라가 서울에 와서 공연한다면, 그가 추진해온 사업은 무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 후에 배사장이 추진해온 음악회가 성사된다 해도 그 때는 이미 사업의 의미는 사라진다. ‘최초’라는 프리미엄이 사라지고 난 뒤이기 때문이다.
배사장은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지난 8월2일, 서울지방법원에 공연금지 가처분신청을 낸 것이다. 채권자는 (주)CNA Korea, 채무자는 북한의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 김용순·대한민국·한국방송공사 등 세 곳. 신청 취지는 “채무자는 채권자의 승낙을 얻지 아니하고 북한 국립교향악단의 서울공연을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여파 때문이었을까, 애당초 8월14∼15일로 예정됐던 북한 국립교향악단의 서울방문 음악회는 8월초 8월20∼22일로 슬그머니 연기됐다.
헌법상 북한은 대한민국의 영토다. 따라서 당연히 대한민국 사법권의 관할에 속한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우리 법원의 판결이 북한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배사장은 왜 이런 소송을 제기했을까? 요즘처럼 남북관계가 순조로운 시기에 어울리지 않게, 소송이라는 극한적인 방법을 통해서 그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정부가 내 사업 가로채갔다”
8월12일 토요일 오후, 배경환 사장을 만났을 때 그는 매우 격앙된 상태였다. 마침 그 날 낮 법원의 판결이 ‘기각’으로 나왔기 때문. 서울지방법원 제50 민사부는 ▲ 신청인(배경환 사장)이 피신청인 아태평화위와 북한 국립교향악단의 서울공연에 관하여 전속적, 독립적 지위를 갖기로 약정했거나 신청인이 위 교향악단의 서울 공연 초연(初演)에 관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인정할 소명이 없으며 ▲ 신청인이 추진해오던 공연과 피신청인들이 현재 개최 예정인 공연의 내용이 반드시 동일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 신청인과 피신청인 아태평화위 사이의 공연계약에 따른 이행청구권은 채권적 청구권에 불과하므로, 특단의 사정이 없는 한 피신청인 대한민국, 한국방송공사에 대하여는 이를 배타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 등의 기각 사유를 밝혔다.
“뭐, 예상했던 결론이지만, 그래도 화가 나네요. 이런 일을 재판도 해보지 않고 판사들끼리 결정했다는 게 우선 납득할 수 없어요. 또, 판결문에 기각의 뚜렷한 이유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죄다 모호한 표현들이고, 그 모호한 표현들마저 모두 피신청인측 입장을 그대로 대변한 것들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이번 기각에 대해서는 당장 항소할 생각입니다. 또, 저와 계약한 당사자는 북한이니까 북한에 대해서 사기에 의한 형사소송을 제기할 겁니다. 구체적으로는 아태평화위원회 김용순 위원장, 저와 합의서에 서명한 당사자인 조광주 참사, 협상 파트너였던 황철 참사, 이렇게 세 사람을 묶어서 소송을 제기할 거예요. 마지막으로 한국방송공사에 대해서 지난 3월까지 저와 합의했던 사항을 파기한 것에 대해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할 겁니다.”
―그게 남북관계 사상 초유의 일이라는 건 잘 알고 계시겠지요?
“주위에서들 그렇다고 하데요.”
―소송을 제기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시는 겁니까?
“현재 남북관계나 정치상황으로 볼 때 제가 이긴다는 기대는 하지 않아요. 혹시 재판부에 제 소신에 동의하는 분이 있을까 일말의 기대도 해보지만, 그건 아무래도 저 혼자 생각인 것 같고….”
―우리 법원으로서도 꽤 곤혹스럽지 않겠어요? 헌법상으로야 우리 사법권이 북한 영토에까지 미치는 걸로 돼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방안이 없지 않아요?
“제가 확인해본 바로는 이런 소송사건은 일단 접수를 받아서 예외조항을 근거로 기각시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저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므로 사법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제가 최종적으로 호소할 곳이 법원밖에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까 북한측 당사자들에 대해서 형사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은 상징적인 일이고, 현실적으로는 우리 정부가 무언가 조치를 취해주기를 기대하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우리 정부에 대해서 하고 싶은 얘기는, 먼저 도덕적인 면에서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을 충실히 해달라는 겁니다. 정부가 국민의 이익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것은 직무유기 아니냐는 겁니다. 이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한 요구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제가 끝까지 제 권익만 주장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제가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양보할 수 있어요.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정부와 주변에서 어느 누구도 이런 사업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 저는 혼자서 외롭게 이 일을 추진해왔습니다. 저는 이런 프로젝트가 필요한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래서 국민이 자기 사업을 통해서 국가에 기여할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니냐고 생각해서 이 일에 매달려왔어요. 새로운 공연 아이디어를 짜내고 기획하는 것은 제 전문분야고 생업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그 프로젝트가 현실적으로 가능해진 상황이 됐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혼자서 이 일을 추진해왔지만, 이제 국가가 직접 이 일을 하겠다고 나서면 양보할 수 있어요. 이 일이 좋은 방향으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제가 하면 어떻고, 정부가 하면 어떻습니까? 그렇지만 우리나라가 패망 직전의 베트남 같은 나라도 아니고 정상적인 국가인데, 국민이 애써서 추진해온 일을 정부가 가져가겠다면 거기에 마땅한 보상은 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제가 지금까지 투자한 비용 다 날리고 끝난다면, 평양 음악회에 가겠다고 몇백만원씩 돈을 낸 수십명의 사람들과 제 사업에 투자한 기업들은 어떻게 됩니까? 북한에 준 100만 달러도 돌려받지 못하고, 국가에서도 내 권리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국가 정책을 믿고 이 일을 추진해온 저만 사기꾼이 돼버리고 말아요. 이게 정부가 할 일입니까? 국민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정부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런 경우를 당한다면 누가 나라에 세금 내고 법 지키면서 살겠습니까? 안 그래요? 국가가 국민의 일을 돕지는 못할지언정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
“최고위층에서 당신 계획을 환영한다”
배사장은 한번 말문이 터지자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동일한 사업에 대해서 이른바 ‘이중계약’을 체결한 북한측에 대한 배신감도 배신감이지만, 자신이 지난 2년여 동안 공들여 추진해온 사업을 ‘빼앗아간’ 정부에 대한 원망이 더 큰 듯했다.
그렇지만 그가 한 말만으로는 자세한 속사정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 쯤에서 시점을 앞으로 돌려 배사장이 남북 음악회를 추진해온 과정을 들어보는 게 좋을 듯하다.
―이제 좀 감정을 가라 앉히시고, 남북음악회를 처음 기획한 단계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주시지요.
“대북사업은 제가 1985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당시 정부에 문의를 해봤는데 ‘민간은 나서지마라’는 통고를 받았습니다. 90년에도 다시 한번 남북 문화교류를 시도했어요. 90년대 초반 남북교류가 활발하던 분위기를 타서 북한의 국립교향악단과 지휘자 김일진을 서울에 초청할 생각을 했던 겁니다. 김일진은 80년대 중반에 세계적인 지휘자 등용문인 카라얀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로 입상한 인물입니다. 정부에서도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했어요. 그러나 북한과의 접촉선도 마땅치 않고 해서 중도에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98년에 김대중정부가 들어와 햇볕정책을 표방하기에 저는 ‘이제 때가 됐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98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측과 어떻게 접촉했습니까?
“98년 4월에 중국 베이징에서 금강산 국제그룹 박경윤회장을 소개받았습니다. 박회장은 90년대 내내 국내 대기업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을 북측에 연결해준 분인데, 저는 사실 그 때까지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어요. 대북사업에 완전 초보였던 거지요. 아무튼 박회장에게 제 계획을 얘기했더니 좋은 사업이라며 돕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프로젝트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나요?
“당시에는 첼로와 바이올린의 세계적 거장인 로스트로포비치와 아카르도, 그리고 한국의 사라장과 장한나, 이렇게 네 명이 평양에서 북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게 한다는 계획이었어요. 서울 공연은 아직 생각하지 않았고, 평양 공연실황을 전세계에 중계한다는 복안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논리로 북측을 설득했습니다. 첫째 평양음악회 실황을 사상 처음으로 전세계로 내보내는 것은 북한의 국가 이미지 제고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둘째 문화·예술이라는 게 당신네가 생각하듯이 선전도구만이 아니라 돈이 될 수 있다, 셋째 남북이 힘을 합해 음악회를 열면 한반도 긴장해소에 큰 도움이 될 터이고 북한의 외자 유치에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설명했어요.
얼마 뒤 반응이 왔습니다. ‘최고위층에서 당신 계획을 환영한다. 장군께서 몇 년이 걸리더라도 이 사업은 수행하라는 지시를 내리셨다’ 이러더군요. 그게 98년 4∼6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해 추석 무렵에 북쪽에서 갑자기 200만 달러의 담보를 요구해왔습니다. 당황했지요. 왜냐하면 애초에 북측에 제시했던 것은 동업을 하자는 것이었거든. 다시 말해 선투자비용은 우리가 부담하고, 기업 협찬금이라든가 방송 중계료, 공연 입장수입 등 전체 수입에서 제작비를 제한 수익금을 반반씩 나누자고 제안했고, 북쪽에서도 처음엔 좋다고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200만 달러를 내라는 겁니다. 나중에 알아봤더니 북측이 자기네 유럽 공관을 통해서 시장조사를 해 200만달러 가치가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불을 내라고 나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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