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복사지 3층석탑에서 쏟아져 나온 국보들
1942년6월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경주 낭산(狼山) 북동쪽 구황동 (九黃洞)에있는 황복사지(皇福寺址) 3층석탑을 수리한다는 명목으 로해체하였다. 이곳이 의상(義湘, 625∼702년)대사가 출가한 사찰 이며의상이 만년에 제자들과 더불어 허공에 떠서 탑돌이를 하였다 는 내용이 ‘삼국유사’ 권4 의상전교(義湘傳敎)에 실려 있었으므로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일인 학자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었기 때문 이다.거기에다 금당(金堂, 법당)터 기단부에서 12지신상(十二支神像;열두해 띠를 상징하는 동물신상) 조각이 발견됨으로써 더욱 그 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결과였다.
이때는일본이 1941년 12월8일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을 일 으키고 싱가포르와 자바 등을 차례로 점령하여 표면적으로는 승승장 구하던 시기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이미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내 심 그 대비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한편일제는조선 점령 이후 30여년간 우리 문화 유산을 고고학과 미술사 연구의 실습대상으로 삼아 학술적인 조사라는 명목으로 발굴 과해체를 거침없이 자행하여 수많은 중요 문화유산들을 공식 비공 식적으로 파괴하고 탈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호시절이 얼마 남지않았다는 위기감이 엄습하자 일인 전문가들은 우리 문화 유산 의 해체와 발굴에 더욱 조급증을 내며 광분하게 되었다.
그래서 국보 37호인 도 해체 수리의 수난을 겪게 되었다. 과연 그들이 예측했던 대로 을 해체해나 가자 제2층 옥개석(屋蓋石, 지붕돌) 위에서 사리(舍利; 화장하고 남 은 부처의 유골, 각종 보석 형태의 낱알을 이루고 있음)를 봉안하기 위해마련한 사리장치(舍利藏置; 사리를 넣어두기 위한 설비)가 발 견되었다.
네모지게파낸 사리공(舍利孔; 사리장치를 모시기 위해 파낸 구멍) 안에는금동으로 만든 외함(外函, 겉함)(도판 1)이 꽉 들어차 있었 다.외함은각 변이 30cm에 높이 21.3cm인 정방형 함인데, 뚜껑을 열자 그 안에 은으로 만든 네모난 은제 합(盒, 각 변 5.9cm)과 순금 으로만든2구의 불상(국보 79호, 80호) 및 높이 6cm 정도의 고배 (高杯)형금잔 한 쌍(도판 2)과 은잔 한 쌍(도판 3), ‘무구정광대 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1권, 각종 유리 옥(玉) 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네모난 은합 속에는 다시 높이와 각 변이 2.3cm인 정방형 금합(도판 4)이들어 있고 금합 안에는 녹색 유리병 속에 사리가 모셔져 있었 다.외함 사방 표면에는 99기의 소탑이 점각(點刻; 송곳 끝으로 점 을 찍어 조각함)되어 있고, 뚜껑 안쪽 면에는 350여 자나 되는 장문 의 명문(銘文)이 철필(鐵筆, 쇠붓)로 씌어 있었다.
3층석탑의 내력
탑안 유물들을 대강 확인하고 이를 수습하여 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오자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모여들더니 천둥 번개를 치 며장대 같은 비를 퍼부었다. 이에 탑의 해체를 주도했던 일인학자 들은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어쩔 줄을 몰랐고 이를 목도한 경주 사 람들은 불벌(佛罰)이 무심치 않음에 쾌재를 불렀다 한다.
뚜껑안쪽에새겨 놓은 명문(도판 5)은 이 탑의 조성 내력을 밝힌 것인데,이 시대에 남겨진 완전한 일차사료(一次史料; 일차적인 역 사 자료)가 전무하던 상황에서 가히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아래에 문장 전체를 모두 옮겨보겠다.
“대저성인(聖人)은 팔짱을 끼고 있어도 혼탁한 세상에 살면서 창 생(蒼生;세상의 모든 사람 내지 모든 생명체)을 길러내고 지덕(至德;지극히 큰 덕이니, 임금이나 성자를 가리킴)은 하는 일이 없어 도염부(閻浮;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알맞게 군유(群有; 세 상의모든존재)를 제도(濟度; 보살이 중생을 고해에서 건져 저쪽 언덕에 있는 극락의 세계로 인도해줌)한다.
신문(神文)대왕도 5계(五戒; 세속인이 지켜야 할 5 종류의 금계- 殺生, 偸盜, 邪淫, 妄語, 飮酒)로 세상을 이끌고 10선(十善; 5계 외에 기본적으로지켜야할 5종류의 금계- 食肉, 邪見, 毁謗, 欺, 貪을 범하지 않는 것을 10선이라 함)으로 백성을 다스렸다.
정치가안정되고 공업(功業)이 성취되자 천수(天授) 3년(692) 임진 7월에승천(乘天)하니 그런 까닭으로 신목(神穆)태후와 효조(孝照) 대왕은종조(임금의 시신)와 성령(聖靈; 임금의 혼령)을 받들어 모 시기위해 선원가람(禪院伽藍, 선원이나 가람 모두 절이라는 의미) 에 3층석탑을 건립하였다.
성력(聖曆) 3년(700) 경자 6월1일에는 신목태후가 드디어 길게 이별 하고깨끗한 나라로 오르시었으며(돌아갔으며), 대족(大足) 2년(70 2)임인7월27일에는 효조대왕이 등하(登霞; 노을 속으로 올라감, 즉 임금이 돌아감. 登遐, 昇遐 등으로 쓰기도 함)하였다.
신룡(神龍) 2년(706) 병오 5월30일에 지금의 주상인 대왕(성덕왕)이 부처님 사리 4알과 전금(全金, 순금) 미타상 6치(寸)짜리 1구(軀)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석탑 제 2층 위에 안치한다. 이 복전 (福田;복을 낳게 하는 밭이라는 의미니 사리장치를 봉안한 공덕을 일컬음)으로 밑천을 삼도록 올리니 신문대왕과 신목태후와 효조대왕 의대대 성조는 열반(涅槃, 해탈)의 산을 베고 보리(菩提, 大覺)의 나무 아래에 앉으소서.
융기(隆基)대왕(성덕왕)의 목숨은 산하(山河)와 같이 오래고 지위는 마른시내와 같이 영원하며 대천(大千; 1000의 제곱이니 헤아릴 수 없이많다는 의미)의 아들들이 충족하게 갖추어지고 칠보(七寶; 전 륜성왕이가지고있는 7종 보배- 輪寶, 象寶, 馬寶, 如意珠寶, 女寶, 將寶, 主藏臣寶)가 상서로움을 드리게 하소서.
왕후의몸은월정마니(月精摩尼, 月愛珠, 달과 같이 생긴 구슬)와 같고 수명은 임금과 같은 숫자가 되게 하소서. 내외 친속이 점점 자 라나 커져서 옥수(玉樹, 임금의 자손)가 보배로운 가지를 더욱 무성 하고 알차게 하도록 하소서. 범천왕과 제석천 및 4천왕은 위엄과 덕 망이더욱 밝고 기력(氣力)이 자유로워 천하를 태평하게 하고 항상 법륜(法輪; 불타의 정법으로 이루어진 수레바퀴, 즉 막힘 없이 전파 되어 나가는 불교 교법)을 굴려가게 하소서.
3도(三途;地獄, 餓鬼, 畜生)에서 어려움을 면하게 하고 6취(六趣; 天, 人, 阿修羅, 畜生, 餓鬼, 地獄)에서 즐거움을 받게 하며 법계의 모든중생이 다 함께 불도(佛道)를 이룩하게 하소서. 사주(寺主)인 사문(沙門) 선륜(善倫)과 소판(蘇判) 김순원(金順元)과 김흥종(金興宗)이 특별히 교지(敎旨)를 받들다.
승인(僧人)영준(令儁),승인 영태(令太), 한내마(韓柰麻)인 아모 (阿摸),한사(韓舍)인계력(季曆), 탑전승(塔典僧)인 혜안(惠岸), 승인심상(心尙),승인 원각(元覺), 승인 현방(玄昉) 한사인 일인 (一仁), 한사인 전극(全極), 사지(舍知)인 조양(朝陽), 사지인 순절 (純節), 장인(匠人)인 계생(季生), 알온(閼溫).”
여기서돌아간 신문왕(650년 경∼692년)의 추복(追福)을 위해 신문 왕의왕비인 신목태후(神穆太后, 655년 경∼700년)와 새 왕으로 등 극한신문왕의 장자 효조왕(孝照王, 687∼702년)에 의해 기왕에 지 어져 있던 황복사 경내에 3층 석탑이 새로 건립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황복사는의상대사가19세(‘삼국유사’에서는 29세에 출가했다고 하고있으나, ‘부석본비(浮石本碑)’나 최치원이 지은 ‘기진원문 (寄進願文)’에서는 모두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고 했으므로 19세 출 가로보아야 한다)에 출가한 절이므로 이미 선덕여왕 12년(643) 이 전에 창건된 절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동쪽 부근 보문동에 (사적 180호)이 있으니 혹시 진평왕의 추복사찰로 지어졌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뒤바뀐 신문왕릉과 효조왕릉
그러던것이신문왕의 추복을 위해 이 3층석탑을 세우면서 신문왕 추복사찰이되었다.그 이유는 을 이 황복사 바로 동쪽 곁에 썼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강우방경주 박물관장은 일찍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현재 < 신문왕릉>(사적 181호)으로 알려진 (사적 7호) 동편 낭산 남쪽 기슭의 왕릉을 효조왕릉으로 보았다. ‘삼국사기’ 권8 효소왕 (孝昭王,照를昭라고 한 것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오자를 낸 것이 그대로 굳어진 탓이라 생각되니 마땅히 원래 시호대 로 효조왕이라 불러야 한다) 본기 11년(702)년 가을 7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왕이돌아가서 시호를 효소(孝昭)라 하고 망덕사(望德寺) 동편에 장사지내었다.”
그런데 현재 (사적 184호)이라고 알려진 곳은 에서 동쪽으로 20여 리 떨어져 있는 (사적 28호) 바로 서 쪽곁에 있다. 강우방은 이 사실의 불합리성을 간파하고 “낭산 동 쪽에 장사 지냈다”(‘삼국사기’ 권8 신문왕 12년 추 7월 조)는 기 록에 따라 신문왕릉의 소재를 황복사지 3층석탑에서 불과 250m 떨어 진 동쪽 지점에서 이를 확인하는 연구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리고왕릉 호석(護石)의 출현과 12지신상 조각 장식의 양식 진전 상황을 추적하여 황복사지 금당 기단석으로 사용한 12지신상 호석이 파릉된에서 옮겨 쓴 것이라는 명쾌한 결론을 내려 이론 (異論)을 제기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그의 주장을 간추려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왕릉에 호석을 두르기 시작한 것은 효조왕릉부터인데, 효조왕릉에서 는네모난잡석을 대강 다듬어 축대를 쌓듯 축조하고 나서 다듬은 삼각형받침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빙둘러가며 받쳐 놓아 그 붕괴를 막으려한, 서툰 기법을 보인다. 그러던 것이 그 아우 성덕왕(聖德王, 690년 경∼737년)의 왕릉에 가서는 소형 잡석 대신 일정한 크기 로다듬어 낸 판석(板石)을 둘러가며 받침기둥돌(撑柱石)을 사이사 이에박아서 짜맞추어 나가는 방식으로 발전시키면서, 외부에서 호 석을 받치던 3각형 받침돌은 효조왕릉 형식을 그대로 계승하여 받침 기둥돌을 외부에서 맞받치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경덕왕(723년 경∼765년) 13년경(754) 성덕왕릉에 비석 을 세우면서 왕릉호석의 받침기둥 사이 공간에 12지신상을 입체상으 로조각하여 장식하고 또 왕릉 둘레에 돌 난간을 세워 이를 장엄하 였다는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성덕왕릉의 12지신상 조각은 일정한 공간 배분을 얻지 못하고 있으며 난간과 받침돌이 서로 장애를 일으 킨다는 것이다. 타당한 견해다.
경덕왕은부왕인 성덕왕의 왕릉 장엄에서 이와 같은 시행착오를 경 험하고 나서 호석이 없던 조부 신문왕의 왕릉에 본격적인 호석 추가 사업을벌이게되었으리라 추정하였다. 그 결과 신문왕릉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12지신상 호석양식을 최초로 갖추게 되었다고 하였다.
외면에서 받침기둥돌을 받치던 삼각형 받침돌과 내면에서 호석의 판 석을고정하던 받침기둥돌을 하나로 합쳐 받침 기둥돌 뿌리를 삼각 형으로길게 뽑아 봉토 안으로 깊이 박아 고정하면서 그 표면을 넓 혀장방형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12지신상을 하나씩 돋을새김해 나 갔다는 것이다.
당연히 호석 전체를 12등분하여 일정하게 공간을 배분하고 있다. 이 런사실을 발굴과 실측 조사 및 복원도 작성 등으로 확인하여 논고 로세상에 발표하였으므로 황복사지 3층석탑에서 동쪽으로 250m 떨 어진지점에 신문왕릉이 존재했다는 것은 이제 기정사실이 되고 있 다.
그렇다면이신문왕릉에 신문왕과 그 왕비인 신목태후가 합장되어 있을가능성이크다고 하겠다. 과부가 된 신목태후가 바로 부군인 신문왕을위해서 맏아들인 효조왕과 함께 을 건 립하였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목태후의 둘째 아들인 성 덕왕이 등극하고 나서 왕 5년(706)에 모후인 신목태후와 형 왕인 효 조왕의추복을 함께 빌기 위해 부처님 사리 4알과 순금제 아미타불 상 1구 및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 등을 추가 봉안하며, 사리외 함을 다시 만들고 그 뚜껑 안쪽에 그런 사실을 글로 지어 새겨 놓고 있음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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