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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도 코미디요, 이길 수는 없어도 즐길 수는 있거든”

폐암투병 이주일의 심경고백 3시간

“암도 코미디요, 이길 수는 없어도 즐길 수는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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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감독은 이주일씨가 투병을 시작한 이후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이다. 얼마 전 박감독이 여자축구팀을 이끌고 대만 전지훈련을 떠났을 때는 국제전화로 친구를 위로했다. 박감독은 대만에서 선수를 훈련시키는 동안에도 각종 암치료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박감독은 이런 말까지 했다.

“야, 주일아. 내가 잘 아는 친구가 10년 전에 폐암 선고를 받았는데, 이번에 대만에 와서 만났어. 그 친구는 10년 전에 죽은 것으로 알았는데, 지금까지 멀쩡하게 살아서 사업 잘하고 있더라. 그냥 열심히 살다보니까 암도 이겨낼 수 있었대. 그러니까 너도 힘을 내라.”

이주일씨와 박감독의 우정을 얘기할 때 ‘양념’처럼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전두환 전대통령이다. 이주일씨는 전두환 시대가 만들어낸 ‘코미디황제’지만 그는 5공화국 시절 ‘저질 코미디’ 시비에 휘말려 방송에서 퇴출당한 일도 있었다. 물론 속사정은 이주일씨를 보고 대통령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주일은 얼마 뒤 박감독을 통해 전대통령을 직접 만나게 된다. 박감독이 청와대 잔디밭에서 전대통령의 아들에게 축구를 가르쳐준 일이 있었는데, 이때 박감독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갔던 것이다.

―전대통령께서는 문병을 오셨나요.



“직접 오지는 않고 비서를 보내왔어요.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내가 받지 않으니까 대신 사람이 왔더라고. 나를 잊지 않고 찾아주시니 고마울 따름이지.”

이주일씨의 외아들 창원씨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당시 전대통령은 직접 빈소를 찾아 문상했으며, 장세동 전안기부장 등 측근들까지 문상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장례를 치른 날 저녁 이주일씨와 박감독을 불러 자정이 넘도록 술을 따라주었다. 전대통령은 그때 ‘억장이 무너지는 절망감은 경험해본 사람만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주일씨는 지금도 그 말을 잊지 않고 있다.

눈물을 닦고 웃긴 무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에피소드 하나. 이주일씨는 아들의 장례를 치르고 사흘 뒤인 11월30일 서울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SBS 개국특집 프로그램을 녹화했다. 연예계에서는 이주일씨가 이 자리에서 은퇴 선언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는 마이크를 잡자마자 “여러분들께 깊은 사과의 말씀 하나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김영삼씨와 박철언씨의 관계 개선을 해내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암 환자는 항생제 때문에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이주일씨도 항생제를 맞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고통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축구얘기를 할 때는 환한 웃음까지 머금었다. 타고난 코미디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참고 있는 것일까.

“나는 여러가지로 특이한 경우래요. 항생제가 체질에 맞지 않으면 고생이 말도 못하게 심하다는데, 저는 아픈 데가 없어요. 암 중에서도 아주 ‘복 받은’ 암이죠.”

이주일씨는 마른 기침을 자주 했다. 날씨가 차가워지면서 가벼운 감기가 왔는데, 약을 먹어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주일씨가 물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인터뷰에 열중하다보니 놓치고 있었던 대형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이주일씨가 86서울아시안게임 때 성화를 봉송하는 모습이었다.

―빨리 회복하셔서 저 때의 모습으로 돌아오셔야죠.

“벌써 15년이 지난 일이야. 그때는 축구도 하고 아주 건강했었지. 그런데 말기암이라잖아. 다 틀렸어. 이젠 힘들어.”

―희망을 잃지 마세요.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암을 이겨낸 환자들도 많잖아요.

“그래야죠.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마지막까지 열심히 살아야겠지.”

이주일씨는 요즘 들어 가족들에게 짜증을 부릴 때가 많다고 했다. 입맛이 없고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니까 조금씩 세상살이가 귀찮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주일씨는 “내가 어려울 때 묵묵히 도와준 집사람을 생각하면,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마음처럼 잘 안돼요”라고 말했다.

군대에서 만난 아내

이주일씨는 군대 시절에 부인 제화자씨를 만났다. 제씨의 오빠가 이주일씨 부대에 근무하고 있었던 것. 한눈에 반한 이주일씨는 적극적인 프로포즈 끝에 상병 시절 결혼식을 올리고 부대 근처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1960년대 초반의 군예대에서나 가능한 소설 같은 얘기였다. 그때부터 20년 가까이 이주일씨가 무명배우로 설움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제씨는 불평 한마디 없이 남편을 뒷바라지했다.

이주일씨의 군대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화 한토막. 이주일씨는 노래솜씨와 바보흉내로 사단장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피리의 달인’ 이생강씨가 군예대 신참으로 들어오면서 이주일씨는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자 이주일씨는 날마다 이생강 이등병을 불러 기합을 주었다. 오죽 했으면 뒷날 이생강씨가 “그때는 제대증만 받으면 이주일을 죽여버릴 생각이었다”고 털어놓았을까.

이주일씨는 지난 봄 ‘신동아’ 식구들과 한가지 약속한 게 있다. 조만간 자신이 직접 담근 김장김치로 한 상을 차려서 기자들을 초대하겠다고 말했다. 이주일씨는 요리에 조예가 깊다. 간장 된장 고추장을 직접 담글 뿐 아니라 김치를 담가 장독 20여 개에 나눠 묻어두었다가 겨우내 이웃 노인들에게 나눠준다. 맑은 날이면 장독 뚜껑을 열어 햇빛과 바람을 쏘이는 게 이주일씨의 중요한 일과다. 그는 가난했던 젊은 시절에도 김장독만은 담요에 싸서 단칸방 구석에 ‘보물’처럼 모셔두었다고 한다.

―올해는 김장을 얼마나 담그셨어요.

“내가 몸이 이러니까 집사람에게 조금만 하라고 했더니, 화를 내더라고. ‘당신 몸이 다 낳으면 손님들이 많이 올 테니 더 많이 담가야 한다’는 거야.”

―‘신동아’에 실렸던 명태김치를 맛보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게 자연의 맛이거든. 명태에서 바다 냄새가 난다니까. 사람은 원래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가는 거잖아.”

코미디언들은 이주일씨를 나이에 관계없이 ‘주일이 형’이라고 부른다. 환갑을 넘긴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형’이다. 2000년 가을 가수 정수라씨 모친의 회갑잔치 때였다. 커피숍 구석에 앉아 있는 이주일씨 앞에 가수 탤런트 코미디언들이 줄을 서서 인사했다. 호칭은 ‘형’과 ‘오빠’. 이주일씨는 일일이 안부를 물으며 격려했다. 놀라운 것은 후배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빠꼼하게 알고 있다는 점이다.

―코미디언 양종철씨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그러게. 나도 그 얘기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젊은 놈이 참 안됐어. 그렇게 가버리다니. 사람 사는 거 참 허무하지.”

―배일집씨도 사고를 당해서 많이 다쳤다고 합니다.

“배일집이가? 조심해야지. 목숨이 두 개도 아닌데, 오래 살아야지. 배일집이도 고생 많이 했어.”

배일집씨는 이주일씨의 후배다. 하지만 방송에서는 배일집씨가 먼저 떴다. 1979년 TBC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서울 명동의 ‘오비스 캐빈’에서 일하던 이주일씨는 MBC ‘웃으면 복이 와요’에 출연했는데, 방송이 나간 뒤 시청자들의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너무 못 생겼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담당 PD가 ‘웃으면 복이 와요’팀에서 물러나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이주일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당시 코미디 구성작가로 이름을 날리던 K씨를 찾아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그림을 내밀었다. 일종의 촌지였다. 하지만 이때 K씨는 이주일씨가 가져온 그림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야, 너 뭐하는 새끼야. 이제 갓나온 놈이 이 따위 짓이나 하고 있어. 기본부터 다시 배워. 정신차려 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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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ix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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