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론 요즘 아이들에게는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이 더욱 흥미로울지도 모른다. 특히 영국의 화려한 시대를 상징하는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한 ‘해리 포터’는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신비롭고 아름다운 마법의 질서를 보여준다. ‘반지의 제왕’이 보여준 마법세계의 매력도 마찬가지다. 현실이 무질서하고 부조리한 만큼 마법의 환상세계는 더욱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 소설들이 지닌 보수성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특히 글로벌라이제이션 덕분에 후진국 아동들까지 그런 소설을 읽는 것엔 분명 문제가 있다.
자본주의의 효시가 된 소설
여기서 아이들에게 상상력이나 모험심을 길러준다는 소설의 취지를 문제삼을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로빈슨 크루소’를 비롯한 유사소설들이 보여주는 근대 유럽의 문제점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소위 글로벌라이제이션이나 자본주의 그리고 근대적 의미의 소설이란 다니엘 디포(1660~1731)의 ‘로빈슨 크루소’(1719)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로빈슨 크루소’가 읽히기 시작한 독서의 역사는 한국에 서양문학이란 것이 소개된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후로 100년 넘게 ‘로빈슨 크루소’는 영문학은 물론 서양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사랑을 받았다.
‘로빈슨 크루소’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은 3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그 어떤 작품도 ‘로빈슨 크루소’의 대중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 작품으로 디포는 ‘소설의 아버지’가 됐다. 또 다른 평가도 있다.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구현한 최초의 문학작품.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자본주의의 세계화인 제국주의,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의 효시라고 본다.
왜 그런가. 크루소가 목숨을 구해준 흑인이 그의 노예가 되겠다고 맹세하는 장면 때문이다. 그날이 금요일이어서 노예는 ‘프라이데이’라는 새 이름을 얻고 주인인 크루소에게 영어와 기독교를 배워 훗날 함께 영국으로 돌아간다. 소설을 통해 디포는 대영 제국주의의 식민지배가 정당하다고 선언한다. 당시 서양인의 눈엔 그 섬이 아프리카이든 아시아이든 마찬가지였으리라. 즉 크루소가 제주도나 독도에 표류했더라도 같은 이야기가 쓰여졌을 것이다. 만약 우리 선조가 크루소에게 노예의 맹세를 하고 ‘프라이데이’로 창씨개명을 했다면 지금처럼 즐거이 이 소설을 읽을 수 있을까.
어디 그뿐인가. 오늘날 명화로 꼽히는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는 오로지 영국인 가정교사에게만 의지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세계를 멸망시키려 하는 동양인 악당들을 상대로 멋지게 싸우는 ‘007’은 또 누구인가. 암흑 대륙의 대탐험가로 교과서에 등장하는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우정,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는 또 우리에게 무엇인가.
철저한 제국주의자 크루소
다시 ‘로빈슨 크루소’로 돌아가 보자. 흔히 크루소를 자본주의 인간의 전형이라 한다. 혼자 바다로 진출한 점에서 자본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개인주의가 발현됐고, 무인도에서 혼자 노동을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기본인 청교도주의의 구현이라 분석한다. 크루소는 난파선에서 금화를 발견하지만 무인도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포기한다. 이를 두고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재화를 가능한 한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것, 곧 경영을 중시했다’며 근대적 인간의 전형으로 보기도 한다.
정말 그런가. 이것은 오해다. 크루소는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를 대비해 금화를 숨겼다. 귀국 후에도 ‘황금 환상’이라 할 정도로 돈에 매달려 식민지 경영에 앞장선다. 따라서 이 소설은 18세기 중상주의 제국, 영국이 낳은 일종의 황금 환상 소설이다.
크루소는 서아프리카 기니아의 흑인노예 밀무역 상인이고, 사탕과 연초 플랜테이션의 경영자이며, 동남아시아로부터 중국을 거쳐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한 무역상이었다. 그야말로 식민 지배망을 형성한 전형적인 제국주의 인간이다. 그는 노예밀무역을 위해 브라질 북부로부터 당시 기니아로 총칭된 아프리카 북서 해안을 항해하다 난파해 무인도로 흘러들었다. 그 무역로는 영국에 이윤을 공급하는 대동맥이었다. 당대의 경제평론가이자 중상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디포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