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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알 동동 뜨는 뽀얀 술 냄새는 이웃을 부르고

쌀알 동동 뜨는 뽀얀 술 냄새는 이웃을 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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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계를 돌리 때는 긴장해야 하고 한번에 일을 해치우게 된다.
  • 그에 비해 홀태는 논 가운데 혼자 앉아 벼를 두어 단 베어다 털고, 누가 오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일하는 평화가 있다.
쌀알 동동 뜨는 뽀얀 술 냄새는 이웃을 부르고

감을 깎아 처마 밑에 매다니 창밖이 훤하다.

이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그 동안 사시던 충주 무너미 돌집에서. 선생님은 온몸으로, 그리고 글로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그 가르침을 받은 이가 얼마나 많겠나.

부고를 돌리지 않았는데도 선생님 상여를 뒤따르는 이들이 산길 굽이굽이 이어졌다. 유언에 따라, 선생님은 동네 할아버지 돌아가시듯, 그렇게 뒷산에 묻히셨다. 선생님 묻힌 곳을 남정네들이 발로 꾹꾹 다지는 걸 보며 산을 내려왔다.

선생님을 만나 뵌 지 십여 년. 그동안 나는 꽤 바뀌었다. 서울에서 산골로. 도시 선생님에서 시골 아낙네로. 이렇게 살게 되기까지 선생님 가르침이 컸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이번 글을 시작해 보겠다.

1996년으로 기억한다. 우리 부부, 초등학교 1학년 큰애, 갓난아기까지. 우리 식구는 이오덕 선생님께 새해 인사를 갔다. 과천 아파트에 들어서니 곳곳에 책이 쌓여 있다. 세배 드리려 하니, 선생님은 굳이 맞절을 하셨다. 잠시 덕담을 나누고, 우리 사정을 이야기했다. 남편이 시골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떠신지, 시골 학교가 아이 교육에 어떨지, 그 말씀을 드렸다. 그때 선생님은 한마디로 말씀하셨다. “도시에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솔직히 그때 나는 무척 두려워하고 있었다. 남편이 느닷없이 시골로 내려가 농사짓고 살자고 하는데, 한마디로 딱 자를 배짱도 없고, 그렇다고 진짜 시골 가서 살 자신도 없었다. 처음 든 생각은, 무얼 먹고 사나? 농사가 돈이 안 될 거야 환하게 내다보이고. 다음으론 내가 어떻게 농사일을 하나? 약골에 허리 병까지 있어 밥상도 제대로 못 드는데 어찌 시골 일을 하나? 밤잠 설치며 생각해도 답이 안 나왔다. 그런데 선생님 한 말씀에 두려움으로 뿌옇게 가렸던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도시에 연연하지 말고 한번 살아보는 거야. 그해 우리 식구는 서울을 떠날 수 있었다.

그 뒤 온 식구가 다시 한번 선생님을 찾아 뵌 적이 있다. 이번에는 충주 무너미 돌집으로. 큰애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하는 사이, 그러니까 이월 말로 기억한다. 이 때도 삶의 새로운 갈림길에 서 있었다. 큰애가 중학교를 다녀야 하나 그만두어야 하나? 막상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 하니, 이 사회에서 떨어져 나오는 일인 듯 두려웠다. 선생님께 여쭈자 “중학교에서 배울 게 있습니까?” 하셨다.

이렇게 삶의 갈림길에 섰을 때 나는 선생님을 찾았고. 그때 선생님은 두려움에서 풀려날 수 있는 말씀을 해 주셨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곤 한다.

그때 내가 두려워하던 것은 다름 아닌 내 자신이 만든 허깨비라는 것. 두려움에서 풀려나고 보니 알겠다. 선생님은 내가 허깨비에 갇혀 있음을 깨닫도록 도와주셨다. 두려움에서 풀려나 어떤 길을 가든 그건 내 자신의 몫이다.

올 봄부터 ‘신동아’에 글을 쓰게 되었다. ‘신동아’에는 이오덕 선생님 글이 연재되고 있었다. 이제 ‘신동아’에 글을 쓰면, 선생님 앞에 내 모든 걸 드러내는 자리가 되겠구나. 글은 작가나 특수한 사람만이 아니고,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는 거라는 가르침. 이 가르침이 있었기에 글을 쓸 엄두를 낼 수 있었지만, 바로 선생님 코앞에서 글을 쓰게 될 줄이야.

다른 이야기도 아니고 내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쓰려니, 삶을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한다. 사람이 사는 데는 어려운 일, 좋은 일이 서로 뒤섞여있기 마련인데. 글이란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우리 식구가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속내를 글로 어찌 표현하나? 그렇다면 글을 쓰며 내가 하고픈 말이 한마디로 무엇인가? 이걸 묻고 또 묻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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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영란 odong1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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