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확전(擴戰)에 필요한 병력의 수요를 채우기 위해 ‘육군특별지원병 시행규칙’(1943년 10월20일)을 공포한 후 11월20일까지 한 달 동안 각 학교 교장을 위시하여 각계 지도급 인사들에게 집중적으로 학병 입대를 권유하도록 강요했다. 이때 여운형, 안재홍, 문인보국회, 경성유지 등이 경성일보에 실었던 글을 엮은 책이‘반도학도 출진보’다. 여운형의 글은 1943년 11월11일자 경성일보에 실렸던 것으로 여운형의 친필 서명을 동판으로 떠서 신빙성을 높였다.
나는 오랫동안 언론사(史)에 등장하는 여러 주요 인물을 연구해왔지만, 2005년 초까지는 여운형의 ‘친일’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나의 저서 ‘역사와 언론인’(커뮤니케이션북스, 2001)에는 여운형이 1933년 2월17일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해 어려운 여건 아래서 신문사를 경영하다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올림픽 우승 때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으로 신문 발행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내용을 다루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이면서 일제 치하 언론인으로 활동한 여운형의 공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장지연의 친일 증거

‘반도 2500만 동포에 호소함’이라는 제목 아래에 여운형이 직접 썼다는 의미로 ‘수기’라고 표시되어 있다.
추론은 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1909년 11월5일자 경남일보에 실린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시 역시 장지연이 썼을 것으로 추정하여 그가 “앞장서서 일제를 찬양하는 기사를 썼다”고 주장했다. 신문의 날이었던 4월7일 밤 KBS ‘시사 투나잇’도 장지연의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국사교과서나 초등학생들이 읽는 위인전도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립기념관에서 시일야방성대곡 논설비를 세우는 계획을 추진했으나 장지연의 친일 논란이 불거져 무산됐다는 관련자 말도 소개했다. 하지만 경향신문이 증거로 제시한 그 한시를 장지연이 썼다는 근거는 아무 곳에도 없다. 이때부터 장지연의 친일 여부가 뜨거운 관심사가 되어 친일 척결을 내세운 매체들이 새로운 ‘증거’ 발굴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우국적인 항일논객의 상징이던 장지연을 심판대에 올려놓고 작은 흠결이라도 없는지 낱낱이 찾아내어 추상같이 단죄하려고 하면서 여운형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정도가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을 주어야 한다고 치켜세운다면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가 형평에 어긋날 수 있다고 우려됐다.
다시 논의돼야 할 功過
여운형도 친일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다. 일제 패망 직후 한국에 진주한 미군이 작성한 첫 비밀 문건은 여운형을 ‘친일파(pro-Japanese collaborator)’로 규정하고 있었다. 미군 보고서에 무게를 두지 않고 장지연에게 들이댔던 것과 같은 잣대로 봐도 여운형이 친일을 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증거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