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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태초(太初)의 품으로 들어가다

연-태초(太初)의 품으로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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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logue

카카두 국립공원(Kakadu national park)으로 보름간의 휴가등산을 떠나기로 했다. 인간문화의 흔적이 전혀 없는, ‘태초의 품’ 같은 깊은 산골짜기 안에서 그저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휴가를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행 날짜가 가까워오면서 또 다른 기대가 생겨났다. ‘이번 여행에선 어떤 의미 있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하는 기대였다.

긴 세월을 살았으면서도 나는 무엇이 나를 기쁘게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했다. 소망하는 꿈이 무엇인지, 사는 목적과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누굴 사랑해야 하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 몰랐으며, 돈이 얼마가 있어야 행복한지, 또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가슴을 방망이질하는 분주함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채 특별한 유익함도 없이 무거워진 책임감에 지쳐가는 중년이 되었다.

깊숙한 산속, 대자연의 심장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우주와 대화하는 방법을 배우고, 그동안 방치했던 상처를 치유받고 진정한 기쁨이 어떤 것인지 찾아 나오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인생이 ‘한 번뿐인 여행’이라면, 이번 등산 역시 가치 있는 인생의 짧은 여정이 될 것이었다.

숨어 있어 보존된 천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산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나는 대자연의 포로가 되었다. 인간이 생존만을 위해 숨을 쉬는 것이 아니듯, 자연 역시 아름다운 관계(連) 안에서 호흡하고 변화하며 생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람과 기후에 맞춰 물의 흐름이 바뀌고, 흐르는 물과 비 그리고 바람의 관계 안에서 바위 모양이 바뀌고 있었다. 물이 흘러가면서 작은 장애물을 넘어가는 소리는 아주 작은 변화에도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신음과 같았다. 모양과 색깔이 수시로 변하며 이동하는 구름은 행복과 번뇌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또 수많은 별을 데리고 내려오는 겸손한 밤하늘에서 저항하지 않고 내일을 기다리는 고요한 순리를 보았으며, 모닥불을 피워놓고 마주 앉았던 동행들의 기쁘고 슬픈 이야기에서 내 삶의 일부분을 엿보았다. 산속에 사는 원주민들의 신비한 문화 역시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웠다. 예기치 못했던 사건들이 발생해 곤경에 처하기도 했지만 서로의 어깨를 빌리며 등산을 마칠 수 있었고 이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보름간 찍은 사진을 정리하다가 그 순간들을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여행을 통해 내 삶의 형태가 얼마나 무미건조하며 그동안 내가 얼마나 벅찬 계획 아래 살고 있었는지를 되돌아보게 되었고, 자연 속에서 가슴 뛰는 열정의 순간에 치유와 축복이 가득한 마음속의 고향을 다시 찾아냈다. 그리고 갈망하지 않고 고요히 기다리는 겸손한 포로처럼 자유로운 승리자가 되는 순례자의 길도 생각해 보았다.

태초의 땅, 그곳의 숭고함과 초자연적인 신성함 속에는 분명 우리 일행을 지켜보는 자연의 신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은 우리에게 경건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 산이 간직한 고요한 신비는 그곳이 원주민들뿐만 아니라 우리 인류 모두가 지켜야 할 지구의 마지막 땅이란 생각을 하게 했다. 이번 등산은 내게 다음 여정을 준비하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자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 되었다.

우리의 입산 목적지는 원주민(原住民) 관리 지역이어서 입산 조건과 입산 가능 인원 등이 무척 까다롭게 관리되고 있었다. 광대한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입산 허가를 받는 데만 무려 3개월이 걸렸다. 우리 등산클럽의 명예회원이며 이번 등산의 인솔자인 지미와 몇몇 회원은 이미 여러 번 다녀온 곳이지만, 등산로마다 다른 매력이 있어 새로운 즐거움을 찾으려는 것 같았다. 카카두 등산은 겨울 비수기에 예약을 해야 비행기와 호텔비도 할인되고 식량을 미리미리 준비할 수 있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 인터넷을 통해 카카두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을 꼼꼼히 익혔다.

카카두 국립공원(Kakadu national park)

연-태초(太初)의 품으로 들어가다
호주에서 가장 북쪽(Northern territory), 바다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 잡은 열대지방이며 다윈(Darwin) 시에서 가까운 이 국립공원은 넓이가 프랑스와 맞먹는다. 천연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고, 원주민들의 전설과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1984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으로 공인되었고, 1999년 국제천연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1976년, 호주 정부는 이 국립공원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국립공원의 절반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현재 국립공원에 사는 500여 명의 원주민은 연방 소유의 나머지 땅에 대해서도 관리권한을 신청한 상태다. 범람원의 평원이란 뜻의 ‘카카두’는 고원과 평원, 협곡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계절에 따라 좁은 산속의 협곡까지 조수가 밀려들어 범람원이 변화하는 경이로운 산이다.

하늘을 나는 연이 되어

등산은 일요일에 시작됐다. 나는 등산 전날 다윈 시를 관광할 계획으로 금요일 근무를 마친 뒤 저녁 7시경 비행기를 탔다. 다윈 공항, 지미가 보내준 계획서대로 빌리와 잭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자정이 넘어 호텔에 도착하니 카운터 입구에 방 열쇠 두 개가 우리 클럽 이름이 적힌 봉투에 담겨 있었다. 먼저 들어간 방은 후텁지근했다. 그래서 냉방장치가 잘 되어 있는 다른 방에 짐을 풀려고 하는데, 잭이 아무렇지 않은 듯 먼저 짐을 내려놓았다. 여자인 나에게는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남편에게 늘 우선순위의 대접을 받아온 나는 이 두 남자의 무례함에 어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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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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