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수’<br>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민음사, 200쪽, 1만3000원
“아직도 여기에서 뭐 하고 있는 거니!” 그녀의 목소리는 사납지 않았지만 부드럽지도 않았다. 실비는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면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 거니?” 이레나가 대답했다. “네 나라에!” … “나는 이십 년 전부터 여기에 살고 있어. 내 삶은 여기에 있다고.” “너희 나라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어.” … “너의 위대한 귀환이 될 거야.”
-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민음사, ‘향수’ 중에서
여기는 프랑스 파리이고, 실비가 말하는 ‘네 나라’, 곧 이레나의 나라는 체코다. 이레나는 체코에서 파리로 망명해 20년 째 살고 있다. ‘이레나가 왜 망명했는가’에 대한 질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데, 이 질문과 동시에 질문을 풀어가는 방식, 곧 ‘귀환’의 여정이 망명 작가 쿤데라가 이레나를 앞세워 ‘향수’를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자 소설의 요체다.
강제 점령기의 처음 몇 달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나라를 떠난다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으며 그들은 두려움 없이 친구들에게 작별을 할 수 있었다. … 떠나기 전날 아무 예고도 없이 여자 친구의 문을 두드렸다. … 격려의 문장이나 몸짓, 작별의 말을 기다렸으나 헛수고였다. … 떠나던 날 엄마는 그녀를 안아주지 않았다. … “우리는 감정을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잖아!” … 작별을 놓친 사람은 재회에서 별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다. - 위의 책 중에서
이레나는 실비가 일깨워준 ‘위대한 귀향’을 위해,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에 보르도산 고급 포도주를 준비한다. 그러나 친구들은 한결같이 그들이 마셔온 체코 맥주만을 고집하고 이레나는 당혹감에 빠진다. 게다가 이레나는 갑자기 닥친 이상 고온 날씨로 인해 파리에서 입고 온 가을 옷을 모두 벗어야 했고,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이곳의 칙칙한 옷을 입고 있다. 친구들은 이레나가 파리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한 마디도 묻지 않고, 그들이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되풀이해서 말할 뿐이다. 애써 준비한 포도주를 거두고 이레나는 망칠 뻔한 친구들과의 만남을 가까스로 추스르고 프라하 산책을 나간다.
그녀가 애착을 느끼는 것은 시내 중심의 화려한 프라하가 아니라 바로 이 프라하이다. 지난 세기말경에 태어난 이 프라하, 체코의 소시민들의 프라하 … 황혼이 질 때면 근처의 숲들이 은밀하게 향기를 내뿜는 프라하. 몽상에 잠겨 그녀는 걷는다. 몇 초 동안 그녀는 파리를 언뜻 본다. 그곳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냉혹하게 느껴진다. … 그녀는 여기보다 파리에서 더 행복하다고 느꼈지만 …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이 도시를 사랑하며 여기를 떠난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를 갑자기 깨닫는다. - 위의 책 중에서
노작가의 고향, 모라비아
유럽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프라하의 블타바 강(몰다우 강) 옆에 여장을 풀자마자 이른 아침 프라하를 그대로 두고 내가 브루노로 향한 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쿤데라의 작가 이력 첫 번째 문장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는 문장 속의 국가는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쿤데라가 태어날 무렵부터 프랑스 파리로 망명을 떠날 때까지의 국가체제였고, 1993년 이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된 상태. 체코 국토의 대부분은 과거의 보헤미아 지방이며, 프라하가 그 중심 도시다. 브루노는 모라비아 지방의 중심 도시. 쿤데라는 체코슬로바키아 시절의 모라비아 지방 브루노에서 태어나 그곳 야나체크 음대에서 작곡을 공부한 뒤 보헤미아 수도 프라하에서 영화감독 수업을 받았다. 쿤데라가 망명 이후 ‘향수’에 이르기까지 줄곧 체코를 보헤미아라고 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쿤데라는 ‘프라하의 봄’으로 통칭되는 1968년 개혁의 물결 중심에 섰고,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암흑기에 공직에서 해직되고 작품이 몰수되는 지경에 처하자 공산 체제의 조국을 떠나 1975년 서방 세계의 중심지 파리로 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