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 무왕이 소년 시절에 지어 아이들에게 널리 부르게 했다는 ‘서동요’, 1894년 동학혁명 때 녹두장군 전봉준을 기리는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나라 뺏긴 민족의 설움을 달래준 ‘아리랑’까지, 노래는 힘이 세다. 대중의 애환, 저항적 이데올로기를 담은 노랫말은 때때로 지배세력에겐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저항의 노래는 일반적으로 특정 세력으로부터는 절대적인 사랑을 받지만 대중과는 거리감이 있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저항의 노래이면서도 운동권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엄청난 사랑을 받은 노래, 바로 ‘아침이슬’이다.
‘아침이슬’은 386에게는 하나의 상징 노래쯤 된다. 그 시절 강촌이나 대성리 등 단골 엠티 장소에서는 해가 중천에 있어도 ‘아침이슬’의 가락은 마르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당국의 금지조치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래는 1970~80년대 대학가에서 그렇게 불렸다. 송창식의 ‘고래사냥’도 있지만 아무래도 ‘아침이슬’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아침이슬’을 부르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때론 뭔가 불끈하는 것이 솟아오름을 느끼게 된다. 종국에는 목이 메는 특이한 노래다. 이른바 비장미의 극치다.
그러나 노래는 오랫동안 방송 금지곡으로 묶였다. 가사 중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부분이 염세적이란 이유였다. 일부에서는 붉은 태양이 북한 김일성을 연상케 한다는 식으로 의미를 확장하기도 했다.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라는 마지막 구절에 이르면 맘 여린 여학생들이 흐느끼곤 하던 그런 노래다.
지난 시절, 저항 노래의 상징처럼 돼버린 ‘아침이슬’은 치열한 운동성과 역사성에 비해 의외로 단순한 동기에서 만들어졌다. 지난 30여 년 동안 숱한 역사의 현장에서 때로는 행진가로, 때로는 진혼곡으로 불리며 이 땅의 고통 받는 많은 이를 위로했던 노래의 탄생은 지나치게 맨송맨송하다. 1970년 봄 경기고를 거쳐 당시 서울대 미대 회화과 1학년에 다니던 김민기는 이런저런 이유로 낙제를 당해 하릴없이 히피처럼 ‘시간만 축내고’ 있었다. 지금은 대학로로 불리는 동숭동 일대를 맨발로 배회하며 기행을 일삼던 그는 그 시절 풍미했던 실존철학에 빠져 들었다. 그런 그가 새 학기의 복학을 기다리다가 ‘그냥 그저 작곡’(그의 표현대로)한 것이 ‘아침이슬’이다.

해방구가 된 대학로의 주말 밤 풍경, 도로 전체가 인파로 넘쳐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