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한국 사회의 굴절과 왜곡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노래의 탄생치고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당시 갖가지 화제를 뿌렸던 김민기는 지금도 본격적인 작곡을 했다기보다는 그저 재미 삼아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굳이 덧붙인다면 자신이 전공하던 그림의 이미지를 노래로 바꿨을 정도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실제 이 말은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노래 ‘아침이슬’을 듣거나 함께 부르노라면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이 하나의 풍경화처럼 눈앞에 떠오른다. 그러나 노래는 작곡도 중요하지만 누가 불렀느냐도 중요하다. ‘아침이슬’은 김민기 자신이 녹음한 데 이어 그의 서울 재동국민학교 동창생인 양희은의 맑은 목소리로 녹음된다. 음울하고 저항적인 가사와는 대조적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부른 노래는 곧바로 1970년대 우울한 시대 정서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노래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 ‘아침이슬’은 기성세대에게 데모, 휴학, 대학문화, 동숭동, 학림다방 등을 떠올리게 한다. 검은색으로 물들인 구제품 군복을 입고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문제를 고민하며 부르던 그 시절의 대표 노래였다.
그러나 ‘아침이슬’은 얼마 뒤 10월 유신을 맞아 금지곡으로 묶여 제도권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다시 들리게 된 것은 1987년 이른바 ‘6·29 선언’ 이후다. ‘아침이슬’의 방송금지 사태는 참으로 희화적이다. 가사 맨 처음 등장하는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에서 “긴 밤”이 1970년대 당시의 유신정권을 의미한다는 게 나중에 밝혀진 금지 이유였다.

서울 재동초등학교. 김민기는 ‘아침이슬’을 작곡해 자신의 재동초등학교 동창인 양희은에게 부르게 했다.
그러나 ‘한국의 대중음악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곡’으로 찬사를 받던 그의 노래는 발표되는 족족 방송 금지되고 판금됐다. 이런 이유로 그가 만든 많은 노래는 일단 ‘김민기’라는 이름 때문에 오랫동안 발표될 수 없었다. 자연히 그는 자신의 곡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내보냈다. 김민기는 ‘아침이슬’ 발표 이래 1980년대 중반까지 17년 동안 노래 때문에 연행과 활동금지를 되풀이당해왔다. 그의 노래 뒤에는 늘 폭압적인 정권의 탄압과 그에 맞서는 민중의 사랑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농촌으로, 또 폐허가 된 탄광촌으로 자리를 옮기며 노래를 만들어왔다. 1972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 때 부른 ‘꽃피우는 아이’ ‘해방가’ ‘우리 승리하리라’ 때문에 이튿날 새벽 일찍 동대문경찰서로 잡혀가 고초를 겪었고, ‘늙은 군인의 노래’‘거치른 벌판의 푸르른 솔잎처럼’도 발표하자마자 곧바로 금지됐다.
특히 보병 제12사단에 소총수로 복무할 당시 정년 2개월을 남겨놓은 늙은 탄약 담당 선임하사의 시름을 노래로 옮긴 ‘늙은 군인의 노래’는 슬픈 노랫말과 비감 어린 곡조로 한 시대를 풍미하는 노래로 부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