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짐은 곧 국가”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루이 14세. 베르사유 궁전은 그가 50년간 국력을 온통 쏟아 부어 지어올린 역작이다. 섬세하고 우아하고 에로틱한 로코코풍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 하지만 베르사유의 화사한 얼굴 한켠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프랑스 절대왕정의 개화(開花)와 낙화를 함께 목도한 한 많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에.
루이 14세가 국력을 온통 쏟아 부으면서 지은 베르사유 궁전. 대단한 위용을 자랑한다.
베르사유 궁전은 “짐은 곧 국가다”라며 절대권력을 휘두른 루이 14세(재위 1643∼1715)가 50년 가까운 세월(1662∼1710) 동안 국력을 온통 쏟아부으며 파리 교외에 지은 궁전이다. 파리 시내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이 넘게 걸린다. 궁을 찾은 이들이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정문의 쇠창살은 루이 14세가 자신의 심벌로 삼은 아폴론으로 장식돼 있다. 아폴론은 고대 로마의 태양신이니 루이 14세는 스스로를 태양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실제로 그는 ‘눈에 보이는 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런 그가 궁전 앞 빅투아르 광장 한가운데서 말을 탄 자세로 방문자들을 맞이한다. 카메라 세례도 받는다.
빼어난 위용을 자랑하는 ‘ㄷ’자 형태의 이 거대한 3층 구조 건물복합체는 독일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궁정사회’란 저서에서 지적했듯이 왕의 집인 동시에 궁정사회 전체의 숙소이기도 했다. 일종의 하숙집이라고나 할까. 루이 14세는 신하들이 궁정에 머무는 것을 반겼고 베르사유에 숙박하고자 하면 흔쾌히 허락했다. 그래서 지체가 높은 귀족은 궁정에 체류하거나 시내의 ‘호텔(저택)’에서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왕에게 매일 아침 눈도장을 찍어야 신분의 안전을 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것은 지방에 정치적 경제적 근거를 둔 봉건귀족들의 진을 빼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왕의 전략이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에선 “귀족이 자기 고향에 살면 마음은 편하지만 먹고살 길이 없다. 반대로 궁정에 출입하면 먹고 살 걱정은 면하지만 노복(奴僕)으로 전락한다”는 말이 유행했다. 하지만 귀족의 힘을 빼앗은 결과 시민의 힘을 키워 프랑스혁명을 촉발, 왕가의 파멸을 가져왔으니 세상일이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다.
호사스런 권력자의 공간
왕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진 ‘왕의 아파트’는 궁전 중앙의 2, 3층에 집중돼 있다. 각 층에는 태양신 아폴론을 비롯해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비너스·다이애나·마르스·머큐리 등의 방과 전쟁의 방, 평화의 방, 귀족의 방, 예배당 등이 붙어 있는데, 하나같이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둥근 기둥과 장식이 촘촘히 박힌 샹들리에, 황금빛 커튼, 클래식풍의 천장화와 조각 등은 이곳이 권력자의 공간임을 분명히 말해준다.
왕의 아파트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침실과 거울의 방이다. 동쪽을 향해 두 팔을 벌린 듯한 건물의 3층 중앙에 자리잡은 왕의 침실은 아주 넓다. 하지만 침대는 한 개다.
동양의 왕이 침실을 따로 두지 않고 밤마다 마음에 드는 여인의 방으로 찾아가 잠을 잤던데 반해 서양의 왕은 이렇게 자기만의 방을 가졌다. 왕비 또한 별도의 침실을 가졌다.
왕의 침대는 서쪽 벽에 바싹 붙은 채 머리를 서쪽에 두게 돼 있다. 왕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제일 먼저 햇빛을 받도록 돼 있는 것이다. 그 앞으로는 금실로 짠 두 폭의 대형 커튼이 드리워져 있지만 낮 시간이라 앞부분을 걷어놓아 침대에 새겨진 아폴론 문장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누가 뭐래도 ‘태양왕(Sun King)’이었던 것이다.
왕은 보통 8시에 일어났다. 스스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침대 아래쪽에서 잠을 잔 제1 침실시종이 깨워야 일어났다. 침실 문은 시동이 열었다. 왕이 기침(起寢)하면 제2 시종은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제3 시종은 문안인사차 찾아온 내방객들을 맞았다. 문안인사는 앙트레(입장순위)에 따라 엄격하게 이뤄졌다. 루이 14세가 숨을 거둔 곳도 바로 이 침실이었다. 자비와 순결, 풍요 등 왕비의 덕목을 기리는 그림이 그려진 왕비의 침실은 루이 15세를 비롯해 19명의 왕자와 공주가 태어난 곳인데,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
외국 사신 접견, 대규모 파티, 그리고 크고 작은 무도회가 열리던 거울의 방은 말 그대로 거울과 유리, 크리스털 천지다. 곡면의 천장을 뒤덮은 그림, 길게 매달려 흔들거리는 샹들리에, 줄지어 선 둥근 기둥, 남쪽의 정원을 향해 난 17개의 대형 유리창이 어울려 호사스러움을 자아낸다. 권력의 속성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장중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루이 14세가 등극한 이래 경쾌하고 섬세하고 우아하고 에로틱한 로코코 양식이 내부 장식을 지배하면서 장중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로코코 양식은 여성 취향의 살롱문화와 어울려 당시의 유행을 선도했다.
베르사유 궁전 본관 3층 중앙에 위치한 왕의 침실. 침대에는 태양왕을 상징하는 아폴론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정원의 모든 것은 인공적이다. 왜 그들은 자연 그대로도 멋들어진 수목에까지 인공의 손질을 한 것일까. 권력이라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던 것은 아닐까.
정원 끝에는 센강(江)의 물을 이곳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만든 2.6km 길이의 대운하가 십자형으로 길게 뻗어 있다. 루이 14세는 귀족들과 함께 뱃놀이를 즐겼다는데, 지금도 수면 위로는 놀이용 보트와 원격 조종되는 모형 배가 빠른 속도로 달리며 파문을 일으킨다. 그 어디에도 정적인 구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라톤, 넵튠, 아폴론, 거울 등의 이름이 붙은 조각 분수들이 춤을 춘다. 여름철 주말에 한해 하루 세 차례 ‘분수와 음악 쇼’가 벌어지는 것. 그때에는 별도의 입장권(1만원 정도)을 사야 하지만, 1시간에서 1시간 반 동안 진행되는 공연을 관람하고 나면 절대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음악이 울려퍼지고 수많은 분수가 일제히 물을 하늘로 쏘아올린다. 장관이다. 물줄기의 방향과 각도가 서로 다르고 내는 소리도 각기 다르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그 모두를 하나로 묶어낸다. 사람들은 가만 있질 못한다. 그 광경을 좀더 가까이에서 지켜보려고, 아니면 카메라와 비디오에 담아두려고 자꾸만 분수 곁으로 다가간다. 그러다 더러 물벼락을 맞기도 한다. 교향곡이 한 가지 주제를 다양하게 변조하면서 색다른 느낌을 선사하듯이 이곳 분수 또한 수많은 변조를 일으킨다. 강·약·중강약을 연신 반복하면서.
정원이 시작되는 곳에 세워진 라톤(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낳았다고 하는 레토에 해당) 분수에는 두꺼비와 도마뱀 형상의 조각이 요란하다. 가장 남쪽 대운하 곁의 아폴론 분수에선 말을 타고 물에서 막 솟아오른 아폴론이 나팔수로 하여금 자신의 행차를 알리게 한다. 나팔수는 아폴론을 지켜주는 경호원 같다. 아폴론이 루이 14세를 상징한다면 그는 지금 그런 자세로 어디로 행차하려는 것일까.
마담 퐁파두르와 마리 앙투아네트
어느새 음악이 장중해졌다. 바흐의 ‘프랑스 협주곡 서곡 4번’이다. 바흐의 장중함은 물을 세차게 뿜어올리는 분수와 뜻밖에도 잘 어울린다. 현악의 선율이 분수와 이렇게 멋진 앙상블을 이루다니 놀랍다.
이제 아폴론 분수에 이별을 고하고 궁전 앞 라톤 분수로 돌아갈 시간이다. 피날레는 아무래도 거기서 맞는 게 좋을 듯해서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 숲속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대형 스피커 앞을 지나게 됐다. 그것은 전율이었다. 스피커의 막에서 울려내는 강한 진동이 그대로 가슴을 때렸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춤을 출 뻔했다. 하필이면 그때 빠르고 강한 선율이 흘러나와 사람을 놀라게 할 게 뭐란 말인가.
그 동안 구름에 가려 있던 하늘이 서서히 푸른빛을 띠어갔다. 떨어지는 물보라가 더없이 영롱하다. 못 속의 물고기들은 물을 토하고, 그것을 보고 있는 여인은 무슨 까닭에서인지 몸을 비비꼰다. 부러 애교를 부리는 것도 아닌 듯한데 볼수록 귀여운 자태다.
시각적인 분수에 청각적인 음악을 담아내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분수 쇼’의 마지막 곡은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 거기에는 합창이 들어 있다. 합창단은 입을 쫑긋하게 모아 노래를 부르는지 소리가 톡톡 튄다. 분수의 물줄기도 스타카토처럼 짧게 토막난다.
음악이 끝나자 분수도 춤을 멈췄다. 사위 또한 고요해졌다. 사람들도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궁전으로 향하고, 또 다른 이는 정원 숲속에 자리잡은 작은 카페로 달려간다. 어떤 이는 프랑스식 정원을 벗어나 자연의 풍경 그대로인 숲속으로 들어간다.
정원도 넓지만 숲은 그보다 훨씬 더 넓다. 평지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곳이라 그렇겠지만, 우리네 땅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만큼 숲은 광대무변하다. 그 속으로 난 길을 사람들은 마차나 자전거로 달리기도 하지만, 하이킹이 뭐 별거냐는 듯 걸어가는 이도 적지 않다.
그렇게 걷기를 20여분. 루이 14세가 권좌에서 물러난 뒤 왕비와 함께 조용히 지내기 위해 지었다는 그랑(大) 트리아농이 나타났다. 핑크빛 대리석이 돋보이는 그랑 트리아농의 내부 역시 화려했다. 이곳에도 거울의 방이 있지만 본궁의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지금은 프랑스를 방문하는 국빈을 위해 영빈관으로 쓰이고 있다 한다.
그랑 트리아농이 있다면 프티(小) 트리아농이 없지 않을 터. 발길을 옮기니 과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랑 트리아농을 쏙 빼닮은 프티 트리아농이 자리잡고 있었다. 누구도 못 말릴 바람기를 지닌 루이 15세가 오랫동안 애정행각을 벌인 풍만한 몸매의 소유자 마담 퐁파두르를 위해 지은 것인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이를 상속받은 루이 16세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1755∼93)에게 선사했다.
가축 사육장을 거느린 프티 트리아농의 부속 건물. 마리 앙투아네트는 평범한 시골집인 이곳 우사(牛舍)에서 손수 소젖을 짜기도 했다고 한다.
소젖 짜는 왕비
그런데 사람들의 발길이 모여드는 곳은 이토록 멋진 궁이 아니라 그것에 부속된 ‘퀸즈 코티지(Queen’s Cottage)’란 이름의 시골집이다. 그곳으로 이르는 길은 자연을 그대로 살린 영국식 정원으로 꾸며져 있는데, 그 안에는 산책하다가 사랑을 고백하기에 좋도록 지은 아담한 사랑의 전당이 서 있다. 12개의 코린트 기둥과 둥근 돔으로 마감한 심플한 외관이 눈길을 끈다.
시골집을 보고 나면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절대왕조가 건설한 화려한 궁전 안에 이런 곳이 있다니. 게다가 ‘적자부인’이란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왕비가 이곳에서 농부처럼 몸소 소젖도 짜며 보냈다고 하니 말이다.
농가는 2층 구조의 집과 소 우리, 닭장, 포도밭, 채소밭을 거느리고 있다. 물오리가 노니는 작은 못과 물레방아도 갖춘 것을 보면 그저 눈요기로 만든 시골집은 아닌 듯하다. 엄격한 궁정생활을 견디지 못한 왕비가 왕과 귀족들이 머무는 왕의 아파트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모든 격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농가의 생활을 즐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프티 트리아농에 사설극장을 꾸며 혼자 즐기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불러 시중에 떠도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청해 들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으리라. 그녀가 노름에 빠진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래서 큰 빚도 졌다. 파리의 내로라하는 부티크 주인이나 보석상, 장신구 상인들도 이곳을 들락거리며 그녀의 낭비벽에 기름을 부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본명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안나다. 1770년 5월, 열넷의 나이에 어머니의 강권에 따라 프랑스로 시집와서 세자빈이 됐고 이름도 프랑스식인 마리 앙투아네트로 바뀌었다. 남편은 후일 루이 16세란 이름으로 왕위에 오른 왕세자. 나이는 그녀보다 한 살 위였다.
당시 프랑스는 루이 14세의 치세를 거치면서 강국으로 성장했고 이웃 오스트리아로서는 자국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무엇보다 프랑스와의 관계를 돈독히 할 필요가 있었다. 어린 안토니아가 제물이 된 셈이다. 때문에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경써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딸이 제대로 처신해서 시댁 어른들의 눈 밖에 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고, 다음으로는 하루 빨리 아들을 낳아야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의 주위에 믿을 만한 심복을 심었고, 딸에게는 한 달에 한 번씩 읽어야 할 ‘규칙’을 손에 쥐어주어 스스로를 통제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가르쳤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자주 소식을 물었고, 필요하면 그때그때 처신해야 할 바를 간곡하게 적어 인편으로 보내주곤 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대공녀 마리 앙투아네트는 1774년 열여덟의 나이에 왕비가 됐다. 루이 15세가 천연두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면서 남편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절대왕정의 비참한 최후
마리 앙투아네트가 별장 겸 휴식처로 이용한 프티 트리아농.
“여러분은 짐이 내놓은 법령을 과연 국가의 이익을 위해 검토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무언가 오해하고 있다. 짐을 떠나서는 국가도 없다. 짐이 곧 국가인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나는 결심했다. 국왕이란 칭호만 갖고 일은 남에게 맡겨두는 게으른 국왕이 되지는 않겠다고.”
하지만 루이 16세는 그렇지 못했다. 무엇보다 국고가 바닥을 드러냈다. 호방한 루이 14세와 15세의 치세를 거치면서 왕이 신하들을 구슬릴 수 있는 자금이 고갈되고 만 것이다. 루이 16세는 통치에 대한 의욕도,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자기 몸을 관리하지 못해 뚱뚱했고 틈만 나면 사냥과 자물쇠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부부관계를 갖지 못할 만큼 건강에도 문제가 있었다. 한마디로 성적 무능력자였다. 한 나라의 왕이 되기에는 부적당한 인물이었다.
그랑 트리아농의 화려한 내부.
그런데 얼마 후 그녀에게 연인이 있다는 루머가 떠돌기 시작했다. 그 상대로는 시동생 아르투아 백작을 비롯해 수많은 귀족과 외교관들이 거론됐다. 물증이 발견되진 않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그녀의 우군은 어디에도 없었다. 모든 비난이 왕비인 그녀에게 집중됐기 때문이다.
그녀에 대한 평판이 처음부터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민중은 비엔나에서 온 세자빈에게 호의적이었다. 1773년 6월, 파리에 있는 튈르리 궁전의 발코니에 나란히 모습을 드러낸 왕세자 부부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가 20만을 넘었을 정도였고 그들 모두가 열렬히 환호했다. 열일곱 살의 앙투아네트는 하늘을 나는 듯 기뻐했다. 그런 그녀가 그로부터 꼭 20년 뒤 튈르리 궁전 옆 콩코르드 광장에서 기요틴(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것은 앙투아네트 개인의 불행이기도 했지만, 루이 14세가 불 지핀 프랑스 절대왕정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미 10개월 전에 루이 16세가 처형됐고 권력은 시민의 품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프랑스 절대왕정이 무너진 이유는 한둘이 아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초점을 맞춰봐도 그러하다. 그녀는 뜻하지 않게 프랑스 왕가로 시집와서 문화적 차이로 남모르는 고생을 했고,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방탕한 생활을 했을 수도 있다. 그녀로서는 제대로 한다고 했지만 프랑스인들은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희생양이었을 뿐이다. 끊임없던 염문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의 생명을 재촉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도 그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 후일 밝혀지지 않았던가. 그녀는 자신을 시기한 여성들에게 맥없이 이용당하고 말았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 비제 루브랑이 그린 것으로 베르사유 궁전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라 모트 백작부인은 왕비의 필적을 흉내내 160만리브르짜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손에 넣은 뒤 이를 해체해 파리와 런던의 시장에 내놓았다. 이 사건은 1783년 8월15일 로앙 추기경이 체포되면서 불거져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왕비는 이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나 로앙 추기경을 이용해 목걸이를 사고는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그녀의 목을 죄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트럼프 놀이를 즐기고 사치에 빠진 데 대해서는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국고가 바닥난 일까지 그녀의 잘못으로 몰아붙일 수는 없는 일이다. 바람을 피운 게 죄라면 시할아버지인 루이 15세가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고, 막대한 재정적자는 영국에 적대적이던 프랑스가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지원한 결과 빚어진 게 아니던가.
이유야 어떠했든 1789년 7월14일 파리에선 바스티유 감옥이 시민들에 의해 함락되는 일이 일어났다. 주동자 로베스피에르가 “대중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자유를 얻었다. 물론 몇 사람의 목은 떨어졌지만. 그러나 그것은 악인들의 목이다. 바스티유 점령으로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됐다”고 했듯 바스티유는 악의 근원처럼 여겨지던 곳이다.
문제는 빵에 있었다. 루이 14세 말년부터 기아 소동이 여러 차례 일어났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파리에선 민중이 빵가게를 습격, 먹을 것을 약탈하다 군대의 사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났다. 그 소식을 들은 왕비는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는가”라고 말해 민중의 타오르는 분노에 기름을 퍼부었으니 더 이상 어떻게 해볼 길이 없게 됐다. 궁정과 국민의 거리는 자꾸만 멀어져갔다. 그들 사이에 의사소통 창구가 사라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악화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도 왕은 태평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이 점령되던 날도 온종일 사냥을 즐겼고 그 바람에 세상 모르고 곤히 잠을 잤다. 그 정도로 여론에 둔감했고 정사에 어두웠다. 그는 다음날에야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때만 해도 그 사건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내다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석 달 뒤인 그해 10월, 왕실 가족은 베르사유로 쳐들어온 시민들에 의해 파리로 호송됐고 곧바로 탕플 교도소에 갇혔다.
1792년에는 그렇게 강건해 보이던 절대왕정도 완전히 무너졌다. 프랑스에 공화국이 들어선 것이다. 루이 16세는 387 대 334라는 재판소의 투표 결과에 따라 이듬해 1월21일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또한 10월에 같은 방법으로 처형됐다. 혁명재판소가 그녀에게 내린 죄목은 반역도 아니고 근친상간이었다. 그런 죄목으로 왕비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걸 보면 혁명군은 너무나 허술했다.
베르사유 궁전 안에 농가가 있다는 것을 신기해하는 한국 대학생 배낭족 두 명과 함께 시골집을 샅샅이 뒤졌으나 그 어디에도 그녀의 불행을 예고하는 물증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더할 나위 없이 평화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녀는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이국땅에서 처형돼야 했던 것일까.
누군가가 말했듯이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망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호사의 끝은 나락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자 했던 것일까. 시골집을 빠져나와 궁전 정문으로 이어지는 3km가 넘는 길을 걸으면서 그 까닭을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