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타이 쏘온’. 베를린올림픽 장내 아나운서가 손기정의 일본식 이름을 불렀다. 식민지 출신이 히틀러 앞에서 당당히 월계관을 써버린 1936년부터 남북한이 손을 맞잡고 입장하며 평화를 다짐하던 2000년 시드니올림픽까지, 20세기의 한국인들은 올림픽 때문에 참 많이도 울고 웃었다.
20세기 올림픽은 스포츠로 표현된 국가주의적 경쟁의 ‘종합선물세트’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독일 일본 그리고 중국. 20세기를 학살과 전쟁으로 얼룩지게 했던 호전적인 제국(帝國)들이 앞장서서 올림픽을 그렇게 만들어왔다.
그러자 한국 북한 루마니아 터키 등 힘은 별로 없고 대신 엽기적인 독재로 더 유명해진 나라들이 열심히 올림픽에 참여했다. 참가 목적은 딱 하나, 우등상을 받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참가에 의의가 있느니 어쩌니 하는 것은 실례다. 그들의 목적은 시상식장에 국기가 올라가고 국가가 연주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얼마 안 되는 국력을 쏟아붓고 온갖 비장한 수사를 동원해 중계방송을 해서 눈물 콧물을 짜낸다. 또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어린 선수들을 ‘선수촌’에 수용해 그리스식이 아니라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시킨다.
하긴 잔치라고 불러놓고는 힘센 국가들끼리 메달을 나누고 들러리나 서게 하니 힘없는 나라들 가슴에 응어리가 맺힐 수밖에. 그러면 올림픽 같은 거 관심 없다고 딱 외면하면 좋겠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올림픽도 잔치판임에 분명하고 또 그 속을 들여다보면 아기자기하면서도 스펙터클한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올림픽을 악용했다든가 올림픽이 국가주의에 오염됐다고 하는 말 자체에 어폐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올림픽체전의 방식이 애초 ‘악용’에 걸맞게 고안됐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평화보다 전쟁을 더 많이 닮았다. 룰을 지킨다고 하지만 처절하게 경쟁해서 예선탈락시키고 몇 팀 혹은 몇 명만 남겨 본선을 치른다. 종국에는 1, 2, 3등을 가려내면서 “자, 평화가 느껴지지 않니?”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진정 평화를 위한 제전이라면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 금·은·동을 없애고(4등은 뭐란 말이냐), 특히 1등에 대한 특별대우를 없애야 한다. 개막식에 국기를 앞세워 입장하는 일이나 경기장에서 국기를 들고 응원하는 것, 시상식장에 국기를 게양하고 국가를 연주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우승의 영광은 그저 참가한 선수들의 몫이어야 한다.
문헌을 보니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라는 쿠베르탱 남작이 애초에 이 대회를 만든 목적부터가 그다지 개운치 않다. 돈키호테 같은 이 인물은 올림픽을 구상할 때부터 보불전쟁에서 패한 프랑스 국민의 사기를 진작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올림픽이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이 유일무이한 국가주의적 국제행사였던 것은 아니었다. 1928년 올림픽에서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아프리카의 유색인종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 그것은 백인들의 잔치에 불과했다.
전쟁, 자본주의와 함께 성장한 올림픽
결정적으로 1936년 베를린대회가 미치광이 히틀러에 의해 나치독일과 아리안민족의 위대함을 과시하는 대회가 됨으로써 올림픽에서의 국가간 경쟁은 필연적이 됐다. 올림픽은 전쟁,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성장했다. 냉전시대에 미국·소련·동독이 올림픽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순위경쟁을 했는지, 어떤 나라들이 올림픽을 개최하고 싶어 안달했는지만 봐도 올림픽의 정체는 금방 드러난다.
‘기타이 쏘온’(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시상식장의 장내 아나운서가 손기정 선수의 일본식 이름을 이렇게 불렀다)이 히틀러 앞에서 당당히 월계관을 써버린 1936년 베를린올림픽부터 남북한 선수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평화를 다짐하며 입장했던 2000년 시드니올림픽까지, 20세기의 한국인들은 올림픽 때문에 참 많이도 울고 웃었다. 그러지 않아도 좋았으련만 한국인의 얄궂은 운명은 그렇게 되어 있었다.
세계 속의 당당한 일원이 되고 싶다, 또 되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당위와 강대국 틈바구니에 끼여 식민지와 골육상쟁의 처절한 경험까지 한 약소국이라는 현실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컸다. 그리고 스포츠는 그 거리를 메울 가장 좋은 매개로 인식됐다. 작고 가난한 조선인들은 스포츠를 통해서만 우리를 짓밟고 괴롭혀온 양키와 로스케(러시아), 되놈(중국)과 왜놈(일본)과 당당히 맞서고 이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있었던 고구려도 아예 없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뭘 가지고 저 덩치 큰 자들로 하여금 ‘공한(恐韓)’에 떨게 하겠는가? 오직 축구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스포츠에 대해 품는 비상한 집착은 이런 ‘가난한 민족주의’와 긴밀한 연관이 있고 그 집착은 식민지 시대에 형성되어 오늘날 후손들에게까지 고스란히 물려졌다. 다만 ‘월드컵 4강’이라는 엄청난 경험이 어떤 새로운 전기가 될는지는 좀더 두고 보아야 한다. 즉 월드컵 4강에도 진출해보았으니 이젠 좀 편하게 스포츠를 스포츠로 즐길 수 있는지, 또는 그 허위인 ‘세계 4강’을 지키고 싶어 더더욱 쌍심지를 돋우고 핏대를 세우며 ‘대한민국’을 외치게 될 것인지. 그런 점에서 한국인들의 스포츠민족주의는 이번 아테네올림픽에서 시험대에 오른다고 할 수도 있겠다.
식민지 시대 사람들에게 올림픽이 무엇이었던가는 다음과 같은 두 문장으로 잘 알 수 있다.
“진작부터 조선인들도 올림픽대회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간 대항전인 올림픽에 식민지인은 참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에서 발생하는 온갖 원망과 기쁨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무용정신이 부족한 민족
1896년에 시작된 올림픽이 현재와 같이 명실상부한 국제적 제전의 꼴을 갖춘 것은 1928년 암스테르담대회부터였다. 46개국이 참가한 이 대회에 이르러 처음 여자선수가 등장했고 아시아·아프리카 대륙 국가도 본격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했다. 올림픽에 대한 조선인의 관심도 이 대회를 전후로 크게 높아졌다.
그 전에는 ‘극동올림픽대회’가 조선인의 관심을 끌었다. 정식명칭이 극동선수권대회(極東選手權大會, The Far Eastern Championship Games)인 이 대회는 필리핀에서 먼저 발의하여 1913년부터 2년 주기로 필리핀, 일본, 중국이 번갈아 개최했다. 이 대회가 2차대전 종전 후 시작된 아시안게임의 전신이다.
특히 1921년 대회는 한국인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치러졌다. 일본은 대표선발을 위해 경성에서도 1차 예선전을 벌였는데 많은 조선인들이 육상부문에 참가했다. 10마일 경주 예선에서 인력거꾼 김학순이 1등을 차지했지만 정작 본선에는 참가하지 못한 듯하다. 대신 상해조선인체육협회 소속의 동포선수들이 극동올림픽 반마일 릴레이 등에 참가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1921년 5월30일자 1면에 장문의 사설을 써서 상해의 동포선수들을 격려했다. 시종 감격과 안타까운 심경의 쌍곡선을 보여주는 이 글은 당시 민족주의자가 가지고 있는 체육과 올림픽, 세계화에 대한 생각을 고루 잘 보여준다.
그러나 대회에 참가한 조선인들은 상해임시정부가 정식으로 파견한 선수였던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상해조선인체육협회 소속이라 했다. 이 대회가 ‘극동’을 표방했지만 상해에 거주하는 미국인이나 영국인 스포츠클럽의 참가를 허락했던 만큼 상해조선인체육협회도 참가가 가능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조선을 대표한다는 근거는 없지만 ‘동아일보’ 사설은 “조선인 선수가 국제적 경기대회에 참가한 것은 금차(今次) 상해의 예로써 효시”라 규정했다. 그리고는 이에 감격하여 “조선인 선수의 참가는 선수 개인과 조선 스포츠계의 영예”일 뿐 아니라 “조선인이 국제적 무대에 제(際)하여 열국인으로 더불어 기를 다투는 시작이라 할지니 실로 조선인 전체의 큰 기쁨이 되는 것”이라 흥분했다. 감격의 근거는 “쇄국주의하에 생활하여왔으며 문약주의의 누습이 뼈와 살(骨體)에 투철하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관점이 전혀 없고 무용의 정신이 부족”한 조선 민족의 과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왜 우리는 식민지가 되어야 했던가’에 대한 성찰이 조선인 자신에게로 향할 때, 우리가 지지리 못난 놈들이라 그렇다는 결론에 이르고 그 역사적 근거로 조선왕조의 문약과 쇄국주의를 드는 것이 당시로서는 아주 일반화된 ‘가학적 상식’이었음은 앞의 글에서도 살핀 바 있다.
그러면서 사설은 올림픽 정신을 거론하여 고대 그리스인들이 국가정책에 따라 올림픽 대회를 즐겼으며, 현대에 와서는 국가간 화합과 체육의 공동발달을 위해 이 대회가 환영받고 있다고 해석했다. 국가주의에 올림픽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국가주의는 세계 속에서의 나를 인식하여 세계주의를 달성하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과 표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만이 세계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오인은 차제에 조선운동가가 맹성(猛省)하며 조선 일반사회가 크게 각성하기를 바라노니 현금은 일 변두리(地局)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활약할 때”라는 것이다.
‘올림픽’ 큰 운동회의 대명사
조선에서 ‘올림픽’이라는 말은 이렇게 국가간 체육 경쟁의 대명사이자, 규모가 큰 운동회를 대유하는 용어로, 그리고 궁벽진 곳에서 조용히 살아온 조선인이 세계로 떨치고 나가야 할 무대의 대명사가 됐다.
1924년 6월3일자 ‘동아일보’는 조선체육회가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하는 전조선육상경기대회를 소개하면서 “세계적으로 웅비하려면 육상경기대회에 참가하라. 조선청년의 원기를 일으킬 장쾌한 이 운동회, 세계 ‘올림픽’에 참가할 선수는 다투어 오라”는 제목을 뽑았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의 순간. 그 감격과 흥분은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이어졌다.
1920년대 초에는 수없이 많은 ‘운동회’가 열렸다. 특히 1920년대 중반부터 올림픽은 4년마다 열리는 행사가 아니라 ‘큰 운동회’란 의미로 굳어졌다. 그해 6월말 조선신문사가 주최하는 ‘여자(女子) 올림픽’이 열렸다. 이 대회에는 소학교와 중등학교 여학생들이 주로 참여해 ‘오십미’ ‘팔백미돌 리레’(800미터 릴레이) 등의 트랙경기와 ‘고도(高跳)’ ‘광도(廣跳)’ 같은 필드부 경기, 농구 등의 종목이 열렸다.
그런데 이 큰 운동회는 여성에게만 관람이 허용되었다. 여성들만의 올림픽이었던 것. 이 대회는 국제적으로 여성의 올림픽 참가가 허용되기 전 여성들만의 대회가 열렸던 데서 착안했던 것 같다.
이밖에도 ‘올림픽’이라는 말의 쓰임새는 다양했다. 문학평론가 김기림은 1933년 조선의 일간지들이 각각 3∼4편씩의 소설을 연재하며 경쟁한 현상을 두고 ‘신문소설 올림픽 시대’(삼천리, 1933. 2)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1924년 6월에는 제1회 전조선육상경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를 통해 조선의 체육은 1920년대 초반 인력거꾼들이 우승을 차지하던 운동회 수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대회 종료일(1924.6.17) 동아일보는 경기결과를 화보와 함께 대서특필하는 한편, 필드와 트랙경기 각 종목 우승자의 기록을 세계기록·극동기록과 비교해 보여주었다.
1925년의 제2회 대회도 성황리에 개최됐는데 이 대회부터는 강령·대회규정·참가비·주의사항 등이 미리 공표됐고, 또한 각 경기의 룰과 경기장 규격 등도 ‘세계 표준’을 따랐다. 이 주의사항을 잠시 살펴보자.
-선수는 필히 상당한 운동복을 당용(當用)하고 본회(조선체육회)로부터 수취한 번호표를 흉부에 부착하되 명료히 표시하게 함을 요함.
-선수는 장내에 무단히 출입함을 불허함.
-선수는 지정한 장소에 집합하여 소집원의 점명(點名)에 의하여 출장하되 이차를 점명하야도 출장하지 아니할 시에는 기권으로 간주함.
선수들은 정해진 옷을 입어야 하고, 마음대로 운동장을 왔다갔다하면 안 된다는 것은 지금 보면 별것도 아닌, 너무나 당연한 규정이다. 따라서 그동안 동네 운동회 수준에 머물던 체육행사가 근대적 제도화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지역의 운동회들은 여전히 활기 있게 유지됐다.
특히 조선인들은 각종 트랙경기에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쏟았다. 1920년대 말은 우수한 장거리 선수들이 대거 등장한 시기였다. 전조선육상경기대회가 시작된 지 10년 만에 1936년 손기정과 남승룡이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했고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한국이 마라톤 강국이었던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었다.
참가 못하는 식민지인의 설움
1927년 8월29일자 ‘동아일보’는 서울 시내 4대 신문사, 즉 동아·조선·매일신보·중외일보의 ‘운동기자’들이 시내의 한 음식점에 모여 ‘운동기자단’을 결성하고 ‘기사의 정선(精選)과 사계의 통일’을 도모키로 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면서 기자단 결성의 취지를 “조선의 운동계가 바야흐로 융성하여 그칠 바를 모르는 상황에 부응하기 위함”이라 썼다.
이처럼 192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체육에 대한 조선인들의 관심이 점점 고조되고 각종 운동경기가 언론의 주요면을 장식하게 됐다. 그야말로 체육입국(體育立國)의 기치가 본격화됐다. 나라는 작아도 체육에는 강한 ‘매운 고추’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스포츠는 당시 민족개량주의, 또는 문화적 민족주의가 찾아낸 아주 적절한 소재였다.
1927년의 상해 극동올림픽대회, 1928년의 암스테르담 국제올림픽대회를 거치면서 이런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됐다. 일본 또한 이 시기에 스포츠와 국제대항전에 대한 관심과 열의를 높여나가고 있었다. 일본은 1927년 극동올림픽대회에서 주최국 중국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는데 불과 2년 전만 해도 구기종목 등에서 당시 아시아의 스포츠 강국이었던 필리핀에게 참패를 당했던 터였다. 그러나 일본은 달라지고 있었다. 당시 군사력과 경제력이 그러했듯 머지않아 미국, 독일과 자웅을 다투는 체육강국이 될 전망이었다. 일본이 암스테르담올림픽 선수단 참가예산을 8만원에서 12만원까지 올리자 독일신문은 ‘황화(黃禍)’가 닥칠 거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손기정 선수가 등장하기 전 조선육상계를 평정한 김은배 선수.
“조선은 아직 국제경기를 수입한 지 일천한 관계외 기타 모든 정치적 사회적 환경으로 인하여 세계적으로 진출을 꾀하기에 이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어느 민족 어느 때를 물론하고 다 그러하지마는 그중에 운동경기 같은 것은 더욱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없어가지고는 도저히 융성하기 어려운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우리 실력이 약하기도 하지만 환경이 허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안타까움은 서구의 식민지 국가들과 유색인종들이 암스테르담올림픽에서 선전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증폭되었을 것이다. 이 대회에서 인도가 하키에서 우승했고 이집트는 축구 4강에 올랐다. 필리핀과 일본도 선전했다.
사설은 “우리의 처지가 비록 어렵고 우리의 힘이 비록 미약해서…거국적으로 많은 선수를 올림픽에 진출시키지 못한다 해도 누르미같이 조선을 세계에 빛낼 자 있기를 절실히 바란다”고 맺었다. 누르미는 14차례나 세계기록을 수립하여 ‘달리는 인간기계’라는 별명이 붙은 핀란드의 육상선수이다. 핀란드는 강대국이 아니었지만 누르미 같은 걸출한 스포츠 영웅 때문에 올림픽에서의 위상이 달라졌다. 그러나 한국의 누르미는 준비되고 있었다.
앞서 말했던 대로 손기정·남승룡의 세계제패는 결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조선의 자랑’은 손기정 이전에도 있었다. 바로 마라톤 선수 김은배였다. 육상명문 양정고보 소속인 김은배는 1931년 10월18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제7회 조선신경대회(朝鮮神競大會)에서 당시 세계최고기록을 무려 5분이나 단축한 2시간26분12초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우승했다. 일본 최고기록보다 9분12초나 빠른 것이었다. 코스나 거리가 표준에 맞춰져 있지 않다가 마라톤 경기를 26과 4분의 1마일(즉 42.195km)의 정규코스 경기로 통일하고 난 5년 이래, 한국선수들은 일본인 선수를 물리치고 엄청난 속도로 기록을 갈아치웠다.
김은배의 기록경신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1931년 10월20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조선민족이 진취적이지 않고 고식(姑息)이 전인민의 사상처럼 되어 국제무대의 은자였으나 최근 점차 진취적 사상이 보급·실행되어 특히 운동경기에 있어서는 장족적 진보의 감이 있었다”고 배경설명을 한 뒤, 김은배의 이번 기록이 “조선인의 천품상 또는 기질상의 결함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말했다.
‘민족개조론’에서와 같이 스스로 내면화된 민족적 열등의식(이는 일종의 허위적인 이데올로기 아닌가? 남과 비교할 때만 생기는)을 고치는 데 마라톤은 중요한 치료제였다. 이후 김은배는 스타가 된다. 신문에 그의 회고록이 실리고 조선체육회·조선운동기자단·고려육상경기회 및 양정학교 동창회 등이 합동으로 김은배에게 상을 수여했다. 1931년 11월14일에 열린 이 식장에는 양정고보 교직원, 학생과 각계 유지들이 참석했는데, 윤치호·안재홍·송진우 같은 거물들이 축사를 했다.
그리고 김은배는 권태하와 함께 1932년 7월31일 오전 7시반(한국시간) 개막된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 일본 대표선수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조선 전지역에 큰 가뭄 피해가 일어났고 방학을 맞은 대학생들이 대규모 브나로드 운동을 위해 농촌으로 떠난 한여름이었다.
이때 동아일보는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전국을 횡단하는 마라톤 경기를 열었다. 이는 김은배·권태하의 마라톤 출전에 맞춘 기획행사였다. 두 선수가 LA에서 출전할 때 서정국과 황자룡이라는 두 선수가 부산에서 서울로 골인하게끔 예정돼 있었다.
8월6일자 ‘동아일보’는 “양군의 이번 장거로 말미암아 양 용사를 보낸 우리의 마라손열은 안과 바깥이 서로 응하여 일약 마라톤 왕국 건설에 더욱 큰 횃불을 들었다”고 썼다.
8월8일 오후 뿌려진 호외는 김은배의 마라톤 6위 입상을 알렸다. 같이 출전한 권태하가 9위, 일본인 쓰다(津田)는 5위를 차지했는데, 이 세 사람이 팀을 이뤄 펼친 작전이 두고두고 문제가 됐다. 당시 8월10일자 ‘동아일보’는 세 선수가 페이스를 맞춘 것이 오히려 김은배가 더 좋은 기록을 내는 데 방해가 됐다는 게 세간의 평이라고 소개했다. 또 권태하가 경기중에 일본인 코치의 지시를 어기고 팀 작전대로 하지 않아 일본은 1936년 베를린마라톤에 조선인 선수 2명이 출전하는 것을 꺼려한다는 설도 나왔다.
아, 1936년 베를린
이런 일련의 일들을 통해 1936년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제패가 조선사회에 얼마나 큰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신드롬과 흥분이 문제의 ‘일장기 말소사건’도 만들어냈다. 일반 민중에서부터 식민지 부르주아와 언론계 및 문화계, 즉 조선 전체가 엄청난 일을 벌일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었던 것이다.
1936년 8월25일자 동아일보. 일장기가 지워진 이 사진 때문에 동아일보는 정간조치를 당했다.
8월1일 ‘동아일보’는 ‘올림픽대회’라는 제하의 사설을 써서 ‘나가서 싸워서 이기고 돌아오라’고 격려했고, 같은 날 조선중앙일보도 ‘최후의 영광을 목표로 백련강(百鍊鋼)의 칠(七)선수 진두(陳頭)에 용약(勇躍)’이라는 큼직한 기사를 내보냈다.
그뿐만 아니라 나중에 ‘일장기 말소 사건’의 두 주역이 된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속보경쟁 체제를 갖추고 전례 없이 많은 비용과 인력을 들였다. 특히 동아일보는 독일로 경기를 보러 간 전 마라톤 선수 권태하와 육상경기협회 명예비서 정상희, 그리고 독일 유학생인 유재창 등을 임시 통신원으로 임명하고 베를린에 있는 배운성이라는 화가에게 화보를 촉탁했으며 직접 손기정, 남승룡 두 선수에게 격려 전보도 쳤다.
동아일보의 경쟁자는 조선 신문사들만이 아니었다. 한국 민간신문과 달리 일본 신문들은 대규모 취재단을 파견할 수 있었고 더 발전된 속보체제를 갖고 있었다. 특히 ‘오사카마이니치(大阪每日)’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신문’은 국내에도 독자가 많았는데, 이 신문들도 연일 호외를 발행하며 올림픽 소식을 전했다. 8월2일에는 개막했다고, 8월3일에는 육상의 무라샤(村社)가 4위에 입상했다고, 8월 5일에는 다시마(田島)가 동메달을 땄다고 호외를 찍었다. 일장기 말소사건은 이러한 언론사들의 경쟁과도 무관하지 않다.
우승 후 전화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손기정 선수. 그 옆이 3위로 들어온 남승룡 선수다(위).<br>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권투의 한수인 선수(오른쪽). 가슴에 선명한 태극기가 보인다(아래).
두상에 광명찬연한 월계관
8월10일 우승 소식이 알려지고 난 뒤에 일어난 사건들은 다 말하기 어렵다. 잡지 ‘삼천리’ 1936년 11월호에 실린 ‘삼천리 특별시보, 동아일보는 언제 해금되나’를 따라가 보자.
손기정 우승, 뉴스가 전해지자마자 당일 심야까지 전화통을 붙잡고 앉았던 각 신문사 편집국원들은 만세를 불렀고 신문사들은 곧 호외를 연발했다. 그리고 8월11일부터 신문들은 그야말로 화려하고도 장엄한 지면을 만들어 수십만 독자의 열광하는 가슴에 기름을 부었다.
손기정이 나온 신의주 제일보통학교에서는 8월11일에 깃발 행진을 했고 손기정이 다니던 모교 양정고보에서는 전교생들이 모여 ‘손군 만세’를 불렀다. 평안북도 도지사가 손기정의 친가에 청주 한 통을 축하로 보냈으며, 각지 유력인사와 단체들도 축하전문을 베를린이나 신문사에 보내기 시작했다.
8월11일 ‘동아일보’만 하더라도 전 지면의 반 이상을 써서 ‘세계 정패(征覇)의 개가’ ‘영성(永聖) 불멸의 성화’ ‘근역(槿域)에 이식되는 감람수(올리브나무)’ ‘인류 최고의 승리’ ‘힛트라 총통과 악수, 최고대에 손군 등석’ ‘그 두상에는 광망찬연한 월계관’ ‘승보는 전파를 타고 전세계에’ 등의 기사를 화보와 함께 내보냈다. 그날 ‘동아일보’ 사설은 다음과 같은 감격에 겨운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양군의 우승은 즉 조선의 우승이요 양군의 제패는 즉 조선의 제패이다. 조선은 양군에 불행을 여(與)하였으나 양군은 조선에 갚는 바가 있었다. 조선의 인민은 이 뜻을 알고 배우고 또 모두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지금 손·남 양군 용사의 세계적 우승은 조선의 피를 끓게 하고 조선의 맥박을 뛰게 하였다. 그리고 한번 기하면 세계라도 장중(掌中)에 있다는 신념과 기개를 가지게 하였다.”
손기정의 우승으로 1920년대 이래 동아일보를 비롯한 문화민족주의자들이 앞장서서 가꾸어온 스포츠 민족주의는 드디어 완성을 보는 듯했다. 흥분한 동아일보는 8월13일 상당히 선동적인 제목의 사설 ‘청년이여 일어나라, 세계적 조선에의 기원’을 실었고, 이어 14일 ‘손남 양군의 학자 보장, 의의 깊은 호거(好擧)’, 15일 ‘체육관을 건설하라 세계 제패의 차 기회에’ 등을 연이어 내보냈다.
대중의 열기도 식을 줄 몰랐다. 전국 각지에선 우승 축하회와 깃발 행렬, 연설회가 열렸으며 최남주, 현준호 같은 기업가는 거액의 장학금을 내놓았다. 양정고보 동창회에서는 세계정패기념탑 건설 계획을 세웠고 다른 지역에서도 우승 기념 체육관과 동상을 세우기로 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손기정을 입에 달고 다니자, 콜럼비아 레코드사는 손군 세계제패기념 노래를 취입했고, 동양극장의 ‘마라손 왕 손기정군 만세’라는 연극도 흥행에 성공했다.
일장기 말소사건 그후
민족주의와 상업주의가 버무려진 채 서로 상승작용을 하던 8월의 신드롬은 걷잡을 수 없이 뜨겁게 확산됐다. 그 와중에 터져나온 것이 바로 일장기 말소 사건이다.
일장기 말소사건은 조선의 문화민족주의가 최후로 일제와 충돌한 사건, 또 식민지 부르주아가 최후로 일본에게 반항한 사건이라 할 만하다. 이후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제반 정책에 순응하게 된다. 그 여름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전 민중이 손기정 열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장기 말소사건의 후과는 너무 컸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뿐 아니라 조선일보사를 제외한 거의 전 언론계가 타격을 입었다. ‘신동아’도 9월호부터 발매정지 됐으며 주간은 구인을 당했다. ‘신가정’은 삭제처분을 당하고 ‘아 생활’이나 ‘기독신보’도 압수조치를 받았다. 당시 한국에 막 부임한 상태였던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민중을 확실히 길들이기 위해서라도 강경대응이 필요했던 듯하다.
지금까지도 일장기 말소사건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이 사건은 분명히 민족주의적 동기에서 시작됐다. 동아일보가 스스로 ‘민족지’라 자랑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해도 일장기 말소사건에서만큼은 동아일보가 중심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여러 언론 가운데 동아일보가 가장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거기에 조선 언론사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과 일본 신문의 신속성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다. 물론 일장기 말소를 주동한 이길용이라는 탁월한 스포츠 기자가 가진 사상이나 성향 또한 빼놓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동아일보 사주측은 사건을 수습하고 ‘반성의 자세를 보여’ 복간하기 위해 자진해서 이 기자를 해고했다. 또한 동아일보가 정간조치를 당할 때 조선중앙일보가 ‘자진해서’ 휴간을 결정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와 중앙일보가 장기간 발행되지 못한 탓에 조선일보가 챙긴 반사 이익은 대단했다. 두 달 사이 두 신문의 독자 중 상당수가 조선일보로 흡수됐고 광고수입도 크게 늘어서 1936년 가을 조선일보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반면 조선중앙일보는 기업 자체가 흔들릴 정도로 타격을 입었고, 동아일보 또한 거액의 손해를 보았다.
일본도 예상치 못한 열광
그런데 일본은 손기정, 남승룡 선수가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을 때 발생할 조선 민족주의의 후폭풍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이에 대해 이런 대답이 가능하다. 군국주의로 치달으며 추축국의 일원으로 성장하고 있던 일본은 1940년 동경올림픽을 유치한 상태였다. ‘다음 개최국’ 일본은 베를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용의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손기정과 남승룡의 기록이 일본인보다 훨씬 좋았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일본은 국가별로 3명만 출전할 수 있는 베를린대회에 2명의 조선출신 선수와 2명의 일본인 선수를 데려갔다. 현지에서 단축마라톤을 해서 한 선수를 제외시키겠다는 속셈이었다. 결국 성적에 따라 일본인 선수가 제외됐지만 두 조선 선수가 나란히 출전하는 것을 마지막까지 꺼렸 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초기에는 일본인들도 손기정의 우승을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했던 것 같다. 미나미 총독이나 우가키 전총독이 축하연에서 축배를 드는 광경이 ‘오사카마이니치신문’ 등에 실렸고 일본 각의에서도 내각각료 전체가 손기정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조선의 특수성이 승리의 축배를 민중적으로 들기를 꺼리게 하였으니 손기정 우승에 대한 감정이 민족적 감정으로 전화하기 쉬운 것을 간취한 경무당국”에서 계획된 모든 축하연과 기념체육관 설립운동, 축하연설회를 금지시켰던 것이다.
손기정은 올림픽 열기가 거의 가라앉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두 달 뒤에나 양정고보 교복을 입고 귀국했다. 물론 일본이 그의 귀국을 막은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낸 선수들에게 세계여행을 시켜주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유럽을 구경하고 수에즈운하를 건너 인도와 홍콩 마카오를 거쳐 요코하마를 통해서 일본에 도착하고 10월8일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손기정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일경의 손에 이끌려 남산에 있던 신사에 참배부터 해야 했다. 그의 귀국이 다시 민족주의 열기를 고취시킬 것을 염려해 사전예방차원에서 한 일이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을 지켜보며 과연 올림픽이 세계인의 상호이해와 우호를 증진시키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은 세계 10강 재진입을 목표로 내걸었다. 그러나 순위보다는 시드니에서처럼 남북한 선수와 응원단이 하나가 되는 광경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이 글과 사진에서 손기정 관련 부분은 최근 세종문화회관에서 손기정기념전시회를 연 강형구 화백의 조언과 그의 책 ‘손기정이 달려온 길’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