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주의에 갇힌 근대’ 문승숙 지음 / 이현정 옮김 / 또하나의문화 / 1만5000원
필자도 그랬다. 1980년대에 학생운동을 하면서 수많은 세미나를 통해 한국사회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분석하고 비판했지만 한 번도 군대라는 기관과 징병제라는 제도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군사주의(militarism) 또는 군사화(militarization)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 우리 사회와 연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의 삶을 군사화라는 틀에서 생각해보면 소재가 무궁무진했다.
군사주의와 함께한 성장기
속초에서 반공 깃발을 들고 흔들던 어린 시절, 군사도시 원주에서 군대기지 몇 개를 지나며 등하교하던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때 교련교육, 군대식 조직관이 힘을 발휘하던 학생운동 시절, 그리고 무엇보다 지식인임을 자처하면서도 군대와 징병제에 대해 망각하는 이유, 그것과 군사주의나 군사화는 깊게 연결되어 있었다.
한국 군사화의 실체는 북한과 대립하는 군사적 긴장과 위기의식, 그에 따른 군비 경쟁이나 높은 국방비 지출에서 끝나지 않는다. 2005년 윤종빈 감독은 ‘용서받지 못한 자’라는 영화를 출품하면서 아무도 군대가 어떤 곳인지 말해주지 않아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변(辨)을 내놓았다. 술자리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개그 소재로까지 반복적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소위 진보적 남성 지식인 중 군대를 진지하게 분석하는 글을 쓴 사람은 전혀 없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며 영화나 소설에서도 잘 다뤄지지 않았다. 1997년 이회창씨 아들 병역 면제를 두고 논란이 있기 전까진 징병제에 대한 공개적인 논쟁도 별로 없었던 게 사실이다. 이는 군사화 한 삶에 익숙한 나머지 문제의식의 싹이 제대로 키워지지 않았다는 분석을 낳는다.
군사화를 통해 한국현대사의 근대성을 분석한 문승숙의 ‘군사주의에 갇힌 근대’는 이런 점에서 무척 적절하고 필요한 책이다. 차분하게 여러 역사적 사실을 군사화된 근대성이라는 틀에 맞추어 젠더적, 계급적, 포스트 모던적 관점에서 분석한 내용을 실은 연구서다. 문승숙은 현대사를 1기 ‘군사화된 근대성과 성별적 대중동원, 1963~1987’과 2기 ‘군사화된 근대성의 쇠퇴와 성별화된 시민성의 대두, 1988~2002’로 나눠 분석한다.
1기에서는 군사정권하에서, 특히 박정희 시대에 부국강병을 모토로 징병제와 경제개발을 통해 근대성을 실현하려 하면서 남녀의 역할이 어떻게 다르게 규정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른 동원방식으로 남녀의 정체성을 규정해 나갔는지를 설명한다. 남성은 사병과 노동자, 그리고 생계부양자인 가장으로 만들어지고, 여성은 새마을운동이나 가족계획운동의 담당자 역할을 하면서 주부로서 재조직되는 한편 노동에서는 그 역할 비중과 상관없이 주변화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2기에서는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을 통해 시민성을 획득해 나가는 흐름을 남과 여로 구분해 분석했다.
대체복무제와 여성노동자 주변화
문승숙의 연구에서 그만의 새로운 내용으로 눈길을 끄는 것은 1973년 병역특례법 시행에 따라 대체복무제가 한국산업의 남성화를 어떻게 만들어갔는지를 분석한 대목이다. 우리나라 중화학공업의 근간이었고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하는 명분이었던 방위산업의 활성화와 이들 방위산업체에 대규모로 고용됐던 대체복무 남성의 취업과정에 관한 의미 고찰은 그동안 징병제 연구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부분이다. 병역특례를 위해 남성노동자들은 직업훈련 프로그램, 기술자 자격증, 직업훈련을 받았고 중화학산업에 대거 진출하면서 이후 이 분야의 숙련노동자로 변신했다. 문승숙은 이 점에 대해 “여성노동자는 성별 노동 분리시장에서 취업과 직업훈련의 첫 단계부터 주변화되었다”(91쪽)고 주장한다.
문승숙은 1988년 이후 군사화된 근대에 대한 도전이 불균등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노동운동을 통한 사회경제 민주화에 대한 요구, 그리고 시민사회의 성장은 진정한 의미의 시민성 성장이며 군사화된 근대의 틀을 허물어 나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만하다고 평가한다.
군사화된 근대라는 새로운 개념 제공, 징병제와 남성 중심적 산업화의 연결고리를 파헤친 업적을 인정하면서 굳이 몇 가지 아쉬운 점을 꼽는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승숙은 첫 시기를 1963~ 1987년으로 정해놓았지만 군사화된 근대를 설명하면서 1980~ 1987년 기간을 거의 포함시키지 않았다. 내용적으로 중요한 격변기인 이 시기가 빠진 것은 결국 군사화된 근대성의 중요한 요소인 군사 집권에 대한 극복의 의미를 분석하지 않은 것이어서 아쉬움으로 남는다.
둘째, 나눠진 두 시기가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1기를 국가 전체적으로 부국강병과 반공주의를 중심으로 국민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성별체계가 성립되는 것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고 있다면 2기는 계급을 중요한 구성요소로 삼아 노동운동과 중산층운동을 분리해 시민성을 분석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분석대상(1기는 국민 전체, 2기는 노동운동가나 시민운동가)의 차이가 커서 변화를 종합적으로 조망하기 어렵다. 또한 시민운동의 가부장성이나 운동문화에 대한 고찰이 미흡해 시민운동 내에서 성별 차이가 가지는 의식이나 의미를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고 있다.
커밍아웃보다 어려운 병역거부
셋째, 문승숙은 군사화된 근대의 대립개념으로 시민성을 설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시민성이 군사화 된 근대에 대해 얼마만큼 비판적 의식을 내면화하고 군사화된 근대를 해체해 나가는 대안의식을 형성했는지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사실 한국의 격렬한 민주화운동이나 시민운동은 군사화된 근대의 핵심인 부국강병의 이념적 실체에 거의 도전하지 못했다. 강한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 대한 점검이 미흡함은 우리 지식인 지형의 중요한 특징이라 할 만하고, 이에 대한 도전은 1990년대 말 이후에 조금씩 싹트고 있다.
넷째, 2기에서 군사화된 근대의 도전이나 해체를 논할 때 1기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징병제를 좀더 충실하게 분석했어야 했다. 문승숙은 2기에서 징병제 문제를 혼돈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남성이 정치적 주체성을 형성하는 데 국민의 의무인 병역에 대한 갈등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고, 군가산점제를 중산층 여성의 시민성 획득 운동의 관점에서 보면서 군가산점제, 병역비리 등을 둘러싸고 본격화한 국민 성원(成員) 자격 논쟁과 그에 대한 시민사회의 무대책이 지닌 의미는 분석하지 않았다. 1997년 이후 본격화한 군대 관련 논의의 진행 방향과 모든 정치인의 자격요건에서 당사자와 그 아들의 정상 징집여부가 중요한 기준이 된 것이라든지 군가산점제 논쟁이 성별 논쟁으로 번지면서 현재까지 힘을 발휘하는 사실 등은 군사화된 근대에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점이다. 무엇보다도 양심적 병역거부라든지 시민적 저항이 동성애보다도 늦게 출현한 의미 등은 우리 사회의 군사화된 근대성에 대해서 해체를 논하기 힘들게 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몇 가지 미흡한 점이 있지만 책을 읽으면서 반가웠던 것은 이 연구를 토대로 군사주의와 여성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더 활발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좋은 예감 때문이다. 문승숙도 지적했지만 군사주의가 우리 사회의 모든 면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여러 분명치 않은 지점을 명확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분명하다. 군사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나 여성 관련 현안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는 점은 문승숙의 연구를 더욱 빛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