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사스러운 미식 여행기 ‘사색기행’과 최고의 음식을 만들어내는 요리사의 성공기 ‘앗 뜨거워 Heat’
이런 식으로 3주 동안 시음한 와인이 300병이 넘었다! 화이트와인으로 유명한 마크 브레디 와이너리에서 1975년산 와인의 숙성된 맛에 감탄할 사이도 없이 지배인이 1947년산의 마개를 여는 순간, 모두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음미하고 내뱉는다’는 시음 원칙은 사라지고 모두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셨다.
가르강튀아적 폭음, 폭식
와인 컬렉터인 마르셀 지로의 카브에서 열린 와인 파티는 미식가의 호사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암반 속에 마련된 카브에서 50여 명이 풀코스 요리를 즐기며 라벨을 떼어낸 와인 8종의 맛을 보고 이름과 연대를 알아맞히는 게임을 했다. 아페리티프로 나온 부브레 1955년산, 전채요리인 돼지고기 요리와 함께 나온 부브레 1978년산, 이어 돼지 내장과 채소를 파이로 감은 요리와 함께 나온 보르도의 샤토 블랑 몬타이 1979년산….
대연회는 저녁 7시에 시작돼 심야까지 계속됐다. 넘칠 듯 풍족한 와인과 산더미 같은 요리, 어지러울 정도로 열기 띤 논쟁…. 다치바나는 망연한 얼굴로 ‘이거야말로 가르강튀아(16세기 라블레가 쓴 소설의 주인공으로 술고래이자 대식가)적’이라고 감탄한다. 다치바나는 독자를 한껏 약 올리며 여행기를 마친다.
“그날부터 위와 같은 가르강튀아적인 나날이 3주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 여행을 자세하게 전하려면 가르강튀아적인 스케일의 지면이 필요하므로 유감스럽게도 이야기를 여기서 그만 접어야겠다.”
하지만 다치바나의 혀는 지나치게 관념적이다. 부르고뉴와 보르도 와인의 차이를 설명하고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의 치즈 제조 역사와 치즈산업에 대해 일장 연설할 수 있는 지적이고 노련한 혀를 가졌지만 정작 그의 글에서는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손맛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리 화려한 미식 기행을 해도 그는 요리사가 아니라 글쟁이일 뿐인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을 때의 만족감은 굉장히 다채로운데, 그걸 직접 먹는 건 만족감의 일부일 뿐이고 중요도에서도 많이 밀린다. 사랑으로 만드는 요리 외에 음식을 만드는 행복이라는 말도 후렴구처럼 반복된다. 이때는 준비나 조리가 아니라 만든다는 게 중요하다.”(‘앗 뜨거워 Heat’ 빌 버포드 지음, 해냄)
펜 놓고 ‘주방 노예’ 자처
‘뉴요커’의 베테랑 문학담당 기자인 빌 버포드는 23년의 기자 생활을 마감하고 마리오가 운영하는 맨해튼의 유명 레스토랑 ‘밥보’의 주방으로 들어갔다.
빌이 매료된 마리오 바탈리란 남자를 보자. 마흔한 살에 이미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가 됐으며 자신의 이름을 딴 TV 요리 프로그램 ‘몰토 마리오’의 진행자이며, 떡 벌어진 체격에 꽁지머리를 하고 뉴욕의 어떤 주방장보다 많이 먹고, 많이 마시고, 많이 활동한다. 그래서 뉴요커들은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허기를 느낀다! ‘앗 뜨거워 Heat’는 펜 대신 칼을 쥔 빌의 주방 체험기이자 스타 요리사 바탈리의 성공기다. 빌은 금요일 오전 7시에 출근해 재료준비팀에서 오리뼈를 바르는 일로 주방의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
마리오는 레스토랑의 본질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재료를 사서, 음식을 만들고, 그걸 팔아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선 ‘일관성’이 기본이다. “언제나 한 번 본 맛을 못 잊어 다시 찾아온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건 천하에 쓸모없는 머저리야.”
이어 미국 최고의 이탈리아 레스토랑 밥보의 성공 비결도 나온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 주방 안에서 할머니가 요리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해야 해.” 덧붙여 ‘주방의 인식’을 강조한다. “오감을 다 사용하고, 시각정보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할 거예요. 뭔가가 다 익었을 때 나는 소리, 요리가 다 됐을 때의 냄새를 알게 되죠.”
빌은 2002년 1월부터 2003년 3월까지 14개월 동안 밥보의 주방에서 일하며 이 말을 이론이 아닌 몸으로 배운다. 예를 들어 ‘주방의 인식’이란 추상적인 말 뜻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미끈거리는 양의 혀를 150개쯤 다듬고 껍질을 벗기고 썰어봐야 하고, 반죽 문지르는 기술을 익혀 작은 귀처럼 생긴 오레키에테 파스타를 2000개쯤 만든 다음, 단테가 머릿속에 그렸던 지옥처럼 열기가 온몸을 감싸는 그릴 앞에서 누군가 주문을 ‘쏘면’ 재빨리 고기를 구워야 한다. 브란지노 25인분, 오리 23인분…250여 명의 손님을 받는 동안 그릴에 그을린 팔뚝 털은 거의 사라진다. 대신 ‘불꽃’이 다 됐다고 말해줄 때까지 스테이크 익히는 법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물론 요리책으로는 이런 걸 배울 수 없다. 이런 느낌, 냄새가 기억에 저장될 때까지 반복해서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도 요리할 수 있어야 비로소 요리사가 되는 것이다.
단순함 터득하는 데 한평생
이제 ‘주방 안에서 할머니가 요리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배울 차례다. 어디서? 뉴욕의 유명 주방장들은 모두 성지순례를 하듯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로 떠난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포시즌즈 호텔의 수석 주방장이 된 마리오조차 ‘할머니의 요리를 흉내내기 위해’ 사표를 내고 조상의 고향 이탈리아, 볼로냐와 피렌체 사이의 온천마을 포레타 테르메에 3년간 머무른 적이 있다.
빌은 마리오가 밟은 길을 따라 먼저 런던으로 갔다. 런던에는 마리오의 콤플렉스 대상이자 초기 스승인 천재 주방장 마르코 피에르 화이트가 있다. 화이트는 새 요리를 앞에 놓고 말한다.
“좋은 냄새, 좋은 맛. 더하고 뺄 것 없이 너무나 영국적이죠. 불필요한 장식은 들어가지 않아요. 문제는 단순한 것을 제대로 해내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거예요. 나는 과도하고 강렬한 맛의 간섭 없이 엽조(獵鳥)의 순수한 맛을 즐기고 싶어요.”
빌은 ‘단순하다’는 말이 주방장에게는 “터득하는 데 한평생이 걸린다”는 뜻임을 깨닫는다. 단순한 것은 바로 시골의 해묵은 레시피가 아닌가. 기계로 뽑은 국수가 아니라 나무 도마 위에서 나무 밀대로 밀어 ‘고양이 혓바닥 같은 질감’이 나는 파스타를 만들기 위해 그는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탈리아 산골 마을 출신인 베타로부터, 베타가 이미 저세상으로 떠난 숙모들에게서 배웠던 전통적인 파스타 만드는 법을 전수받으며 빌은 단순함의 실체를 알게 된다. 이탈리아 요리의 공통점은 단순함이며 그 단순함도 배워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파스타만으로는 부족했다. 이탈리아 고기 조리법을 배우려면 600년 전통의 푸주한(?廚漢) 다리오 체키니만한 스승이 없다. 그곳에서 그는 칼을 들고 고기 부위를 만지며 투스카니 음식을 배웠고, 상실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한 예술가를 만났다.
이탈리아에서 한 경험은 빌에게 ‘손맛’을 일깨워주었다. 손으로 반죽을 미는 법, 칼로 허벅지 살을 도려내는 법, 소시지와 라르도와 폴페토네 만드는 법을 배웠다. 요리사는 사람들이 손으로 먹을 음식을 손으로 만드는 사람이고, 손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손맛도 좁은 우리에 가둬 화학적 처리로 키운 돼지의 햄과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 슈퍼마켓에서 파는 음식들에 밀려 덧없이 사라지고 있다.
진정한 요리사가 되고자 하는 한 문학 전문 기자의 음식 탐구 여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카테리나 데 메디치가 프랑스의 왕비가 되면서 이탈리아의 요리비법이 모두 프랑스로 넘어가 이탈리아 요리의 르네상스가 막을 내렸다는 전설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한다. 그는 다시 프랑스로 가기로 마음먹는다.
이 책을 덮으면서 충고 하나. 행여 지금 하는 일을 때려치우고 주방으로 갈 생각은 하지 마시라. 요리사란 직업은 ‘남이 놀 때 일하고, 남이 더 놀 수 있도록, 그 일을 해서 번 돈으로는 사 먹지도 못할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