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FOTA) 합의에 따라, 경기 북부에 주둔한 2사단 등 미군기지 대부분이 한강 이남으로 재배치된다. 평택기지 조성작업이 본격화함에 따라 파주·의정부·동두천의 미군기지 반환도 가시화했다. 상당수 주민이 생계를 의지하던 미군기지가 빠져나감에 따라 지역경제 침체와 공동화(空洞化) 현상에 대한 우려도 서서히 증폭되고 있다. 이와 관련, 1992년 미군이 철수한 필리핀의 경우는 의미심장한 선례를 보여준다. 중앙정부의 개발계획과 마스터플랜에도 불구하고 피폐해진 지역주민들의 삶은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대책의 한계를 드러낸다. 의정부와 동두천이 클라크와 수비크만의 전철을 피해갈 방법은 없을까.
필리핀의 주요 미군기지였던 수비크만의 항구. 지금도 미·필리핀 합동기동훈련 기간에는 미군 전함이 입항한다.
물론 기지반환이 미군의 완전철수와 맞물려 진행된 필리핀의 사례를 우리의 기지전환에 수평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미국의 기지반환 이후 15년가량의 시간이 지난 필리핀이 상당한 노하우와 잠재력을 축적하고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국과 필리핀은 1898년 미-스페인 전쟁 이후 미국이 사실상의 새로운 점령자로 등장하면서 양자 관계를 형성했다. 1946년 필리핀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양국은 1947년 군사지원협정을 체결하면서 안보협력을 제도화했고, 이와 함께 군사기지협정(Military Bases Agreement·MBA)도 체결했다. MBA에 따라 필리핀 내에는 다수의 미군기지가 구축됐다. 대표적인 것이 앙헬레스 지역의 클라크 공군기지와 바기오 지역의 존헤이 공군기지, 수비크만의 해군기지였다. 기지 제공과 동맹 유지에 대한 보상으로 미국의 대규모 경제군사지원을 받은 필리핀은 1950~60년대 동아시아의 중견 국가로 발돋움한다.
그러나 미국과 필리핀 간의 MBA는 필리핀 내 미군기지의 무상임대를 기본으로 사실상 미국에 무제한적인 군사작전을 허용하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필리핀 국내에서 자주성 논란이 심각하게 제기되자, 양국은 1966년 ‘러스크-라모스 합의’를 통해 기지 사용기간을 (1966년부터) 25년으로 단축했다. 이에 따라 필리핀 내의 미군기지 사용은 1991년에 만료되게 됐고, 어느 한쪽이 기한만료 1년 전에 기지폐쇄 의사를 밝히면 해당 기지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됐다.
이후 양국의 제반 여건은 1970년대와는 많이 달라졌다. 필리핀 정부는 미국의 경제원조 규모가 만족스럽지 않았고, 1987년의 민주화로 만들어진 필리핀의 새 헌법에선 기지사용 협정이 연장되려면 상원의 승인(3분의 2 동의)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민주화 진전에 따라 고양된 필리핀 내의 민족주의 분위기는 미군 주둔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점차 증폭시켰다. 필리핀이 여전히 중요한 기지였지만 미국 역시 원조 중심의 지원정책에 점차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1991년 9월16일 기지협정 연장안이 상원에서 부결되는 의외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부정적 여론이 팽배하긴 했으나 여전히 일정 수준의 미군 주둔을 필요로 하는 필리핀 정부로서도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민주화 과정에서 집권한 아키노 정부가 의회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데다, 필리핀 정치인들이 ‘국민의 힘(People’s Power)’ 혁명 이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민족주의적 지식인층과 학생운동 세력의 반핵(反核) 기지운동 요구를 무시하기 어려웠던 게 주요 이유였다.
여기에다 1991년 6월의 클라크 공군기지 인근 피나투보 화산 폭발은 미국의 결심을 촉발했다. 화산재가 클라크 공군기지와 수비크 해군기지의 상당부분을 오염시켜 상당한 액수의 복구비용 지출이 불가피해진 것. 결국 미국은 연장안 부결을 계기로 최소 2년은 사용이 어려울 듯 보인 클라크 기지를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수비크 해군기지는 잠정적으로 유지되기를 희망한 것으로 보인다. 하와이에서 아태 지역으로 전개되는 7함대 전력의 중간 기항지로서, 괌을 제외하면 수비크 이외의 대안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협정 연장안 부결과 동시에 필리핀 정치권과 시민단체들은 미군기지의 전면적인 폐쇄를 강력히 요구했고, 마침내 1992년 11월24일 수비크만에서 미군이 철수하면서 미합중국 군대의 필리핀 주둔은 막을 내렸다.
부정적 여파는 극복됐다?
미군 철수가 필리핀 국민의 자존심을 고양하고 국가의 상대적 위상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됐을지는 몰라도, 필리핀 정부는 이에 상응하는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주둔 기간 미군 당국은 필리핀 정부 다음으로 최대 인원을 고용한 고용주였다. 1988년 기준으로 미군이 직접 지출한 경비는 5억3000만달러 이상으로 당시 필리핀 전체 GNP의 1.6%를 차지했다. 직접적 비용 투입 이외에도 미국은 필리핀 경제성장에 대한 지원, 해외자본 유입의 보증인 노릇을 했다. 미군 철수로 인해 예상되는 직접 손실은 1992년을 기준으로 약 10억달러에 달한다는 추산이었다.
특히 클라크와 수비크 양대 기지 인근에서 미군을 상대로 생업을 영위하던 올롱가포, 디날루피안, 앙헬레스 지역 주민들은 기지 철수 예정일이 가까워오자 기지협정을 연장하지 않기로 한 정부의 결정에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필리핀 정부는 미군 완전철수 이전에 인근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1992년 3월 ‘공화국 법률 제7227호’가 제정됐다. 반환기지 개발 및 민수(民需) 용도로의 전환을 위해 ‘기지전환청(Base Conversion and Development Authority·BCDA)’을 설립하고 수비크와 클라크 지역 개발계획을 수립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1993년 BCDA가 공식 출범했고, 수비크 지역은 자유무역항으로 지정됐으며, BCDA와 연계해 수비크지역의 개발을 담당할 ‘수비크만 관리기구(Subic Bay Metropolitan Authority·SBMA)’가 설립됐다. 클라크 지역에도 ‘클라크 개발센터(Clark Development Center·CDC)’가 설립되어 이 지역을 경제특구로 지정했다. 이들 기구에는 중앙정부의 특별 재정지원이 이뤄졌다. 그러나 기지전환 작업이 본격화하기까지는 이들 기구가 설치된 이후에도 5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고, 반환 기지에 대한 마스터플랜이 마련된 것은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방대한 면적의 기지를 전환하는 데 필요한 재원의 조달이 필리핀 정부의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지 반환 후 14년이 지난 지금 필리핀 정부와 BCDA 등은 그 부정적인 여파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주장한다. 고용창출이나 부의 축적이라는 측면에서 주요 미군기지 지역의 경제는 이미 미군 주둔시기에 비해 나아졌으며, 장차 마스터플랜이 실현되면 동아시아의 물류 및 관광 거점으로 부상하게 되리라는 비전도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수비크 지역에는 쇼핑몰, 종합산업단지, 호텔, 리조트 등이 자리잡았다. BCDA는 미군 주둔 당시 2만명 안팎이던 고용인구가 2003년을 기준으로 5만여 명에 달한다고 설명한다. 수비크 지역에는 세계적인 물류유통회사인 페덱스의 아태 지역 허브가 자리잡았다. 클라크 지역의 경우 3개 공단을 포함한 제조시설, 농업단지, 레크리에이션 시설(카지노, 골프장 등), 국제공항 등이 입주했다. 미 공군이 쓰던 격납고도 필리핀 공군의 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장밋빛 비전의 이면
여기까지가 수비크에 체류하기 이전에 필자가 필리핀의 기지전환과 관련해 갖고 있던 배경 지식이다. 체류 기간 필자는 필리핀 정부가 제시한 비전과 통계자료가 실제 주민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비교해보고, 이를 바탕으로 미군기지 재편을 앞두고 있는 우리의 경우, 특히 의정부와 동두천 등 경기 북부지역에 원용될 만한 교훈은 무엇인지 따져볼 생각이었다. 기지반환 이후 15년의 시간이 경과한 만큼 비전과 실제 사이의 괴리가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가 깨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필자가 현지 주민들과 부딪치며 확인한 수비크와 클라크의 기지전환 현황은 결코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는 것이었다. 현지에서 접한 각종 자료를 종합할 때 수비크 지역의 전반적인 개발현황은 2000년대 초반 상황에서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었고, 새로운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의 흔적 역시 찾기 힘들었다.
오히려 수비크 개발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는 페덱스 허브도 수년 내에 중국으로 옮겨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방대한 규모의 면세 쇼핑몰로 선전되고 있는 매장들은 우리 기준에서는 그저 그런 할인점에 불과하고, 종합산업단지에 입주한 공장들에서도 별다른 활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수비크 자유무역항 지구 내의 관광지는 물론 인근의 유명 관광지 역시 동남아 지역의 여타 경쟁지에 비해 경쟁력이 부족해 보였다.
클라크 지역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각종 해외기업의 투자가 줄을 잇고 있다는 선전과 달리 이 지역의 산업활동에선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수비크보다 다소 규모가 클 뿐 해외 구매자의 시선을 끌어들이기 힘든 그저 그런 매장들이 모인 면세구역도 한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관광사업의 경우 1992년 이후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 피나투보 화산으로 통하는 변변한 도로조차 개발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 같은 현상은 장기적인 개발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일시적 문제나 대형 개발사업에서 흔히 불거지는 초기 자본 유입의 지연 때문이 아니었다. 수비크와 클라크의 개발 비전이 많은 부분에서 과장됐거나 현실적인 문제점을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필자의 시각에서 필리핀의 기지전환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중대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옛 클라크 기지 연병장의 스토첸 요새 기념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 기병대는 1902년 목초지였던 이곳에 요새를 세웠다. 필리핀은 미군 주둔 당시의 흔적들을 관광자원으로 보존하고 있다.
직선거리 150km에 불과한 마닐라와 수비크를 차량으로 이동하려면 교통사정에 따라 3시간30분~5시간이 소요된다. 필리핀 정부와 BCDA도 이러한 사정을 감안해 수비크와 클라크, 인근의 주요 거점지역인 탈락, 마닐라를 연결하는 직통 고속도로의 건설을 2007년이나 2008년 내에 완료하기로 계획하고 있지만, 과연 기간 내에 개통이 이뤄질 수 있을 지는 미지수로 보였다.
둘째, 유비쿼터스가 키워드가 된 21세기의 물류중심지는 도로망과 운송체계뿐 아니라 정보와 통신의 흐름이 유기적으로 결합돼야 한다. 아시아 지역에서 물류중심지를 지향하는 주요 지역은 모두 이 같은 방향으로 개발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필리핀의 정보통신체계는 비효율성과 느린 속도로 악명이 높다. 전화료 등의 통신요금은 동남아 지역 내에서 가장 비싼 편에 속하며, 마닐라 이외의 지역에서 인터넷에 접속하려면 대단한 인내심과 관용이 요구된다. 우편체계 역시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셋째, 전통적으로 아태 지역의 상업군사적 요충지에 위치했던 필리핀의 지전략적 입지 역시 교통정보통신의 발달과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등 인근 국가들의 적극적인 개발 계획으로 인해 그 가치가 점차 저하되고 있다. 아시아 내의 다른 지역들이 유사한 비전을 가지고 해외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현실에서 필리핀만이 유일한 대안이 될 수는 없으며, 이는 수비크와 클라크 지역 개발에 대한 장기적인 구상이 자칫 무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넷째, 돌려받은 기지에서 관광을 촉진한다는 구상을 실현하려는 정책 역시 현재로서는 방만하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려워 보였다. 수비크의 경우 여타 지역과의 경쟁력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리 볼거리가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스페인-미국-일본 순으로 정복과 점령을 경험한 필리핀인들이 태생적으로 지닌,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 역시 관광지 개발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인 듯하다.
무엇보다 지역개발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주민 전체가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기지전환 과정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수비크와 클라크 지역을 벗어나 올롱가포나 앙헬레스 지역 주민들을 만나보면 기지전환에 대한 냉소적인 반응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들의 가장 큰 불만은 수비크와 클라크 지역 개발의 혜택이 자신들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 기지전환이 시작되면서 고용효과가 창출된 것은 사실인 듯했지만, 그 고용기회를 잡은 것은 인근지역의 일반 주민이 아니라 고등교육이나 기술훈련을 받고 기지전환과 관련된 관료조직과의 연줄을 지닌 청년들이라는 것이다.
정작 기지전환 당시 20~30대의 나이에 적지 않은 부양가족을 거느리던 주민 상당수가 실업자로 전락하거나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기지전환의 수혜가 고르게 돌아가지 못하고 많은 이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하는 상황에서, 주민이 적극 동참하는 진정한 개발이 이뤄지기는 힘들어 보였다.
간과해선 안 될 타산지석
수비크와 클라크 기지전환의 어두운 이면이 결코 남의 일일 수만은 없는 것은, 한국에서도 조만간 미군 기지반환 이후의 개발 문제가 현실로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장기간 미군이 주둔해온 동두천과 의정부의 경우 미군이 본국으로 철수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민 처지에서는 결국 해당 지역에서 미군이 빠져나가는 것은 필리핀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특히 캠프 케이시, 호비, 캐슬, 모빌, 님블, 짐블스의 6개 기지를 중심으로 도시 전체면적의 40%가량이 미군 공여지에 해당하는 동두천에서는 이미 미군의 이동에 대한 주민의 불안이 감지되고 있다. 2003년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FOTA) 회의에서 합의된 원칙에 따라 향후 2사단의 한강 이남 재배치가 현실화한다면 이러한 불안은 더욱 증폭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 경기도 등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우리에게 반환되는 미군 공여지를 포함해 경기 북부 10여 개 지역을 첨단 산업단지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필리핀 정부가 수비크와 클라크 지역에 제시한 계획과 사뭇 흡사한 모양새다.
그러나 파주와 동두천, 의정부 등 미군이 주둔하던 지역의 경우, 미군을 상대로 주민들이 수입을 얻어내던 업종은 대부분 서비스업이라는 점에서 제조업 위주의 지역개발이 미군 이동에 따른 주민 손실을 상쇄하거나 혹은 상회하는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좀더 면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수비크와 클라크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제조업과 물류단지 건설 일변도로 기지전환이 추진될 경우, 이 같은 계획이 매우 성공적으로 완성된다 해도 이로 인해 주로 이익을 얻는 것은 그 지역에서 실제로 삶을 영위해온 주민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제3자가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수비크와 클라크에서의 기지전환 부진은 동맹의 조정이나 기지반환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우선 미군 주둔 지역에서 성공적인 기지전환을 이뤄내려면 과거의 유산을 무조건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적절히 인정하고 활용하는 운영의 묘가 필요하다. 수비크와 클라크에서 그나마 긍정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은 필리핀이 기존의 미군시설을 재활용하면서 미군 주둔을 있는 그대로의 역사로 남겨두려 했다는 점이다.
적절한 운영체제나 사회간접자본의 뒷받침이 미약해서 그 효과가 충분히 나타나지는 않고 있지만, 외국군의 침략이나 주둔 경험을 일종의 관광자원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러한 사례는 파주, 의정부, 동두천 등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반환되는 기지의 일부만이라도 미군의 주둔 경험을 활용한 테마파크 등으로 건설하고, 향후 한강 이북에 건설될 한미 공동훈련장으로 이동하는 미군이 들를 만한 명소로 개발하는 식의 융통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미국-필리핀의 동맹관계 변화와 기지전환 과정은 양자 혹은 다자동맹관계가 국내 정치적 요인에 의해 지나친 영향을 받게 될 때 긍정적 효과보다는 부정적 유산을 창출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동맹정책이 국내정치에 지나치게 종속될 경우 전략적 가치하락으로 연결되어 결국은 동맹의 약화를 불러올 수 있다. 필리핀의 경우 민주화 과정에서 고양된 ‘민족’ 및 ‘반외세’ 개념에 집착한 나머지 전반적인 동맹의 이완을 초래했다.
“모두 ‘그들’의 일일 뿐”
이에 더해 자신들이 보다 각성됐다고 믿는 일부가 주도하는 기지반환이나 미군철수가 결국 지역 주민의 이익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수비크와 클라크에서의 기지전환에 관한 한 ‘People’s Power’에는 진정한 ‘People’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최소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감상이다.
기지전환 과정에서 개발전략과 비전이 지역 주민에게 확신을 주지 못할 경우 그 전반적인 진행이 부진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은 가장 큰 교훈이다. 수비크와 클라크에서 필리핀 정부가 택한 전략, 즉 물류중심지의 건설이나 민수용 관광중심지의 개발은 원론적으로는 합리적인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세부적인 차원에서는 그 수혜자를 잘못 선택한 것이었다. 교육수준이 높은 인력을 위주로 하는 개발정책과 충원은 수비크와 클라크 인근 지역 주민의 실생활에 상당한 타격을 줬고, 지금도 도처에서 적지 않은 상흔을 남기고 있다.
|
향후 의정부와 동두천 지역의 개발에서도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지역에 대규모의 생산단지를 건설한다면,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미군 대상 서비스업에 종사하던 대다수 지역주민이 이런 변화에 적응할 수 있을까. 그들은 새롭고 자부심에 찬 지역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자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그것은 누구를 위한 기지전환인가. 필리핀 체류기간에 가장 충실한 조력자이자 친구였던 현지인 운전기사가 한 말은 이러한 교훈들을 한마디로 함축하고 있었다.
“필리핀인의 자존심? 미래를 향한 변화? 다 ‘그들’의 일일 뿐입니다. 한때 번창했던 제 고향 올롱가포는 쇠락했고, 서민의 삶은 더욱 고달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