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의 변종인 체크북 저널리즘은 경쟁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미국 사회의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하루가 다르게 확산되어왔다. 보도 경쟁은 시청률, 구독률로 당장 수치화된다. 보도-편집 책임자는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시청률, 구독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한 건에 집착하게 된다. 이들의 처지는 심정적으로 이해가 간다.
체크북 저널리즘은 주로 유명인사의 신변잡기에서 비롯된다. 재미있고 자극적인 기사가 주도하는 오늘의 언론 현실에선 위험 부담이 있고 확인하기 쉽지 않은 정치적 음모보다는 연예인, 스포츠스타 등 주로 유명인사의 은밀한 사생활과 관련 뉴스가 제격이다.
‘독점 인터뷰’와 ‘뭉칫돈’의 교환
세계적 테러범도 언론에 상업성이 뛰어난 취재원이다. 28년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저격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터키인 메흐메트 알리 아그자는 28년 옥살이를 마치고 2010년 1월18일 출소한다. 교황 저격 시도로 세계인의 관심을 집중시킨 아그자는 이미 자신의 이야기를 ‘다빈치 코드’의 저자인 댄 브라운에게도 보냈다. 그는 언론 매체를 통해 교황 저격 등과 관련한 여러 비밀을 밝힐 계획이라고 한다. 세계 100여 개 언론사로부터 다양한 제안을 받고 있는 그는 미국의 한 TV방송국에 독점 인터뷰하는 대가로 무려 200만달러를 요구했다고 이탈리아 언론이 보도했다.
11명 여인 순식간에 등장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의 ‘불륜 스캔들’과 관련된 미국 언론의 보도행위도 체크북 저널리즘의 전형적 사례에 해당될 것이다. 골프황제와 불륜관계였다는 여성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등장해 11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녀의 만남은 제3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한 일이다. 미국 언론이 이들 여성을 찾아내어 보도할 수 있었던 것은 ‘발군의 취재력’ 덕분이 아니다. 우즈의 여성들이 이렇게 신속하게 폭로될 수 있었던 건 미국 언론계에서 체크 저널리즘이 매우 뿌리 깊고 왕성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우즈가 교통사고를 일으킨 직후부터 미국과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들, 미디어 웹 사이트들은 우즈의 성(性)추문 대상 여성들의 사진과 신원을 전하고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 여성은 언론 인터뷰에서 우즈와의 밀애 장면까지 상세히 폭로했다. 다른 한 여성은 우즈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통째로 언론에 넘겨 보도되도록 했다.
우즈의 불륜 보도 대부분은 수표에 의존한다. 우즈의 내연녀 중 일부는 방송사를 대상으로 수표를 요구했다. 사건 초기 어떤 의혹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사생활을 존중해줄 것을 호소한 우즈의 목소리는 언론에서 외면당했다. 미국의 한 출판사는 “우즈의 누드 사진들을 제공받았다(다른 말로, 뒷거래로 사진을 얻었다)”고 밝혀 이번 파문의 끝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 같은 체크북 저널리즘에 대해 ‘뉴욕타임스’ 등 미국의 엘리트 언론은 애써 무시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미국의 엘리트 언론 중에서도 공중파 TV는 사정이 좀 다르다. 내부적으로는 체크북 저널리즘에 물들어 있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CBS는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과 관련해 전직 백악관 관리와 인터뷰하기 위해 최소 10만달러를 지급했다. 닉슨이 사임한 이후엔 이번엔 닉슨과 인터뷰하기 위해 50만달러 이상을 건넨 것으로 훗날 밝혀졌다.
언론, 콜걸에게 돈 건네
체크북 저널리즘은 테러리스트, 범죄자, 파렴치범, 콜걸에게까지 엄청난 부를 안겨줄 수 있다. 이들은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고 유명인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언론계에선 체크북 저널리즘의 여러 윤리적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목소리도 많다. 저널리스트에게 있어 정보는 경쟁사를 제압하고 수용자의 시선을 잡아두는 매우 강력한 무기가 된다. 특히 유명인사의 스캔들은 세계적 화제가 되고 시청률과 구독률을 상승시킨다. 이는 언론사의 수익과 직결된다. 미국 언론계에선 거래해서는 안 되는 정보를 두고도 제보자와 금액을 놓고 밀고 당기는 일이 벌어진다. 최근 들어 체크북 저널리즘은 유명인사 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로 확대되고 있다. 언론사가 교통사고 현장의 동영상을 구하기 위해 사고 희생자나 목격자에게 상당한 액수의 금전을 제공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흉악 범죄를 저지른 재소자와의 인터뷰를 위해 교도관에게 봉투를 건네는 행위도 새삼스럽지 않다.
미디어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체크북 저널리즘의 기본 개념마저 흔들리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스포츠 전문 잡지인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트’는 이 같은 행위에 대해 “뉴스를 구입한다(We are buying news)”라는 점잖은 표현으로 아예 ‘합리화’하는 실정이다. 체크북 저널리즘이 횡행하는 오늘날 저널리즘의 정도(正道)를 지키려는 저널리스트와 뭉칫돈을 준비해두고 있는 저널리스트와의 싸움은 어떻게 진행될까.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까. 유감스럽지만 겨울 날씨만큼이나 그 결말은 음울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