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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감’못잡는 한국 경제학자들

한국경제 ‘감’못잡는 한국 경제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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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각에 대해 강석훈 교수는 “의사가 술 담배를 많이 하는 환자에게 ‘금주, 금연하지 않으면 건강에 해롭다’고 조언할 수는 있지만, ‘술 담배를 끊지 않으면 앞으로 10개월 후에 쓰러진다’고까지 단언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고비용 저효율’로 요약되는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외환위기가 닥치기 오래 전부터 거듭 주의를 환기시켰지만, 한국경제가 무너지는 시점까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었다는 것.

더욱이 정확한 예측을 시도하려면 정확한 데이터가 확보돼야 하는데, 당시로선 이것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당시 한국은행 발표로는 수백억 달러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차입금을 상환하느라 하루에도 엄청난 달러가 빠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 가용 외환보유고가 어느 정도인지는 베일에 가려 있었다.

한국은행이 외환시장과 관련된 데이터를 거의 공개하지 않다 보니 경제학자들조차 환율변동이 시장에 의해 이뤄지는지, 외환당국에 의해 이뤄지는지 모를 정도였다. 외채 규모와 구조에 대한 정보도 모두 정부가 독점하고 있었다. 또한 그 무렵 정부가 발표한 금융기관의 부실여신비율은 1%가 채 안 됐는데, 이를 미국이나 일본의 기준으로 계산했을 때의 비율은 ‘극비사항’이나 마찬가지였다.

홍익대 무역학과 박원암 교수는 “데이터가 부족한 상황에도 위기 이전부터 수많은 학자들이 위기를 경고했다. 위기가 임박해 취해진 정책들이 위기를 오히려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도 수없이 지적했지만 경제정책을 운용하는 관료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고 말한다.

“미국처럼 경제학자들로 구성된 정책자문위원회 같은 것도 없었으니 학자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채널은 신문이나 잡지 칼럼밖에 없었다. 많은 학자들이 글을 썼다. 그중에는 위기를 경고하는 글을 쓴 학자도 있었고 안심해도 된다고 쓴 학자도 있었다. 학계에는 늘 찬반양론이 공존하게 마련이다. 이들을 신중하게 취사선택해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이 정책 담당자의 임무다. 평소에는 경제학자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다가 위기가 닥치니까 전체 경제학자들을 싸잡아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에게 경제현안을 자문하고 정례 보고서를 발행해 경제정책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경제자문위원회(Council of Economic Advisers) 위원들이 모두 경제학 교수들로 구성돼 있다고 한다. 위원장을 맡은 교수는 각료급 대우를 받는다. 학교를 휴직하고 위원회에 몸 담은 교수들은 이름을 걸고 경제정책을 자문하므로 자신과 반대되는 견해를 포함한 학계 안팎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한국 경제현실 외면

그러나 IMF 경제위기에 대한 책임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한국 경제학자들이 한국 경제현실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에 소홀하다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다. 미국에서 배운 미국 중심의 주류 경제학 이론을 국내로 단순 이전하기만 했을 뿐 한국 경제현실에 바탕한 자체 이론 개발을 등한시한 나머지 정책수행이나 기업경영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게 많은 이들의 지적이다.

서울대 경제학부 이지순 교수는 “최근에는 많이 나아졌지만, 과거에는 미시·거시경제학, 재정학, 화폐금융론 등을 강의하면서 주로 미국에서 나온 원서나 그 번역본 수준의 교과서를 사용했는데, 이런 교재들은 미국의 경제제도와 정책, 데이터를 중심으로 이론을 설명하기 때문에 가르치는 교수나 배우는 학생 모두 ‘이런 것들이 도대체 한국경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털어놨다.

사상 초유의 환란을 겪은 뒤에도 그 전후 과정을 면밀히 분석하는 체계적·종합적인 연구가 부족했다. 외환위기와 관련된 학회와 세미나는 수없이 열렸지만 그 대부분은 논문이나 한 편씩 내고 끝내는 일회성 행사에 그쳤다.

한 경제학자는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관련학자들이 꾸준히 자료를 축적하면서 지속적인 연구를 수행해야 하는데, 학자들의 관심이 벤처니 전자금융이니 하는 최신 유행을 좇아 확확 바뀌면서 금세 열기가 식었다”고 지적한다. 누군가가 지금도 외환위기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면 다른 학자들로부터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해묵은 주제에만 매달린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일각에서는 우리 경제가 멕시코 경제를 따라가고 있다든지, 제2의 외환위기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등의 우려가 나오고 있지만 이에 대한 분석적인 연구를 찾아보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이 분야의 연구를 계속해온 한 관변 연구소 연구위원은 “연구를 하면 할수록 우리 경제를 낙관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며 “지금 당장은 그럭저럭 꾸려가고 있지만, 대우그룹 문제와 투신권 문제 등 부실 처리가 지연되고 정부 및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이 미진해 또 한 번 예기치 않은 외부 충격이 올 경우 우리 경제의 문제해결 능력이 극히 의심스러운 형편인데도 정부나 학자 모두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재정적자 문제도 조만간 심각성을 더해갈 것으로 예상되지만 거의 연구되지 않고 있다. 이는 공적 자금 지원 문제와 맞물려 당장 금융·재정 분야의 현안으로 불거질 전망. 공적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면 재정적자가 더 악화되고 이를 해소하려면 다시 채권을 발행해야 하는 악순환이 나타나기 쉽다. 이렇게 되면 채권금리가 오르면서 일반금리의 상승을 초래, 만성적인 고금리 상황으로 빠져들 위험성이 높다. 상명대 경상행정학부 백웅기 교수의 말.

“정부는 2004년까지 균형재정을 맞출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지만, 환란, 거듭된 공적 자금 투입, 실업자 구제기금 확보 등으로 재정적자가 누적되면서 정부의 부채규모가 너무 커졌다. 재정적자는 일단 발생하면 다시 흑자로 돌리기 어렵다. 미국은 레이건 정권 초기부터 재정적자 문제로 시달리다가 15년이 넘게 곤욕을 치렀고, 일본 유럽 등도 마찬가지였다. 재정적자가 심각해지면 재정 확대정책을 못 쓰게 되므로 통화정책을 조절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도 대통령의 임기 말까지 균형재정을 맞춘다는 정치 논리에 밀려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 밖에 통일에 대비한 연구, 경제에 대한 정부의 몫과 그 한계에 대한 연구, 기업에 대한 연구 등도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기업에 대한 연구는 경제학에서 경영학이 분리되면서부터 눈에 띄게 소홀해졌는데, 우리 경제학자들은 시장경제를 추종하면서도 대개 반기업적 성향을 갖고 있어 기업을 이윤극대화의 주체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것. 이 때문에 기업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무작정 비판부터 앞세우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불합리한 교수 평가기준

한국경제를 연구하지 않는 한국 경제학자.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정들이 있다.

우선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학자들이 우리 경제에 대한 데이터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외국에 나와 있는 데이터만 보고 우리에게도 이만한 데이터쯤은 당연히 있을 것으로 알고 실증연구에 뛰어들었다간 고생만 잔뜩하다 두 손 들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통계작업의 미비로 데이터 자체가 부족할 뿐 아니라 경제당국이 데이터를 공개하는 데 인색하고, 공개된 데이터의 신뢰도도 낮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근 정부는 소득분배 개선정책을 강조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소득분배 상황에 대한 데이터는 태부족이다. 거의 유일한 자료가 통계청에서 내는 ‘도시가계연보’인데, 이는 2인 이상의 도시 근로자 가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 1인 가구와 자영업자, 농어촌 지역 주민의 사정은 알 수가 없다.

이런 기초적인 자료도 없이 소득분배 개선이나 국민연금, 의료보험 정책 등을 연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업·금융기관 관련 자료의 경우 외환위기 이후 비로소 ‘IMF 기준’에 맞는 데이터들이 나오고는 있다지만, 이들이 분석의 틀로 유용하게 다뤄지려면 상당한 기간 동안 축적돼야 한다.

‘정보 사각지대’에 가까운 대학에 비해 연구소는 최근의 데이터를 입수하기가 비교적 유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 관변 연구소 경제학자는 “금융부문의 부실현황이나 은행 경영상태 등 정작 써먹을 만한 데이터는 아직도 구하기 힘들다. 금융감독원 자료 하나 얻으려고 금감위원장 ‘빽’을 써야 할 때도 있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부실 처리를 위해 국민에게 막대한 공적 자금을 요구하면서 이런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한 침해다”고 비난했다.

대학교수들에 대한 불합리한 연구평가 기준도 한국경제에 대한 연구 의욕을 꺾고 있다. 교수들은 해외에서 발간되는 학술지에 연구논문이 실릴 경우 대학의 교수 평가기준이나 학술진흥재단 등의 연구비 지원기준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실으려면 미국 등 선진국의 학계가 관심을 가지는 주제를 다뤄야지, 우리의 관심 주제를 연구해서는 주목받기 어렵다. 더욱이 사례 연구는 연구실적에 포함되지도 않아 학자들은 현장 조사마저 꺼리게 된다.

이렇다 보니 특히 젊은 경제학자들이 한국경제의 당면 과제를 분석하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학문적 ‘세계화’ 드라이브의 그늘인 셈이다.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한국의 모든 경제학자가 여기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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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삼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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